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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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eport: Disaster at Ionith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나오는 책.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제3시대 271년~288년간 이루어졌던 유리엘 셉팀 5세의 아카비르 원정과 실패원인을 분석한 책이다.
2. 본문
원문
이오니스의 참극에 대한 제국조사위원회의 보고서
위원회 의장, Lord Pottreid
제1장: 준비
황제가 아카비르를 침공하고자 한 계획은 탐리엘과 아카비르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왕국들 정복이 시작된 27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282년 에스로니엣[1]에 있는 검은 항구의 함락으로 유리엘 5세는 궁극적인 목표를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즉시 그 항구의 개조를 명령했는데. 왜나하면 그 항구는 침략전쟁의 주요한 거점이였으며, 중요한 자원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황제는 또한 많은 수송선 건조를 지시했는데 해군 함선만으로는 아카비르를 횡단하기에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의 원정계획은 그저 단순한 변덕이 아닌 에스로니엣 정복이 끝나기 전부터 세심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에스로니엣의 군주 바쇼몬(Bashomon)이 제국에 284년에 항복한 후 황제의 모든 관심은 아카비르로 쏠리게 되었다. 285년과 286년에는 해군을 보내서 아카비르의 해상과 해안지역을 조사하도록 명하고 제국의 다양한 지식인들을 모아 정보를 모으도록 하였다. 이 모든 정보를 모아서, 아카비르의 남서쪽에 있는 세이치 왕국이 첫 번째 목표물로 정해졌다.
그러는 사이, 황제는 원정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원정을 위하여 극동함대로 불리는 새로운 함대를 만들었다. 그 위용은 다른 해군함들을 작아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그 함대는 탐리엘 역사상 가장 강한 함대였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각각 5, 7, 10, 14군단이 맨처음 상륙 부대로 정해졌고, 9, 17군단은 증원부대로 참가하기로 정해졌다. 이 상륙작전은 군 전체에 비해 소규모로 보이지만 대규모 부대의 장기 보급을 고려한 작전이었으며. 게다가 황제와 그 사령관들은 적어도 맨 처음에는 그다지 저항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군이 한번에 오직 4개의 군단만 수송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 조사단은 황제의 침략준비에 대한 어떠한 결점도 찾을 수 없었다고 적을 수밖에 없다. 침략이전에 사용된 정보를 기초로 하여 우리는 황제가 무모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일부사람들은 원정군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는 주장을 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부대를 수송하고 물자를 보급했다면 (제국 전체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단지 재앙의 규모를 늘릴 뿐이다. 즉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또한 제국의 다른 영토에서 군단을 빼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찬탈자 캐모런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황제는 탐리엘 밖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은 제국의 방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우리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만약에 원정군의 규모가 너무 컸더라면, 2개의 신설된 부대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의 손실은 제국에게 지방수비에 대한 취약점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아카비르 침략이 현재 제국의 힘을 넘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비록 황제가 아카비르에서의 땅을 넓히고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제국은 아마 그 뒤에서 붕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2장: 아카비르 왕국
원정군은 검은 항구(Black Harbor)를 288년 4월 23일에 떠났다. 그리고 6주일 후 맑은 날씨에 아카비르의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지점은 큰 강의 입구에 있는 작은 세이치 왕국의 항구였는데 탐리엘과 가깝고 비옥한 지대여서 군대의 보급 또한 원활하기 때문이었다. 세이치 왕국은 원정군이 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을을 포기했으며 원정군은 그곳을 차지한 후에 셉티미아(Septimia)라고 명명했다. 제국의 아카비르 최초 식민지였던 것이다. 황제는 새로운 식민지를 증축하고 극동 함대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항구를 넓히는 한편 자신은 2개의 군단을 이끌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군대는 저항없이 이오니스로 알려진 다음 도시를 점령했으며, 황제는 그곳에 원정군의 사령부를 세웠는데, 셉티미아 보다 더 컸으며 주변지역을 지배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정군은 아직 적의 정찰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실질적인 저항도 만나지 못했다. 비록 적의 정찰대가 계속 미행을 하여 규모가 큰 수색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대열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원정군이 부족한 병종은 기마대였는데, 함대의 수송 가능한 공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투마법사의 마법으로 정찰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황제는 세이치 왕 또는 이 땅을 다스리는 누군가와 접촉하기 위해서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노력은 군대를 이오니스에 정체시키고 분명히 침략에 정신을 못차렸을 적들을 다시 견고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황제는 세이치 왕국은 이미 자신의 힘에 놀라서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4개의 군단은 강을 따라 파수대를 설치하면서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의 길을 바쁘게 만들고 있었다. 기병의 부족 때문에 탐색활동은 제한되었고, 두 도시 사이의 교신은 수시로 아군이 붙잡지 못한 적들에게 위협받았다.
