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巡査
じゅんさ(junsa)
일본 경찰 계급의 최말단 계급으로 대한민국 경찰청의 순경에 상응하는 계급이다.
현재도 쓰이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일본의 미디어에 간혹 '순사'라는 계급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경찰관을 '경찰 아저씨'라고 호칭하듯 일본에서는 오마와리상(お巡りさん)이라고 호칭한다. 오마와리상은 순사 또는 제복 차림의 경찰관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일반인이 경찰관의 계급을 인지하고 호칭하지 않으므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경찰 아저씨'로 할 수 있으나, 보통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관이 순사(순경)인 경우가 많으므로 '순경 아저씨'로 번역할 수도 있겠다. 참고로 오마와리상에서 마와리는 순회하다, 돌아다니다라는 뜻이다.
일본 경찰 조직이 생긴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라소츠(邏卒(らそつ):순라의 병졸의 약(巡邏の兵卒”の略)라고 블렀다. 조선에서도 '나졸'이라고 해서 관아에 딸린 군졸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의 patrol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존재하지 않아서, 순라사찰 (「巡邏査察」(じゅんらささつ))이라는 단어를 조합해내고 그 줄임말인 순사(巡査)가 되었다. 일반적인 경찰 업무의 하나인 순회하면서 사찰하는 기능을 강조하는 단어였다.
메이지 초기에는 지금처럼 계급이 다양하게 나눠지기 전에는 순사 계급은 1등 순사에서 4등 순사까지 4단계 등급이 있었고, 1등 순사는 현재의 경부보에 해당했다.
1.1. 대한민국에서의 용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 경찰들을 통틀어 일컫던 단어로 조선에서는 일경, 왜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순사라는 말 자체는 정확히는 일본의 경찰계급 중 최하위로, 우리나라의 경찰공무원 계급들 중에서 경찰의 시작인 순경에 해당하는 단어이다.무단통치 시기 일본 육군 헌병경찰이 있었다. 이들이 입던 육군 헌병 군복은 일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부정적 인상으로 뿌리 박히기도 했고,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대신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내세운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일반 경찰을 한반도 치안 유지에 투입했다.
당연히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헌병 못지 않은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말이 헌병에서 순사로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인들에 대한 대우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이 바로 "호랑이가 물어간다!", "왜놈 순사 온다!!" 등으로 달래는 것이었다. 순사가 잡으러 온다, 저기 순사 온다, 울면 순사가 꽉 잡아간다, 순사가 총 메고 온다 등의 바리에이션들이 있다. 심지어 일본 순사의 이름을 적은 부적도 있었다.
문화통치를 시작한 일제는 원망의 대상인 헌병경찰제를 끝내고 일반경찰제를 시행한다고 선언했는데, 그러자면 기존 경찰 인력 외에 6,800명을 증원해야 했다. 일본 육군 헌병에서 약 2천 명을 전역과 동시에 순사로 임용토록 하는 형식으로 이관받고 일본 본토(소위 '내지')에서 1,500명을 차출하고 3천 명 이상을 신규로 뽑았는데, 인적 자원 수준은 다음과 같았다.
- 헌병 출신자의 신분 전환: 그나마 인적 자원의 질은 높은 편이었으나, 아무래도 군인 출신이라 조선인들의 거부감이 높은 것은 여전했다.
- 본토(내지) 전속인원: 본토 각 현경 당국이 쓰레기들을 날려버리는 기회로 활용했다.
- 신규 채용자: 당시 경기가 호황이라 양질의 자원은 경찰 따위에 지원하지 않았다.
