(1967년 2월 25일~ )
에고와 탐욕 체포 당시 모습 | 현재 모습 |
트레이딩은 참 쉬워요.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
1. 개요
영국의 파생상품 딜러. 공식 웹사이트 # 닉리슨닷컴200년의 역사를 가진 영국 베어링스 은행을 개인의 과욕과 오판으로 파산시킨 장본인.
2. 초기 이력
그는 노동자 계급 부모에게 태어났다. 파미터 종합학교(Parmiter's School)에 진학한 그는 고교 시절 그는 수학에서 낙제점을 받았다.18세 때인 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쿠츠 프라이빗 은행(Coutts private bank)에 입사하여 롬바드 가(Lombard Street) 지점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였다. 20세 때인 1987년 모건 스탠리로 이직하여 선물, 옵션 백오피스에서 파생상품 거래를 청산·결제하는 업무를 했다.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1년 후인 1988년 베어링스 은행으로 이직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홍콩 등에서 잠시 근무한 후 25세 때인 1992년 싱가포르 지사에 새로 개설된 선물 및 옵션 사무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3. 베어링스 은행 파산 사건(The Collapse of Barings)
베어링스 은행은 그야말로 유서깊은 영국의 명문 은행으로,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일때 돈을 빌려 준 은행이었으며, 영국 왕실도 고객으로 두어 "여왕의 은행(the Queen's Bank)"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이런 유명세는 창작물에도 자주 나타났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유럽의 손꼽히던 갑부인 에드몽 당테스가 작중 무제한 대출권을 받아 자주 애용하던 은행으로[1] 베어링스 은행이 등장하고,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Phileas Fogg)가 내깃돈으로 내건 자산 2만 파운드를 맡겼던 은행의 이름도 베어링스 은행으로 등장한다.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닉 리슨은 모건 스탠리를 거쳐 21세가 되던 1988년 베어링스 은행에 입행한 후, 1992년 은행이 싱가포르에 신규 설립한 선물거래 사무소의 책임자로 발령받았다. 오사카(OSE)와 싱가포르 거래소에서 모두 닛케이 225 선물을 취급하기 때문에, 리슨은 두 거래소의 가격 차이를 이용한 지수차익거래로 이익을 얻었다.
지수차익거래만 하던 리슨은 방향성 투기거래, 즉 단순히 선물을 매수하거나 매도하는 전략을 시도하게 된다. 당연히 신이 아닌 이상 손실이 발생하게 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비밀계좌로 분리되었다.
당시만 해도 싱가포르 거래소에서는 전산매매가 아닌 수신호를 이용한 공개호가 매매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직원들의 실수로 매수할 계약을 매도하는 등의 에러가 종종 일어났으며, 이런 에러에서 발생한 손실은 회사가 손실을 부담했다. 그래서 딜러들은 회사가 관리하는 에러계좌에 손실을 기록하였다. 리슨도 예외는 아니어서, 20계약을 매수해야 할 것을 직원이 실수로 매도해버리는 일이 발생했고, 시장이 불리하게 움직여 그는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냈다. 본사에 보고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라고 생각한 리슨은 이것을 다른 에러계좌에 숨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88888 계좌다.
그런데 88888 계좌를 이용하는데 맛을 들인 나머지, 리슨은 다른 손실도 모두 이 계좌에 기록해 손실을 은폐했다. 1992년 말에는 손실이 2백만 파운드로 불어났고, 1994년 말에는 5억 1200만 파운드에 달했다.[2] 그는 대차대조표와 장부를 교묘하게 조작해 본사에 손실이 보고되지 않도록 손을 썼으며, 본사에서는 그를 신뢰해 더 많은 돈의 관리를 맡겼다.[3]
계속되는 손실로 인해 수시로 증거금 추가납부 요구(마진콜)을 당했는데, 이 때부터 증거금을 충당하기 위해 닛케이225지수 옵션에 대해 스트래들[4] 매도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래들 매도는 시장의 변동성이 작아야 이익을 낼 수 있는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변동성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리슨이 손실을 2,000만파운드 넘게 입게 된다.
어쨌든 이 때만 해도 리슨은 월급 5만 파운드에 13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자랑하는 실력파 딜러였다. 당시 업적으로는, 1993년 당시 싱가포르 지사가 베어링스 은행의 전체 수익의 20%를 기록하였고, 1994년의 첫 7개월 동안만 해도 미화 7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주는 대활약을 보여 1993~4년 최고매니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1995년 1월 16일, 리슨은 닛케이 지수가 하룻밤 새 크게 변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고 스트래들 매도 포지션[5]을 취했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17일 고베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연히 닛케이 지수는 폭락했고, 리슨은 이 시점에서 5,000만 파운드의 손실을 입었다. 리슨은 니케이 지수가 다시 원상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물매수 포지션을 취함과 함께 20,000계약을 더 매도하고 특이하게도 일본 국채선물을 매도했지만, 한 번 떨어진 지수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고 국채선물 또한 급등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8억 2,700만 파운드(= 약 14억 달러 = 약 1.5조원)의 손실을 냈고, 이는 베어링스 은행 자기자본의 두 배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베어링스 은행 이외에도 영국 금융감독기관이었던 영란은행이 수습책을 마련하나 해당 자금이 쉽게 모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구제금융 자금이 다 조달되기 전에 베어링스 은행은 파산을 선언했고, 이후 네덜란드의 ING 그룹으로 매각되고 만다. 매각금액은 단돈 1파운드.[6]
이 모든 상황이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그는 겨우 만 28세였다.