원래의 계획은 거점을 확보하는 대로 2개의 증원부대를 투입하는 것이었으나 숙명적인 결정이 도착을 연기시켰고 대신에 함대를 사용해서 이민자들을 이주시키기로 하였다. 황제와 평의회는 원래 주민들이 자신들의 도시들을 완벽히 포기했기 때문에 군대의 보급을 함대에 무조건 의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물자 수송 경로에 있는 이네슬레아[2]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의회는 9, 17군단이 반란을 제압하고 물자수송 경로를 안정화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의 이민자들과 그들의 물품이 9월 중반에 들어서자 셉티미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들은 병사들이 작업해 두었던 봄의 작물 수확을 위한 일을 인계받았다. 이때 상당수의 기마대도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2개의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공격은 크게 줄어줄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이치의 사령관가 이오니스에 도착해서 평화 협정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원정군은 조용한 겨울이 되기를 바라며 식민지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의회는 황제가 군대가 밖에 있는 동안 발생한 수많은 제국 내부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탐리엘로 함선을 거느리고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아카비르에 남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정내렸다. 이것은 운이 따른 결정이었는데, 제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커다란 함선이 본국 귀환 도중 초겨울의 폭풍을 만나 파괴된 것이었다. 288년과 289년의 겨울 폭풍은 보급을 위하여 아카비르로 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이곳에 남자고 전투마법사가 제안하였고 황제는 그것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원정군은 가지고 있는 물자로 봄까지 버텨야만 했다.
제3장: 원정군의 궤멸
아카비르에서의 겨울 날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공급 문제와 수천명의 시민의 증가 때문에, 원정군의 물자는 매우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세이치들은 침략자들의 두 도시 외곽에서 병사들을 자주 습격하곤 했다.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의 여러 감시 초소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동안에 적들에게 점령되었으며, 나머지 초소들도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그 결과 두 도시 사이의 연락이 전부 마법으로 행해졌으며 이것은 전투마법사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2월 5일, 세이치 왕이 보냈다는 측근들이 정전을 제안하기 위해 이오니스에 도착했다. 그날 밤, 그 비겁한 사신들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시 문 하나의 경비병을 살해한 뒤, 마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들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들의 목적은 황제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궁을 지키고 있던 제 10 부대가 용맹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일단 경보가 울려지자 도시 안에 있던 세이치 인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이치와 황제간의 화평협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봄이 오자 더욱 큰 문제가 생겨났다. 고대하고 있던 봄비 대신에, 여름까지 계속된 뜨겁고 마른 바람이 동쪽으로부터 불어올 뿐이였다. 농사는 실패했고, 심지어 작년에는 작은 보트로 상류로 나갈 수 있던 강조차 완벽히 말라버렸다. 이러한 악천후가 아카비르 특유의 것인가 또는 세이치 측의 마법에 의한 조작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우리 조사위원회는 전자의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이치 측에 그런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장기간의 악천후 때문에 , 공급선이 검은 항구를 출항하는게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5월이 오자 출발했으나 - 다시 폭풍우에 습격당해 8주 후 셉티미아에 도착했을 때 많은 함대가 손실되었다. 계속되는 절망적인 보급 상황에, 황제는 전투마법사 부대 대부분을 폭풍우를 완화시키고 날씨를 조종하기 위해서 함대로 보냈다. 그 때 원로회는 원정을 포기하고 황제가 원정군을 이끌고 탐리엘로 돌아오라고 주장했으나, 황제는 이젠 4개의 군단을 한번에 태울 함대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우리도 아카비르에 군단을 남기고 함대가 돌아오길 기다리게 하는 것이 군대의 사기를 낮추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조사위원회는 한 두 부대를 희생하여 원정부대 전체를 잃지않고 끝날 수 있다면 그 결정도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것이 명백한 재앙을 바꿀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은 우리 위원회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러한 결정이 증원부대와 수송대 함대에 전해지고 난 후에, 원정대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나타난 것이다.
