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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문관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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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普通文官試驗

1918년부터 1948년까지 일본 제국에서 시행된 하급관료 채용시험이다. 보통시험령에 근거해 시행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보통시험'이다.[1]

고등관을 채용하는 고등문관시험과는 별도로, 현장에서 실무를 수행하고 고등관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뽑는 시험을 말한다. 현재로 치자면 9급 공무원 채용 시험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고등문관시험과는 달리 학력 제한이 없었다.

현재 한국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기원으로, 해방 후 보통문관시험에서 보통고시로 바뀌었고, 이후 현재의 7, 9급 공채로 이어진다.

2. 상세

일제시대 공무원의 계급은 고등관과 판임관으로 나뉘는데 그중 고등관은 친임관[2]-고등관1~2등(칙임관)[3]-고등관3~9등(주임관)[4]으로 세분화된다.[5] 그리고 보통문관시험을 통과하면 각 관청의 장의 이름으로 임명장을 받아 임용되는 판임관(判任官)이 된다.[6] 판임관은 급이 낮아도 '관(官)' 이라는 칭호가 붙는 어엿한 정식 공무원이었으므로 최소한 자신의 출신 마을이나 읍/군/부 단위 안에서는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고 그런만큼 경쟁률 역시 치열했다.

보통문관시험은 원론적으로 현대처럼 매년마다 일정 관원을 뽑는 공채가 아닌, 관청 단위에서 결원을 보충하는 특채 시험과도 같았지만 실제로는 해방 직전까지 거의 매년마다 시행되었다. 그리고 도쿄에서만 시험이 시행되는 고등문관시험과는 달리 보통문관시험은 최소 도 단위에서 시험을 시행하여 일반인에게 접근성이 좋았으므로 조선인들이 많이 응시하였고, 합격률 역시 일제 후기에 들면서 조선인의 비율이 일본인을 상회하게 되었다.

고등문관시험과 마찬가지로 보통문관시험 역시 관리 임용 시험이 아닌 임용될 자격을 부여받는 사람을 선발하는 개념이었으므로 시험 합격이 임용을 100%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급이긴 해도 정식 공무원이었으므로 범죄이력 조회나 사상 검증, 가계 조회 등을 거쳤다. 독립운동가사회주의자, 전과자는 물론 그 직계 가족들은 시험에 합격해도 임용되지 못했다.

상술하였듯이 학력 제한은 없었다지만 실제로는 모든 시험이 그랬듯이 응시생의 절대다수가 학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보통학교 졸업 정도에서 많이 응시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취업난으로 중학교나 전문학교 졸업 이상의 응시생들도 꽤나 생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원과 용인, 말단 순사 출신으로써 승진에 한계를 느끼고 정식 공무원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많이 응시했다. 연령에도 제한을 두지 않아서 간혹가다가 15~16세의 어린 나이에도 합격자가 나왔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임용되는 시기는 상황과 개인별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고, 길게는 5년 정도가 지나서야 임용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고등문관시험의 하위 개념이고 수험생들의 학력 또한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별로 어려운 시험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험 문제는 모두 주관식이었고 일본어로 서술해야 했으며 시험과목 역시 국어(일본어), 작문, 산술(수학), 지리(일본지리), 역사(일본사), 행정법, 민법, 형법이 필수과목이었고 선택과목은 경제학,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영어 중 택1으로 총 9개의 과목을 응시했으며 구술시험 역시 존재하여 행정법/경제학/세법/시대여론 등과 관련된 질문을 상식에 맞게 구술하여야 했으므로 보통문관시험도 상당한 난이도를 가진 시험이었다. 합격자에는 '주사' 라는 칭호가 붙었으며 관보에도 게시되었다.

당시 출제되었던 문제들 중 작문 과목은 아래와 같다.
후기에 들어서는 일본이 중일전쟁/태평양전쟁 개시, 대동아공영권의 확대 등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보통문관시험 역시 공무원으로써의 객관적인 지식/상식을 측정하는 것보다 천황에 충성하며 국가를 수호하는 황국신민으로써의 척도를 측정하는 성격이 강해졌다.

조선인 합격자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으나[7] 1920~1939년까지 406명의 조선인 합격자가 배출되었다.[8] 현재에도 지역 곳곳마다 할아버지가 일제 시절 보통문관시험 출신이었다는 것을 뜨문뜨문 발견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도 학교 졸업 후인 1940년~1945년 사이에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로서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력이 있었다는 썰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1] 고등문관시험도 공식 명칭은 '고등시험'이다.[2] 천황이 친히 임명하는 관직[3] 천황이 칙명을 내려 총리가 임명하는 관직[4] 총리나 총독이 천황에게 상주하여 임명을 허락받는 관직으로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하면 주임관으로 시작하게 된다.[5] 고등관2등부터는 '각하'라는 호칭이 붙었다.[6] 그 외 최말단 공무직 정도의 비정규직인 고원과 용인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공무원이 아닌 관청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로 분류되었다.[7] 창씨개명의 영향으로 1940년대 이후에는 조선인 합격자를 정확하게 구분해낼 수 없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시험에 응시를 할 수 없었고, 조사할 수 있는 근거자료가 해방과 분단, 전쟁 등을 거쳐 많이 소실되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관보에 남아있는 이름과 기타 극소수 정도만 있다.[8] 물론 당시의 조선인 판임관이 406명 뿐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판임관 임용은 보통문관시험 합격 말고도 특별채용이라는 명분으로 내부승진, 경력채용, 인맥 등 여러 방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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