이런 자원으로 경찰 정원을 채웠으니 간부도 아닌 일선 순사들의 질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물론 내지인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외지인 조선인들[1] 가운데에서도 순사직(당연히 최하 계급인 순사보부터 시작)을 모집 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다. 1935년에는 경쟁률이 무려 19.6대 1이나 되었을 정도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권력도 있고 철밥통인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단순히 걍 경찰이 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한 사람도 많았다. # 순사 시험 인기는 오늘날 공시족의 그것 못지않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충청북도에서는 30명을 채용하는 순사 시험에 500여 명이 지원하기도 했고, 전라남도에서는 35명을 채용하는 순사시험에 477명이 지원하기도 했다. 순사 시험에 합격하면 동네잔치가 열렸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고 한다.#
이건 비단 순사만이 아니라 우리로 치면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하급 공무원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시골 동네에선 순사보나 면서기보에 누가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집에 동네 사람들이 돌 던지러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네 사람 다 모아놓고 큰 잔치를 벌이는 풍경이 더 흔했다. 1938년 조선인의 육군 병사로의 지원 입대가 허용되자 경쟁률이 엄청났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 소작농의 소작권이 소멸하고 지주와 소작농 관계가 법적인 계약관계로 전환되면서 많은 소작농들의 권리가 약화되었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당장 먹고 살 돈도 없고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조선인들이 기본적인 밑천이 필요한 장사로 곧바로 대박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순사나 하급 공무원에 지원했던 것이다. 특히 순사의 경우엔 당시 경찰 임용에는 학력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저학력자들도 많이 응시했다. 이 때문에 반민특위 등에서 친일파를 잡아낼 때 끌려온 사람들이 하는 대표적인 변명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그 예로 각시탈의 작가 허영만의 부친도 일제시대 때 순사였는데, 송덕비까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었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랬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당대 일본은 조선, 일본 할 것 없이 빈곤 농민을 착취하여 국가를 돌리는 기형적인 체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에선 부모가 직접 어린 딸을 인신매매하는 경우도 있었고, 기아 문제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조선처럼 춘궁기에 굶어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일제 말엽에 가면 일본에서도 경찰이나 군인이 되어서 어떻게든 먹고 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에 순응해서 순사나 군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구지책인 경우가 많았던 셈이다. 그러니 당대 순사의 지원율이 높았던 건 일제가 조선인을 우대했다기보단 오히려 악랄하게 착취한 반동이었던 셈이다. #
일본군은 그 경직성으로 인해 몇몇 부대에서의 쏘가리 따돌리기 같은 하극상은 있었지만 그런 걸 제외하면 계급을 철저히 따지는 편이었고, 이는 계급이 높으면 특히 사병들은 일등병 이상으로의 진급도 100% 시험을 통과해야 할 수 있었던 제도 특성상 계급=능력으로 간주되어 후임병이라도 진급하는 순간 어제의 선임을 밟아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근데 이것도 부대마다 케바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원래 상위 계급자나 같은 계급에 있는 선임들을 제치고 먼저 상병장으로 진급해도 짬이 딸리면 여전히 진급 이전처럼 이들에게 당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소리. 이런 경우는 주로 먼저 입대했으나 상병/병장 진급에 실패한 고참 일병/상병이 계급은 상병/병장이으로 자기보다 높지만 입대일은 늦은 사람에게 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내지인이건 조선인이건 별 상관이 없었기에,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 출신 상급병이나 하사관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얻어터지며 가혹행위에 시달리던 내지 출신 사병들의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설령 그 조선인 선임보다 상급자인 내지인이 있어도 "조센징보다 못나서 진급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라며 되려 조선인 선임 편을 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만일 일본인 후임들이 내부의 조선인 선임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등의 하극상을 저지르는 걸 묵인해버리면 이들이 선임 계급을 우습게 볼 가능성을 준다. 또 이로 인해 조선인들이 반발을 시작할 경우에는 일본인 선임병과 간부 본인들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투, 임무, 작전 도중에 조선인 선임들의 정당한 명령을 일본군 후임들이 거부하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엔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까지 올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인의 일본군 입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30년대 후반에는 내선일체 정책에 맞춰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짬과 계급이 높아도 조선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인 후임들에게 무시당하는 걸 묵인하면 자기들이 내세우는 정책과 정면으로 반하는 멍청한 짓을 스스로 사서 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이는 내선일체를 통해 조선인을 자기들의 전쟁에 동원시키려는 일본군 상부의 의도를 깨뜨릴 수 있었다.
고참이 되어도 일본인 후임들에게 여전히 무시당하고 가혹행위를 당한다고 조선인 군인들이 떠벌리고 다니면 일본군에 자원입대할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인이 가질 수 있는 공직들만 해도 교사, 순사, 면서기, 철도공무원 등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므로 본인의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일본군에 입대하는 대신 다른 직종들에 지원해서 합격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조선인은 군필자가 아니어도 공무원이 되는 게 가능했다.