이 시점부터는, 아카비르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함대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탐리엘과 원정군과의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비르의 상황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그곳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군단이 필요로 하는 곳에 자신의 힘을 전부 쏟아부어야만 했다. 또한 세이치 왕국은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마법사들을 방해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카비르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약해졌다고 보고했고, 시로딜에 있는 마법 대학에서 원로의원회와 아카비르 사이의 교신을 하던 마법사들은 아카비르에 있는 마법사들과 연락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장기간 훈련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도 같은 현상이 보고되었다. 본 위원회는 아카비르와의 미래의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세이치 왕국의 수수께끼의 마력에 관하여 마법 대학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황제는 7월 중반에 도시에 소수의 수비대를 두고 이오니스를 출발해서 진군을 시작했다. 황제는 세이치의 군대가 북쪽 산맥 너머에 모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으며, 그들의 전력이 갖추어지기 전에 그곳을 공격함과 동시에 그들의 물자를 약탈하려던 계획이었다. 물자의 부족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갑작스런 진군은 세이치 측을 동요시켰다. 원정군은 산을 넘어 적군 주둔지로 들어가 그들을 무찔렀고, 지휘관(귀족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붙잡았다. 그러나 황제는 곧 후퇴를 명령했고, 원정군은 이오니스로 후퇴하는 도중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황제는 이오니스로 돌아왔지만, 세이치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셉티미아의 병력과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때 소수의 전투마법사들은 군인들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마법 대학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기술인 물을 만드는데 모든 힘을 다 하고 있었다. 함대는 전투마법사들 덕분에 안전하게 검은 항구로 귀환했지만, 289년 내내 에스로니엣에 불어닥친 폭풍 때문에 아카비르로 되돌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원로회와 황제와의 교신은 10월 초가 마지막이었다. 12월이 되자 아카비르에서의 상황을 매우 위험하게 보고 함대에게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아카비르에 갈것을 명했다. 계속된 폭풍에도 불구하고, 함대는 그럭저럭 아카비르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오니스에서 황제군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보고를 황제군의 전투마법사로부터 들었을 때 희망이 솟아올랐다. 원정군이 이오니스를 탈출해서 셉티미아로 후퇴하여 함대와 합류하기 위한 계획은 굉장히 빠르게 세워졌다. 이것이 원정군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함대가 셉티미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비대는 세이치 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함대의 전투마법사들은 생존자들이 배에 타기까지 시간을 벌기위해 적들을 후퇴시켰다.
셉티미아에 도착한 몇 안되는 원정군 생존자에 따르면 2일전 황제는 이오니스를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셉티미아로 가던 도중에 압도적인 군세에 포위되었다는 것이었다. 황제와 제 10군단의 영웅적인 마지막 전투로 인해 14군단의 생존자가 셉티미아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10군단의 생존자 2명이 셉티미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적진이 승리에 취해있는 동안 운 좋게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황제의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황제는 10군단의 방어진을 구축하던 도중 적의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었다.
제4장: 결론
우리 조사위원회는 아카비르 침공이 시작될 때부터 이 원정이 여러가지 예측할 수 없는 요인때문에 불운하게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장기간의 정보수집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아카비르에서의 상황에 대하여 완벽한 준비가 갖춰져있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날씨는 육군과 해군의 능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만약 원정에 극동함대의 대부분이 손실되지 않았다면 원정군은 289년 안에 퇴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악천후에 의해 전투마법사 대부분이 함대의 지원에 투입되어 그 이후의 전투에서는 전투마법사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289년 이오니스를 덮친 가뭄은 음식의 현지 조달을 불가능하게 하고 군대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세이치 측의 전력도 사전에 조사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주요 전투는 황제와 의회의 교신이 끊어진 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세이치 측에서 얼마만큼의 병력을 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군 4 부대를 퇴각시키고 몇개월 동안 포위했던 점을 보면 아마 원정군보다 몇배는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위원회는 아카비르 원정 계획 자체는 비판하지 않고 있다. 당시 수집한 정보들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재 새로이 알려진 정보를 더하여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위원회는 이 참사에서 배워야할 점이 몇가지 있다고 믿는다.
