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7-10 07:09:22

벨프 7세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랑고바르드 왕국 치하
파로알트 1세 아리울프 테오델라피우스 아토 트라사문트 1세
파로알트 2세 트라사문트 2세 힐데리크 트라사문트 2세 아지프란트
트라사문트 2세 루푸스 알보인 기술프 테오디키우스
힐데프란트
프랑크 왕국 치하
위니게스 수포 1세 아델라트 마우링 아델치스
랑베르 베렝게르 귀도 1세 람베르토 1세 수포 2세
람베르토 1세 귀도 2세 귀도 3세 람베르토 2세 귀도 4세
이탈리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치하
알베리크 보니파초 1세 피에트로 테오발트 1세 안스카리오
사를리오 우베르토 보니파초 2세 테오발트 2세 트라사문트 3세
판둘프 1세 트라사문트 4세 우고 1세 콘라트 아데마르
라니에리 1세 우고 2세
카푸아 가문 치하
보니파초 3세 페데리코 마틸다 라니에리 2세 마틸다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리인
베르너 2세 엥겔베르트 3세 하인리히 1세 울리히 폰 아템스 벨프 6세
벨프 7세 벨프 6세 콘라트 1세 판둘프 2세 콘라트 1세
교황 대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2세 하인리히 2세 디에폴트 베르톨트 1세 레이날트 1세
콘라트 3세 베르톨트 2세 레이날트 2세
}}}}}}}}}}}} ||

Welf VII (벨프 7세)
파일:벨프 7세.jpg
가문 벨프 가문
생몰년도 1135년 ~ 1167년 9월 11일 또는 9월 12일 (32세)
출생지 슈바벤
사망지 시에나
재위
기간
스폴레토 공작
(1160년 - 1167년)

1. 개요2. 행적

[clearfix]

1. 개요

스폴레토 공국 56대 공작.

2. 행적

1135년경 슈바벤에서 벨프 6세와 칼프 백작 고드프리트의 딸 우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풀렌도르프 백작 루돌프의 아내가 되는 엘리자베트가 있었다. 1152년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토스카나 후작 겸 스폴레토 공작에 선임된 뒤, 아버지가 슈바벤에 남아있는 동안 자신은 이탈리아로 내려가서 영지를 관리했으며 1154년부터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1160년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정식으로 스폴레토 공작에 취임했다.

1164년, 튀빙겐 궁정백 휴고가 강도 짓을 일삼던 노상 강도를 체포했다. 이 강도들 중에는 벨프 가문에 속한 이가 있었는데, 휴고는 다른 2명은 풀어주면서도 그 강도를 교수형에 처했다. 벨프 6세는 이에 반감을 품고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슈파이어 백작, 보름스 백작, 자링엔 백작, 바덴과 보부르크 후작, 칼프 백작 등을 포함해 벨프 가문에 속한 수많은 백작과 귀족들을 소집한 뒤 아들 벨프 7세에게 총 2,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튀링겐으로 쳐들어가게 했다. 휴고는 이에 맞서 1,500명의 병력을 소집했고, 1164년 9월 6일 데렝딩겐에 도착하여 휴식을 막 취하려던 벨프군을 기습했다. 먼 길을 행군하느라 지쳐있던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 붕괴되었고, 벨프 7세는 3명의 추종자들만 거느린 채 아칼름 성으로 피신했다.

아들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벨프 6세는 1165년 군대를 재소집한 뒤 친히 튀링겐으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힐드리즈하우젠, 팔츠그라펜바일러, 켈민츠 등 여러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휴고는 슈바벤 가주인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1166년 초 상 슈바벤 일대를 파괴하여 벨프군이 라벤스부르크 성으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이리하여 슈바벤 가문과 벨프 가문간의 전면전이 벌어지려 하자, 프리드리히 1세가 개입했다. 1166년 3월 울름 법정을 소집한 황제는 휴고가 이 모든 분쟁의 근원이라고 성토하고 벨프 7세 앞에서 3번 엎드려 잘못을 빌게 한 뒤 추레티엔(Churrätien) 성에서 억류될 것을 명령했다.

1167년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으나 도중에 군영 내에 창궐한 말라리아에 걸려 그 해 9월 11일 또는 9월 12일에 사망했다. 사후 스타인가덴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버지 벨프 6세 역시 1191년 12월 15일에 사망한 후 아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