조선인은 육군 하사에 해당하는 오장 계급까지만 진급해도, 매일 밤 내무반에서 내지인들을 족치며 실컷 화풀이를 할 수 있는데다, 당시 일본 제국은 군국주의 국가여서 군의 위상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높았다. 때문에 휴가라도 나오면 그간 자기를 괴롭히던 동네 일본인 주재소장[2]의 싸대기를 때려도 그 주재소장도 아무 말도 못 했을 정도였다. 많이 알려진 헌병 오장으로는 독립운동가들이 자신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삽화의 가해자로 알려진 시게미쯔 구니오, 즉 신상묵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민주당 최고 위원이던 신기남 의원의 부친이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일본군의 위상이 높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일제강점기의 공무원 신분 체계에 있다. 위에서 예시로 든 주재소장은 보통 순사부장(한국 경찰의 경사에 대응) 내지는 경부보(한국 경찰의 경위에 대응)가 맡았다.
순사부장은 고원으로, 일본에서 판임관 미만의 무관 등 공무원들 중 상위 계급에 있는 이들이며, 대개 한국의 8~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최하위직 공무원이다. 또 과거 일본군과 현대 한국군의 상병장, 전투경찰의 상경과 수경, 의무경찰의 고참급 대원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경부보는 판임관으로, 일본의 공무원들 중 천황의 개입 없이 오로지 일본 총리의 판단만으로 임명하는 이들이다. 현대 한국의 6~7급 공무원에 해당되는 하위직 공무원이다.
문제는 일본군의 하사관들도 판임관 신분이었고, 이는 일본군 하사관들이 주재소장을 본인들과 동급 내지 이하로 본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한일 군대(자위대)와 경찰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 한국 경찰의 경위와 경사, 일본 경찰의 경부보와 순사부장은 한국군의 부사관과 자위대의 (육해공) 조급 대원보다 직급 서열이 높으며, 짬도 대개 경찰 쪽의 우위이다.
따라서 일개 하사급 군인이 일제 때 마냥 파출소(주재소)장의 뺨을 갈기는 짓거리를 저질렀다간 군에서 퇴출당하는 건 둘째치고 상관폭행죄에 걸려서 일반적인 폭행보다도 더 크게 처벌받는다.
일제강점기 매체의 필수요소로 나올 때는 보통 악역으로 설정되며, 찌질하고 야비하며 무고한 사람을 패거나 고문하는 역으로 나온다. 자주 붙는 이름은 나카무라.
이외수 작가의 '사부님싸부님'에서도 '일본 순사 올챙이'가 나온다. 주인공인 하얀 올챙이에게 병먹금 당한 다음 털린다.
간혹 도시와 멀리 떨어진 시골 같은 곳에선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신 아주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순경을 '순사'라고 말하기도 하며, 경찰로 재직 중인 사람들도 이런 노인층에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본인의 직업을 순사라 칭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약간의 자조적인 뉘앙스가 있는 경우가 많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분한 박두만은 스스로를 순사라고 부르며, 이끼의 천용덕도 자신이 순사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2. 殉死
모시고 있던 주군이나 주인이 세상을 떠날 때 신하나 하인 등이 자결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도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나, 사회 풍습에 따른 간접적 강제를 포함하여 실질적으로는 강제적인 경우가 더 많았다.한국사에서도 등장하는데 고구려 동천왕 22년(248)조에는 왕이 붕어하자 가까운 신하들이 스스로 순장하려고 하자, 사왕(중천왕)이 이는 예가 아니라 금했으나 장례일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가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순장이 서서히 금지되어가지만 지배자는 여전히 신격화되어있어 일어난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순장의 일종이며 하위개념이긴 하지만, 양자에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순장이 후대에 이르러 발전(?)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순장과 순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순장은 주인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만, 순사는 따라 죽는 것일 뿐 같이 묻히지는 않는다.
* 둘째, 함께 묻힌 순장자는 주인의 부장품으로 취급되어 무덤 속에서도 주인을 모시는 형태를 취한다.
* 셋째, 순장은 본인이 원하거나 말거나 이루어지지만, 순사는 형식적으로는 아랫사람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것으로, 자살에 해당한다.
라는 점. 즉, '다른 무덤에 묻힘 + 부장품 아님 + 자발적으로 죽음'이라는 점에서 순장과 다르다. 예를 들자면 진시황릉에 부장된 말의 경우 순장에 해당하지만, 숙종이 죽자 슬퍼하여 음식을 끊고 따라죽은 뒤 숙종릉 근처에 묻혔다는 고양이 금손이[3]의 경우는 순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아래에서 논할 열녀나 사티의 경우, 어쨌거나 아내가 묘주인인인 남편의 부장품 취급으로 묻히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 묻히며 속사정은 어떻든 겉으로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기에, 사전적인 의미의 순장에는 해당되지 않고 순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고대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세계 각지에서 순장을 대체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원래 순장은 '불필요한 적이나 노예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에서부터 '일종의 제례'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규모의 인원을 강제로 처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문명 수준이 발달함에 따라 대규모 노동력의 상실, 처리가 경제적인 손해가 되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어 강제적으로 죽이는 일에 당사자의 반발이나 반항도 따르기 시작했다.