우선 첫 번째로는, 세이치 측의 강력한 미지의 힘이다. 그들이 광범위하게 날씨를 조종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사실 3명의 위원은 이 사실을 보고서에 넣는데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건이 조사가치가 있다는 것이 위원회 전체의 견해이다. 잠재적 위험이 있는 이상,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로 세이치 왕국은 해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발견이다. 원정군은 해상에서 공격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극동 함대가 싸운상대는 오직 날씨뿐이었다. 사실, 초기의 계획은 함대의 일부를 해안에서 사용하기 위해 아카비르에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셉티미아의 북쪽과 남쪽에 펼쳐진 암초 모래톱 때문에 대형함대가 상륙할 수 있는 지점은 거의 없었다. 또한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에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얕은 연안을 탐험할 작은 배를 현지에서 건조하지 못했다. 미래의 아카비르 원정에서는 아카비르에 대한 해군력의 우위 (불행히 원정군들은 이것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를 이용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해군의 연안 임무를 가능하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앞으로의 아카비르 원정에 착수하려면 더 장기간의 아카비르에 대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 지난 원정에서는 4년간의 조사를 했는데, 이것은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날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세이치 군은 정보보다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에 황제와 세이치 측과의 평화 협상은 말 그대로 시간 낭비였다. 아카비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질적인 땅이다. 미래의 아카비르 침공계획은 그곳의 자연, 정치, 사람에 대한 철저한 사전연구 없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정보를 고려하면 아카비르를 침공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이 본위원회의 일치된 의견이다. 적어도 현재 단계에서는 말이다. 우리의 영토에서는 아직 제국의 군대들을 필요로 한다. 언젠가는, 통일된 평화로운 제국은 다시 아카비르로 가서 이오니스의 참극과 황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의 일도 아닌 매우 먼 훗날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오니스의 참극에 대한 제국조사위원회의 보고서
위원회 의장, Lord Pottreid
제1장: 준비
황제가 아카비르를 침공하고자 한 계획은 탐리엘과 아카비르 사이에 있는 작은 섬 왕국들 정복이 시작된 27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282년 에스로니엣[1]에 있는 검은 항구의 함락으로 유리엘 5세는 궁극적인 목표를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즉시 그 항구의 개조를 명령했는데. 왜나하면 그 항구는 침략전쟁의 주요한 거점이였으며, 중요한 자원 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황제는 또한 많은 수송선 건조를 지시했는데 해군 함선만으로는 아카비르를 횡단하기에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의 원정계획은 그저 단순한 변덕이 아닌 에스로니엣 정복이 끝나기 전부터 세심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에스로니엣의 군주 바쇼몬(Bashomon)이 제국에 284년에 항복한 후 황제의 모든 관심은 아카비르로 쏠리게 되었다. 285년과 286년에는 해군을 보내서 아카비르의 해상과 해안지역을 조사하도록 명하고 제국의 다양한 지식인들을 모아 정보를 모으도록 하였다. 이 모든 정보를 모아서, 아카비르의 남서쪽에 있는 세이치 왕국이 첫 번째 목표물로 정해졌다.
그러는 사이, 황제는 원정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원정을 위하여 극동함대로 불리는 새로운 함대를 만들었다. 그 위용은 다른 해군함들을 작아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그 함대는 탐리엘 역사상 가장 강한 함대였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각각 5, 7, 10, 14군단이 맨처음 상륙 부대로 정해졌고, 9, 17군단은 증원부대로 참가하기로 정해졌다. 이 상륙작전은 군 전체에 비해 소규모로 보이지만 대규모 부대의 장기 보급을 고려한 작전이었으며. 게다가 황제와 그 사령관들은 적어도 맨 처음에는 그다지 저항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군이 한번에 오직 4개의 군단만 수송가능했다는 점에 있었다.