1995년 2월 26일, 이 뉴스가 전세계를 강타하였고, 보도 3일 전부터 리슨이 실종된 상태였다. 그는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를 거쳐 도주했으나 이미 손실은 회사 측에서 파악한 상태였고, 결국 독일에서 체포되었다. 싱가포르로 송환된 그는 징역 6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암 치료를 위해 가석방되었다.
4. 그 후
리슨의 범죄 행각을 수사하면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취업 전의 범죄로 3,000파운드의 벌과금을 추징당한 전력을 숨겼으며, 당시 막대한 거래를 수행하기 위해 문서를 위조해 왔음이 드러나, 증권업계 종사자로서의 윤리적 결격자가 취업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리슨이 적격성심사를 통과하고 취업한 것이었기에 영국의 금융업계 자율규제와 감독당국의 역량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남김없이 폭로되었다.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경험을 《Rogue Trader》라는 제목의 자서전으로 썼으며, 같은 제목으로 2000년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의 자서전은 국내에서 《금융가의 불한당》으로 정발되었으며, 영화는 《겜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수감생활 중 아내 리사 리슨(Lisa Leeson)에게 이혼당했으며, 이후 2003년에 아일랜드 출신의 미용사 리오나 토메이(Leona Tormay)와 결혼하여 살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2011년 2월까지 아일랜드 서부의 골웨이(Galway)의 축구단인 골웨이 유나이티드 FC (Galway United FC)의 CEO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CEO이던 이 팀은 아일랜드 리그에 퇴출당해 비프로 리그팀으로 있었다가 결국 그가 물러난 뒤에 아일랜드 축구리그로 2014년 복귀했다.
최근에는 위험 관리부터 기업 지배 구조, 건강 관리 및 웰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연설가로 활동중이다.
5. 평가
경제/경영학계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리슨이 '고위험-고수익'이라는 파생상품 거래의 본질을 망각하고 헷지 없이 과도한 거래를 한 탓도 있지만, 그가 모든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리슨의 상급자들이 파생상품이라는 전문적인 거래에 참여하는 리슨을 과도하게 신뢰(정확히는 무신경하게 방치)하면서 비밀 계좌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점과, 비밀계좌와 같이 매매와 그에 따른 장부관리를 리슨이 단독으로 수행하는 등 베어링스 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전무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싱가포르 상품거래소(SIMEX, 현 SGX)도 손실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고 옵션 포지션보다 닛케이 225 지수선물 매수포지션을 최후에 순간에 약 43,000계약, 전체 미결제 약정의 30% 수준을 보유할 때까지도 아무런 시장 조치가 없었던 것이 은행 파산에 결정적이었다.즉 리슨의 스트래들 포지션은 하락장에서의 선물 매수포지션 규모에 비하면 적은 셈이었으나, 코스피200 옵션 시장이 태동할 무렵 대한민국 언론들은 옵션 매도가 베어링스를 파산시켰다는 식으로 서술하며 옵션 매도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개인들은 겁을 먹고 옵션 매수에만 나섰고, 초창기부터 수 년 이상의 상당한 기간동안 한국 파생 시장은 코스피 옵션 매도자들에게는 황금어장이나 다름없었다.[7]
이후 닉 리슨은 선물거래의 위험성과 그 선물거래를 관리하고 규제하는 시스템에 대한 부족을 직접 시연하며 널리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이그노벨상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구)주식 갤러리에도 이 사건을 묘사한 만화가 있다.
[1] 이 외에도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은행, 라피트 은행 등도 언급된다.[2] 위키백과에는 2억 800만, 리슨의 사이트에는 5억 12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원화 환산가는 12월 31일 당시 1파운드당 1230.59원이었으니 6,300억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예산의 대략 15%이었으니 엄청난 손실낸것이다.[3] 당시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는 리슨과 연관된 돈이 3,50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4] V자 모양으로 된 포지션. 대야 모양으로 생긴 포지션은 스트랭글. 일정 범위 내에서 시장이 움직인다면 항상 이득을 얻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손해가 선형적으로 커진다.[5] 주가가 특정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경우 일정 금액의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될 경우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 있다.[6] 이런 1달러 거래는 이외에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단순히 1달러에 법인을 합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인이 지고 있는 모든 부채도 합병 법인이 지고 간다. 그러니까 그 부채가 실질적인 인수 비용이 된다.[7] 물론 지금보다 쉬웠다는 얘기지 당시에도 여러 사람을 황천길로 보내곤 했다. 옵션 매도는 작지만 꾸준한 수익이 가능해도 변동성이 터질 경우 한방에 올인날수 있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정확한 설계가 필요한 포지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