결국 강제로 껴묻거리 당하는 순장은 그저 어리석은 짓이고, 자발적으로 주인을 따라 죽는 순사가 명예롭지 않냐? 정도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발전하였다. 실제로 사기 등의 고대 기록을 보면, 시대가 흐를수록 순장보다 순사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순사는 결국 순장과 달리 대규모의 사회 전통으로서 제도화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어찌됐든 순사가 순장과 다른 점은 자발성인데, 겉으로는 어찌 됐든 간에 속으로는 누구나 자기 목숨이 아까운 법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실제로 순사를 단행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순장은 강제성이 동반되기에 숙청용으로 애용되었지만 순사는 그런 것이 불가능했기에 더 줄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한나라의 성립 이후 통치 이념으로 유교가 들어선 뒤 고도로 유학적 개념과 논리가 발전하여, 주군을 따라 죽는 게 진정한 충(忠)이 아니라, 주군의 뜻에는 맞지 않더라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표명하는 것이 진정한 충(忠)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조선의 경우. 다만 어찌된 일인지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순사도 아닌 순장 자체를 부활시키긴 하였다. 당연히 중국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이 경우는 한족의 풍습이 아닌 북방 민족의 풍습이 유지된 것이다. 명나라도 청나라도 초기에나 순장 풍습이 있었지 중후반에는 정통제와 강희제가 금지시켜 사라졌다.
서양에서는 중세에 접어들며 순장이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순사 또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자살을 엄금하는 기독교 전파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1983년 교회법 개정 전까지 가톨릭은 자살자의 장례 미사를 치러주지 않았고 이는 곧 자살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었으므로, 순장, 순사가 빠르게 사라지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남편이나 주군의 사망으로 슬픔에 겨워 병에 걸려 따라 죽게 되었다는 형태라면 자살이 아니라는 입장이기에 이런 형태의 죽음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었고 이런 형태의 죽음을 문화적, 역사적 의미로서의 순사로 보기에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교리 역시 자살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순장과 순사 모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어쨌거나 순사는 순장과 마찬가지로 현대에는 주류 문화로 취급받지 못하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근대 이전까지 빈번하게 일어났고 주로 여성이 희생양이었다. 왜 하필 아시아 지역이냐면,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나 이슬람교 같은 엄격한 자살 금지 교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특히 인도의 사티가 그 극단적인 예이다.
전근대 한국이나 중국에 미덕으로 칭송받던 '열녀 일화와 열녀문'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사티는 강요받기에 순사보다는 순장에 가까운 반면, 열녀의 경우에는 과정이야 어쨌건 자발적이어야 했고 그래야 인정받았다. 예시로 열녀문이 세워지는 이익을 노리고 과부를 살해하려던 사람들이(그것도 친척들이었다.) 걸려서 처벌받은 바가 있으니 저렇게 죽음을 강요하는 건 공식적으로 범죄로 봤다는 증거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처벌 수위도 장난이 아니라 민(民) 관(官) 할 거 없이 고을 전체가 강등당하는 처벌이 내려졌다.
2.1. 양란 이후 조선의 사례
조선에서는 양란 이전까진 열녀가 되길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심할 정도로 케이스가 급증했다. 심지어 양반 유학자들조차그런데 정지영 교수가 박사논문에서 밝히길, 17세기 중반까지 신분별 수절과부 비율을 연구한 결과, 양반이 30%, 양인이 17%, 천인이 7%로 나타났다. 여자 혼자서 먹고 살기도 어려운 양인 이하 계층의 여성들은 현실적으로 수절하기가 힘들었다. 즉 그나마 양반쯤 되면 수절해도 친정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도 있으니 수절해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천민의 경우 노비라면, 특히 사노비였다면 수절해 후손을 갖지 않는 건 주인에게 엄청난 재산 피해를 미치므로 불가능했다.