우리 조사단은 황제의 침략준비에 대한 어떠한 결점도 찾을 수 없었다고 적을 수밖에 없다. 침략이전에 사용된 정보를 기초로 하여 우리는 황제가 무모하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일부사람들은 원정군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는 주장을 하지만 반대로, 더 많은 부대를 수송하고 물자를 보급했다면 (제국 전체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단지 재앙의 규모를 늘릴 뿐이다. 즉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또한 제국의 다른 영토에서 군단을 빼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찬탈자 캐모런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황제는 탐리엘 밖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은 제국의 방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믿었다. (우리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만약에 원정군의 규모가 너무 컸더라면, 2개의 신설된 부대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의 손실은 제국에게 지방수비에 대한 취약점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아카비르 침략이 현재 제국의 힘을 넘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비록 황제가 아카비르에서의 땅을 넓히고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해도, 제국은 아마 그 뒤에서 붕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제2장: 아카비르 왕국
원정군은 검은 항구(Black Harbor)를 288년 4월 23일에 떠났다. 그리고 6주일 후 맑은 날씨에 아카비르의 해안에 상륙했다. 상륙지점은 큰 강의 입구에 있는 작은 세이치 왕국의 항구였는데 탐리엘과 가깝고 비옥한 지대여서 군대의 보급 또한 원활하기 때문이었다. 세이치 왕국은 원정군이 오는 것을 보고 그 마을을 포기했으며 원정군은 그곳을 차지한 후에 셉티미아(Septimia)라고 명명했다. 제국의 아카비르 최초 식민지였던 것이다. 황제는 새로운 식민지를 증축하고 극동 함대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항구를 넓히는 한편 자신은 2개의 군단을 이끌고 내륙으로 진격했다. 군대는 저항없이 이오니스로 알려진 다음 도시를 점령했으며, 황제는 그곳에 원정군의 사령부를 세웠는데, 셉티미아 보다 더 컸으며 주변지역을 지배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정군은 아직 적의 정찰대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실질적인 저항도 만나지 못했다. 비록 적의 정찰대가 계속 미행을 하여 규모가 큰 수색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대열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원정군이 부족한 병종은 기마대였는데, 함대의 수송 가능한 공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투마법사의 마법으로 정찰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황제는 세이치 왕 또는 이 땅을 다스리는 누군가와 접촉하기 위해서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노력은 군대를 이오니스에 정체시키고 분명히 침략에 정신을 못차렸을 적들을 다시 견고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황제는 세이치 왕국은 이미 자신의 힘에 놀라서 싸움을 할 필요조차 없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4개의 군단은 강을 따라 파수대를 설치하면서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의 길을 바쁘게 만들고 있었다. 기병의 부족 때문에 탐색활동은 제한되었고, 두 도시 사이의 교신은 수시로 아군이 붙잡지 못한 적들에게 위협받았다.
원래의 계획은 거점을 확보하는 대로 2개의 증원부대를 투입하는 것이었으나 숙명적인 결정이 도착을 연기시켰고 대신에 함대를 사용해서 이민자들을 이주시키기로 하였다. 황제와 평의회는 원래 주민들이 자신들의 도시들을 완벽히 포기했기 때문에 군대의 보급을 함대에 무조건 의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물자 수송 경로에 있는 이네슬레아[2]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의회는 9, 17군단이 반란을 제압하고 물자수송 경로를 안정화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의 이민자들과 그들의 물품이 9월 중반에 들어서자 셉티미아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들은 병사들이 작업해 두었던 봄의 작물 수확을 위한 일을 인계받았다. 이때 상당수의 기마대도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2개의 제국의 식민지에 대한 공격은 크게 줄어줄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이치의 사령관가 이오니스에 도착해서 평화 협정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원정군은 조용한 겨울이 되기를 바라며 식민지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의회는 황제가 군대가 밖에 있는 동안 발생한 수많은 제국 내부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탐리엘로 함선을 거느리고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아카비르에 남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정내렸다. 이것은 운이 따른 결정이었는데, 제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커다란 함선이 본국 귀환 도중 초겨울의 폭풍을 만나 파괴된 것이었다. 288년과 289년의 겨울 폭풍은 보급을 위하여 아카비르로 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이곳에 남자고 전투마법사가 제안하였고 황제는 그것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원정군은 가지고 있는 물자로 봄까지 버텨야만 했다.
제3장: 원정군의 궤멸
아카비르에서의 겨울 날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공급 문제와 수천명의 시민의 증가 때문에, 원정군의 물자는 매우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세이치들은 침략자들의 두 도시 외곽에서 병사들을 자주 습격하곤 했다.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의 여러 감시 초소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동안에 적들에게 점령되었으며, 나머지 초소들도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그 결과 두 도시 사이의 연락이 전부 마법으로 행해졌으며 이것은 전투마법사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2월 5일, 세이치 왕이 보냈다는 측근들이 정전을 제안하기 위해 이오니스에 도착했다. 그날 밤, 그 비겁한 사신들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시 문 하나의 경비병을 살해한 뒤, 마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들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들의 목적은 황제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궁을 지키고 있던 제 10 부대가 용맹하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다. 일단 경보가 울려지자 도시 안에 있던 세이치 인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이치와 황제간의 화평협상이 완전히 끝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봄이 오자 더욱 큰 문제가 생겨났다. 고대하고 있던 봄비 대신에, 여름까지 계속된 뜨겁고 마른 바람이 동쪽으로부터 불어올 뿐이였다. 농사는 실패했고, 심지어 작년에는 작은 보트로 상류로 나갈 수 있던 강조차 완벽히 말라버렸다. 이러한 악천후가 아카비르 특유의 것인가 또는 세이치 측의 마법에 의한 조작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우리 조사위원회는 전자의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이치 측에 그런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장기간의 악천후 때문에 , 공급선이 검은 항구를 출항하는게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5월이 오자 출발했으나 - 다시 폭풍우에 습격당해 8주 후 셉티미아에 도착했을 때 많은 함대가 손실되었다. 계속되는 절망적인 보급 상황에, 황제는 전투마법사 부대 대부분을 폭풍우를 완화시키고 날씨를 조종하기 위해서 함대로 보냈다. 그 때 원로회는 원정을 포기하고 황제가 원정군을 이끌고 탐리엘로 돌아오라고 주장했으나, 황제는 이젠 4개의 군단을 한번에 태울 함대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우리도 아카비르에 군단을 남기고 함대가 돌아오길 기다리게 하는 것이 군대의 사기를 낮추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조사위원회는 한 두 부대를 희생하여 원정부대 전체를 잃지않고 끝날 수 있다면 그 결정도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것이 명백한 재앙을 바꿀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은 우리 위원회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러한 결정이 증원부대와 수송대 함대에 전해지고 난 후에, 원정대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나타난 것이다.
이 시점부터는, 아카비르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함대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탐리엘과 원정군과의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비르의 상황이 점점 악화됨에 따라, 그곳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군단이 필요로 하는 곳에 자신의 힘을 전부 쏟아부어야만 했다. 또한 세이치 왕국은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마법사들을 방해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아카비르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약해졌다고 보고했고, 시로딜에 있는 마법 대학에서 원로의원회와 아카비르 사이의 교신을 하던 마법사들은 아카비르에 있는 마법사들과 연락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장기간 훈련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도 같은 현상이 보고되었다. 본 위원회는 아카비르와의 미래의 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세이치 왕국의 수수께끼의 마력에 관하여 마법 대학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황제는 7월 중반에 도시에 소수의 수비대를 두고 이오니스를 출발해서 진군을 시작했다. 황제는 세이치의 군대가 북쪽 산맥 너머에 모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으며, 그들의 전력이 갖추어지기 전에 그곳을 공격함과 동시에 그들의 물자를 약탈하려던 계획이었다. 물자의 부족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갑작스런 진군은 세이치 측을 동요시켰다. 원정군은 산을 넘어 적군 주둔지로 들어가 그들을 무찔렀고, 지휘관(귀족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붙잡았다. 그러나 황제는 곧 후퇴를 명령했고, 원정군은 이오니스로 후퇴하는 도중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황제는 이오니스로 돌아왔지만, 세이치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셉티미아의 병력과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때 소수의 전투마법사들은 군인들의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마법 대학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기술인 물을 만드는데 모든 힘을 다 하고 있었다. 함대는 전투마법사들 덕분에 안전하게 검은 항구로 귀환했지만, 289년 내내 에스로니엣에 불어닥친 폭풍 때문에 아카비르로 되돌아가려는 모든 시도는 전부 허사로 돌아갔다.