국가가 나서서 열녀제도를 운영해 순절을 사회적 도덕규범으로 만든데다, 만약 여자가 재가를 하면 그 자손이 벼슬을 못하도록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정했으니 국가가 제도적으로 열녀를 양산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허나 어차피 벼슬을 하려면 과거를 치러야 했고 그 당시로서는 과거를 치를 재력을 가진 사람은 얼마 없으니 결국 이 또한 대체적으로 양반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된다.
만약 열녀문이 세워지면 그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고 여러 혜택까지 주어진다. 양반은 벼슬자리를 얻고, 양인은 부역과 과세의 경감 및 면제, 천민은 신분이 상승된다. 그러니 과부된 며느리에게 목을 매달라고 강요하거나 집안식구들이 짜고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말이 미담이지 실제론 가문을 위해서 명예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리다. 현대로 치면 보험사기를 저질러서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는 짓과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명예살인인것이 틀동나면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해당 고을까지 등급이 강등되는 등 강력한 처벌을 받도록 되어있다.
또한 왕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열녀가 되라고 장려한것도 아니라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이 죽자 식음을 전폐한끝에 13일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신하들이 열녀로 지정하다는 제안을 하자, 영조가 이를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거절했고, 결국 정조가 즉위하고나서야 열녀로 지정되고 열녀문이 세워진 일화도 있다. 다모에서도 들병이가 위장 침투를 위해 과부로 위장해 목이 매달릴 뻔 하다가 구출을 받는데 시가(媤家)에서 열녀 지정을 받으려고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정체를 숨긴다.
2.2. 일본의 순사
일본에서는 센코쿠 시대 말에서 에도 시대 초기인 17세기에 크게 성행했고, 이후 금지되긴 했으나 암암리에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순사가 특별한 점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한 때 나라의 비공식적인 제도 내지 관습이 될 정도로 성행했다.
-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암암리에 사회 미덕으로 여겨져 최근까지 전해져 왔다.
- 여성이나 노예 등의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킨 게 아니라 지배계급이 순사했다. 다른 나라에서 지배계급의 순사는 상당히 이른 시점에 사라졌음을 감안하면 일본의 사례는 매우 특수하다. 물론 밑의 노기 마레스케의 사례를 보면 부인(여자)도 같이 죽었기에 반드시 사회와 무관하게 완전히 자발적인지 반드시 여자나 노예는 하지 않았는지 더 연구가 필요할 듯 하다.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주군인 다이묘가 연로하거나 병세가 심해져 죽을 날을 준비할 때가 됨.
- 주군의 총애를 받는 주요한 가신들이 조심스럽게 "돌아가시게 되면, 따라 죽어도 됩니까?"라며 허락을 구한다.
- 주군이 여러 가지를 따져보고 허락 여부를 결정.
- 주군이 사망하면, 가신들이 기쁘게 할복.
- 다음 주군이 들어선 뒤 따라 죽은 가신들과 그 후손을 칭찬.
이런 일은 처음에는 소수만 행했는데,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어째 유행을 타더니 규모가 커져 전국 단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 타다키치가 1607년 사망했을 당시에 순사한 가신은 4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1636년에 다테 마사무네가 죽었을 때는 15명이 할복순사했고, 1641년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들로 구마모토 번의 번주였던 타다토시가 죽었을 때는 18명(+1명) 이었다. 여기서 +1명에는 사연이 있는데, 아래에서 설명한다. 1657년 초대 사가 번주인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아들. 이방자 비의 외가 쪽 조상)가 죽었을 때는 무려 26명이 순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사무라이에게 있어 자신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목숨을 거는 것.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군이 죽으면 따라 죽자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 정치적인 이유.
그 이면에는 옛 가신들이 새로운 주군의 부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순사자들이 전부 죽은 주군과 동년배인 늙은 가신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중장년의 나이로 한창때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어린 시동이 순사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고려는 직접적인 이유보다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 중도와 관련이 있음.
순사자들은 주군과 육체관계를 맺은 자들에 해당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게 그냥 단순한 후대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시 사람들은 "주군의 중도들은 당연히 따라 죽는 것이 도리" 라고 여겼다는 것. 당대 유학자인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 또한 '순사는 명예로운 것이 아니라 그저 주군과 잠자리를 같이 한 자들이 따라 죽는 것일 뿐'이라고 논했다. - 순사자의 가문과 후손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존재함.
'순사는 곧 명예 → 순사자들은 명예로운 자들 → 그들의 가문에게 명예 & 후손들에게 명예'라는 논리가 성립하는데, '명예 = 권위 = 권한 = 권력'이므로 당연히 실질적인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부분에서 뿐 아니라 영지 분배 등과 관련하여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이 있었던 경우도 제법 존재. 당시 조선 유학자로서 유일하게 사무라이 계급을 관찰, 기록할 수 있었던 강항은 "사무라이들의 자해(할복)는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라고 논했는데, 곧 이런 관점에서 할복과 순사의 이면을 관찰하고 결론지은 것이다.
이것뿐만이라면 별 문제는 없었겠으나 어느샌가 순사가 반쯤 제도화될 정도로 사회 전체에 확산되어 버리자 상당한 부작용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나름 사무라이입네 하는 자들이 전부 너도 나도 주군을 따라 죽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가신이 선대를 따라 전부 다 죽어버리면 차기 다이묘 밑에서 일할 사람은 사라져 버린다. 거기다 비단 다이묘 뿐 아니라 주군을 섬기는 사무라이들이 죄다 주군이 죽을 때마다 죽으니 죽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난다. 물론 이 문제는 죽을 나이가 된 다이묘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순사자들을 선정할 때 나름대로의 원칙을 따랐으며, 이렇게 허락받은 자들만 순사했다. 또한 주군의 허락을 얻지 못했는데 따라 죽으면 오히려 불명예스러운 개죽음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 원칙이라는 것이 명문으로 확실히 정하거나 특별히 법으로 정한 것도 아니라 사실상 다이묘 마음대로에 불과, 당연히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너는 후대를 위해 필요한 자'라며 순사를 허락하지 않아 죽지 않았는데 남들이 보기엔 '저 자는 따라 죽었어야 마땅한데 살았다'고 평가하는 경우, 남들이 보기엔 따라 죽을 자격이 없는데 자기 이름을 높이고 가문과 후손을 챙기기 위해 늙어 정신이 혼미한 다이묘를 꼬드겨 순사한 경우 등이 발생했다.
위에 언급한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죽었을 때 순사자 중 +1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허락받지 못한 순사가 극단적인 결과를 낳은 끝에 아예 멀쩡한 가문 전체가 멸문해버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전말은 막말유신초의 소설가 모리 오가이에 의해 <아베 일족>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되었다.
-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가신이었던 아베 야이치에몬 미치노부는 타다토시가 연로하자 주군에게 순사의 허락을 구했으나 주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주군을 모시라는 명목이었으나, 그냥 왠지 심술이 나 아베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서 그랬다는 기록도 있다. 문제는 아베가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순사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것. 이로 인해 타다토시가 죽은 뒤 '아베가 순사를 허락받지 못해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는 소문이 돈다. 요시가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속편에서는 바가지에 참기름을 발라서 베면 될 것이라는 조롱을 받자 분을 참지 못하고 저지른 것으로 묘사 된다. 열받은 아베는 허락이 없었음에도 불구, 할복순사를 단행했다.
타다토시의 아들이자 차기 번주인 호소카와 미쓰히사는 허락받지 못한 야이치에몬의 순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베 가문의 봉토를 야이치에몬의 아들 전원에게 배분해버렸다. 일반적으로 봉토는 장남에게만 상속하는 것으로 분할상속은 가문의 세력이 약화됨을 의미하기에 이 처사는 위에서 아베 가문을 하대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아베 가문을 멸시하기 시작했다. 열받은 아베 가문의 장남 아베 곤베는 타다토시의 위패에 분향할 때 갑자기 자신의 상투를 잘라 위패에 바쳐버리는 불경한 짓을 해버린다.
차기 번주 미쓰히사는 이 사태를 몹시 불쾌히 여겨 곤베를 교수형에 처해버린다. 할복을 허락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은 곤베를 사무라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베뿐만 아니라 아베 가문 전체를 멸시한 것이다. 모욕을 당한 아베 가문은 주군에게 반기를 들고 자택에서 농성을 벌였고, 미쓰히사는 군사들을 보내 아베 가문을 토벌했다. 아베 일족 전원은 전사하거나 할복하여 가문이 멸문했다.