원로회와 황제와의 교신은 10월 초가 마지막이었다. 12월이 되자 아카비르에서의 상황을 매우 위험하게 보고 함대에게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아카비르에 갈것을 명했다. 계속된 폭풍에도 불구하고, 함대는 그럭저럭 아카비르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오니스에서 황제군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보고를 황제군의 전투마법사로부터 들었을 때 희망이 솟아올랐다. 원정군이 이오니스를 탈출해서 셉티미아로 후퇴하여 함대와 합류하기 위한 계획은 굉장히 빠르게 세워졌다. 이것이 원정군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함대가 셉티미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비대는 세이치 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함대의 전투마법사들은 생존자들이 배에 타기까지 시간을 벌기위해 적들을 후퇴시켰다.
셉티미아에 도착한 몇 안되는 원정군 생존자에 따르면 2일전 황제는 이오니스를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셉티미아로 가던 도중에 압도적인 군세에 포위되었다는 것이었다. 황제와 제 10군단의 영웅적인 마지막 전투로 인해 14군단의 생존자가 셉티미아로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10군단의 생존자 2명이 셉티미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적진이 승리에 취해있는 동안 운 좋게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황제의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황제는 10군단의 방어진을 구축하던 도중 적의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었다.
제4장: 결론
우리 조사위원회는 아카비르 침공이 시작될 때부터 이 원정이 여러가지 예측할 수 없는 요인때문에 불운하게 운명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장기간의 정보수집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아카비르에서의 상황에 대하여 완벽한 준비가 갖춰져있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날씨는 육군과 해군의 능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만약 원정에 극동함대의 대부분이 손실되지 않았다면 원정군은 289년 안에 퇴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악천후에 의해 전투마법사 대부분이 함대의 지원에 투입되어 그 이후의 전투에서는 전투마법사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289년 이오니스를 덮친 가뭄은 음식의 현지 조달을 불가능하게 하고 군대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세이치 측의 전력도 사전에 조사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주요 전투는 황제와 의회의 교신이 끊어진 후에 일어났기 때문에 세이치 측에서 얼마만큼의 병력을 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군 4 부대를 퇴각시키고 몇개월 동안 포위했던 점을 보면 아마 원정군보다 몇배는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위원회는 아카비르 원정 계획 자체는 비판하지 않고 있다. 당시 수집한 정보들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재 새로이 알려진 정보를 더하여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위원회는 이 참사에서 배워야할 점이 몇가지 있다고 믿는다.
우선 첫 번째로는, 세이치 측의 강력한 미지의 힘이다. 그들이 광범위하게 날씨를 조종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사실 3명의 위원은 이 사실을 보고서에 넣는데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 건이 조사가치가 있다는 것이 위원회 전체의 견해이다. 잠재적 위험이 있는 이상,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로 세이치 왕국은 해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발견이다. 원정군은 해상에서 공격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극동 함대가 싸운상대는 오직 날씨뿐이었다. 사실, 초기의 계획은 함대의 일부를 해안에서 사용하기 위해 아카비르에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셉티미아의 북쪽과 남쪽에 펼쳐진 암초 모래톱 때문에 대형함대가 상륙할 수 있는 지점은 거의 없었다. 또한 셉티미아와 이오니스 사이에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얕은 연안을 탐험할 작은 배를 현지에서 건조하지 못했다. 미래의 아카비르 원정에서는 아카비르에 대한 해군력의 우위 (불행히 원정군들은 이것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를 이용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해군의 연안 임무를 가능하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앞으로의 아카비르 원정에 착수하려면 더 장기간의 아카비르에 대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 지난 원정에서는 4년간의 조사를 했는데, 이것은 불충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날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세이치 군은 정보보다 훨씬 더 강력했기 때문에 황제와 세이치 측과의 평화 협상은 말 그대로 시간 낭비였다. 아카비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질적인 땅이다. 미래의 아카비르 침공계획은 그곳의 자연, 정치, 사람에 대한 철저한 사전연구 없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정보를 고려하면 아카비르를 침공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것이 본위원회의 일치된 의견이다. 적어도 현재 단계에서는 말이다. 우리의 영토에서는 아직 제국의 군대들을 필요로 한다. 언젠가는, 통일된 평화로운 제국은 다시 아카비르로 가서 이오니스의 참극과 황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의 일도 아닌 매우 먼 훗날의 이야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