어쨌든 이렇게 가문이 멸망할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유사한 사례, 즉, 순사 여부에 따라 남들이 깔보아 가문 전체의 명예와 위신이 떨어져 권위를 잃게 되는 일이 제법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속으로는 죽기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자기 가문의 위세를 위해 순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늘어났고, 이는 순사자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다 상황이 다이묘들조차 참지 못할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다이묘 중에서 처음으로 사가 번 2대 번주 나베시마 미쓰시게(鍋島光茂)가 1661년 번내에서의 순사를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것. 이는 미쓰시게의 숙부 나오히로(直弘)가 죽었을 때 무려 36명이 순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인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오히로의 형이자 미쓰시게의 아버지인 가쓰시게가 1657년 사망했을 당시에 이미 26명의 순사자가 나왔었다. 그러니까 불과 4년만에 62명이 순사하거나 순사하겠다고 나섰던 것.
거기에다 미쓰시게 본인 역시 나이가 많아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추후에 더 많은 순사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했다. 그런점까지 감안하면 이 짧은 기간 동안 실제 순사자와 예상 순사자를 합친 수가 세자리 수를 넘어섰을 수도 있는데, 이 정도 숫자면 사가 번의 지배계층이 완전소멸에 이를 지경이다.
당연히 도쿠가와 막부 역시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순사자와 그 규모에 골치를 썩였다. 결국 미쓰시게가 금지령을 내린 얼마 뒤인 1663년, 아예 막부가 직접 전국의 순사를 금지해 버렸다. 그리고 이 금지령 5년 뒤인 1668년, 우츠노미야 번에서 번주 오쿠다이라 다다마사가 죽었을 때 한 가신이 순사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막부가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라졌을 뿐 일부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야마모토 츠네토모(山本常朝 1659~1719)란 사무라이는 순사를 금지당하자 은둔하여 후대 사무라이들의 정신적 지침이 된 <하가쿠레>를 저술했는데, 이 하가쿠레의 논리에 따르면 순사를 찬양받아 마땅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저서를 저술한 장본인이 순사하지 않은 이유는 하필이면 그가 최초로 순사를 금지해버린 나베시마 미쓰시게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론은 이론일 뿐이니 실제로 모든 사무라이가 순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하가쿠레 등의 영향을 받은 자들 가운데 막부 몰래 비공식적으로 순사한 사례가 제법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이들은 기록상 병사 등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므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사라지자 순사 금지령 또한 공식적으로 소멸되었다. 근대화된 일본 정부로서는 순사 금지법 같은 것을 제정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그런 법을 따로 만들지 않았는데, 그러자 순사자들이 대놓고 다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메이지 덴노 사망 당시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부인 시즈코와 함께 동반순사한 사건. 노기 장군의 사례는 일반적인 순사와는 약간 다른데, 그는 러일전쟁 당시 203고지 공략전의 최고 책임자였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졸전으로 인해 장병 3만 명이 전사했고[4] 노기 본인의 친아들들마저 공략작전에서 전사한다. 노기 장군은 책임을 지고 할복하려 했지만 메이지 덴노가 "짐이 죽기 전에는 할복을 허락할 수 없다."라고 죽지 못하게 했다. 메이지 덴노의 의중은 당연히 "죽지 말고 살아라."였지만, 노기 장군은 이걸 "폐하께서 당신이 붕어하신 후에는 죽어도 된다고 허하셨다."라는 논리로 메이지 덴노가 죽자마자 순사라는 명목으로 할복을 택한 것이다.
현대에도 일본의 순사 풍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1989년에 쇼와 덴노가 사망할 당시에도 순사자가 출현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도 4명에 달하는데, 사망일 당시 와카야마현에서 87세의 남성, 이바라키현에서 해군병학교 출신의 퇴역 해군 장교인 76세 남성, 며칠 후에 후쿠오카현서 38세 남성(할복), 2달 후 도쿄에서 전 육군 중위 출신 66세 남성이 순사했다고 한다. 물론 저들은 전근대 일본의 순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인 주군에게 순사 가부를 묻고 허락받기를 실행했을 리가 없으니 단순한 베르테르 효과인 것이다.
2.3. 관련 문서
[1] 한일합병으로 황국신민이 되면서 일제 국적을 부여했으나, 여전히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등 차별이 있었고 사실상 2등 국민이었다.[2] 현대 한국의 파출소장에 해당.[3] 숙종은 금손이를 반려묘로 키운 애묘인이었다.[4] 노기는 당시에도 이미 명망 높은 장군이란 얼굴마담이었고 실질적 작전은 참모들이 진행했다. 그러나 엉망인 작전을 승인하고 그대로 실행한 노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