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볼리비아
1. 개요
볼리비아의 역사는 크게 스페인의 정복 이전 시대, 1530년대에 시작하여 1825년까지 이어진 스페인의 통치, 1825년 이후 독립국가로서의 볼리비아로 나눌 수 있다.2. 스페인의 정복 이전
볼리비아 고지대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장구한 문명들이 있었다. 티티카카 호 근처에는 티와나쿠라는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15세기에 잉카 제국이 대대적으로 확장을 이루면서 볼리비아의 아이마라족 거주지를 정복함에 따라 북부와 동부 정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잉카 제국의 치하에 들어갔다.3. 스페인의 정복 이후
잉카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볼리비아 고지대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지휘하는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집단에 의해 잉카 제국이 몰락한 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1545년 볼리비아 고지대 동쪽의 포토시에 은광이 개발된 뒤 1571년 아말감이 도입되어 막대한 은이 생산되었다.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은 스페인을 거쳐 중국과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특히 유럽에 유입된 은은 당대로서는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었던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켰다. 물론 당연하지만 은광으로 얻은 부를 누린 건 오로지 스페인[1]과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의 후예들 뿐이었고 채굴에 동원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중노동과 수은 중독으로 고통받아야 했다.4. 독립 이후
4.1. 볼리비아 공화국의 전기 역사(1825~1883)
볼리비아는 1809년 독립 전쟁을 일으켜 1825년에 볼리비아 공화국(República de Bolivia)으로 독립했다. 독립 이후 볼리비아의 역사는 쿠데타로 점철되었으며 그 정도는 정정불안이 심각한 이웃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비교해도 극심한 수준이다. 1825년 독립 후 최소 190번의 쿠데타와 혁명이 있었으며 이런 극심한 분열은 국가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은 물론 국방과 대외정책에도 심각하게 영향을 주어 주변국에게 영토를 연이어 빼앗기는 단초를 마련했다.시몬 볼리바르가 누에바 그라나다를 독립시켜 그란 콜롬비아를 세울 때 페루와 볼리비아[2]도 볼리바르의 부하 장군인 안토니오 수크레(1826~1828)가 해방시켰고, 알토페루는 볼리바르를 기념하며 국호를 볼리비아로 정했다. 페루와 볼리비아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지 않고 따로 독립했다가, 1836년에 페루와 통합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3]을 형성해서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제국, 페루의 독립을 바라는 반군 등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해 3년 만에 연합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879년에 발발한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와 동맹을 맺고 칠레와 전쟁을 벌였으나 참패, 1883년 안토파가스타 등 경제의 핵심인 태평양 해안 지대의 영토를 칠레에게 뭉텅이로 빼앗기고 바다 없는 내륙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볼리비아는 1904년 칠레와 조약을 체결해 칠레의 태평양 해안 지대 영유권을 인정했다.[4][5] 이 패배로 말미암아 기존의 군부 엘리트는 재정 수입을 보장하던 태평양 해안 지대를 상실하면서 재정 기반과 사회적 신뢰를 잃어갔다.
4.2. 볼리비아 공화국의 중기 역사(1883~1952)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라파스의 주석 광산과 수크레의 은 광산을 바탕으로 한 광산주 세력이 성장하여 기존 군부 엘리트를 대신해 정치를 잠식했다. 1898년 양 지역의 광산주 사이의 갈등으로 내전이 발발했고 라파스가 승리했는데, 볼리비아가 난장판이 되는 사이 북부 아크레 주에 이주한 브라질 사람들이 아크레 주를 점거하고 독립선언을 하여 아크레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며 곧이어 브라질 본국도 아크레 공화국을 병합했다. 1903년 11월 볼리비아는 브라질과 페트로폴리스 조약을 체결하여 브라질의 아크레 주 영유를 인정했다.한동안 볼리비아의 경제는 해외의 주석 수요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1차 산물,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주석에만 경제를 의존하게 되어 경제의 편중이 극심해졌다. 1929년 대공황으로 주석 가격이 폭락하자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국내 불안이 확산되자 1932년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차코 지역을 둘러싼 갈등을 벌이던 파라과이와 차코 전쟁을 벌였는데 여기서도 볼리비아는 10만 명에 육박하는 사상자를 낸 끝에 또 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분쟁지인 그란 차코 지방의 3/4이 파라과이 영토가 되었다. 전쟁 패배와 막대한 인명피해는 기존의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여 민족혁명운동(MNR, 1941년 창설)과 같은 야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MNR은 조합주의 내지는 좌파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곧 최대 야당으로 떠올랐다. 1951년 선거에서 MNR이 승리하자 정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MNR을 불법화했다. 이에 MNR은 1952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았다.
4.3. 볼리비아 공화국의 후기 역사(1952~2009)
MNR의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Víctor Paz Estenssoro, 1952~1956, 1960~1964, 1964, 1985~1989) 대통령은 1953년 8월 2일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켜 토지개혁을 추진, 1954년부터 1968년까지 전체 3,600만 헥타르의 토지 가운데 800만 헥타르를 농민 공동체에게 분배했다. 토지개혁은 MNR 이후 정권에서도 지속되어 다음 30년간 추가로 3,900만 헥타르가 추가로 분배되는 등 라틴아메리카 내에서는 상당히 철저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상위 4.5%가 전체 농지의 70%를 소유한 전전의 대토지 소유제, 이른바 라티푼디스모(latifundismo)가 소멸했다.[6] 여기에 수출의 70%(1952)를 차지하는 기간 산업인 광산업도 국유화했다. 사회 정책으로는 보통선거를 도입하고 지방에 교육을 보급하며 인구의 2/3나 되는데도 중앙정부와 사실상 남남으로 지내던 아이마라족과 케추아족 농민들을 국가 체제에 포섭하려고 했다. 그리고 군축을 시행하여 1953년 정부예산의 20%를 차지하던 군비를 1957년 6.7%로 줄이고 그 대신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했다.파스 1기 정부가 펼진 급진개혁이 일으킨 사회적 혼란은 볼리비아를 경제 붕괴 직전에 내몰았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볼리비아 전역에서 연평균 350회의 파업이 발생하여 농업과 광업 생산 전반이 하락했다. 1951~1956년 볼리비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3%였는데 특히 농업(-2.4%), 광업(-4.3%, 석유 제외)의 부진이 극심했다. 경제의 전반적인 부진은 비슷한 시기 석유 산업이 급속히 발전한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상쇄되었다. 당내 강경좌익 지도자인 후안 레친(Juan Lechín)이 설립한 볼리비아 중앙노동조합(COB)이 관련 정부부처를 통제하고 필요 이상의 권한을 갖게 되면서 개혁의 합리성과 통일성이 실종되었다. 여기에 기존 볼리비아 광업을 지배하던 3개 광업회사를 국유화하여 설립한 볼리비아 광업공사(COMIBOL) 운영 자금을 대면서 동시에 사회보장 프로그램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해 막대한 화폐가 발행되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956년 파스의 뒤를 이어 집권한 같은 당의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Hernán Siles Zuazo, 1952, 1956~1960, 1982~1985)는 에데르 계획(Plan Eder)을 실시하여 정부지출과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제한하고 미국의 경제원조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MNR 정부가 반공 민족주의 정부라고 확신한 미국이 막대한 지원을 보내고 농업과 건설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정체된 상태로 머물렀다.(1956~1961년 연평균 경제성장률 1.5%) 1960년 대선 승리로 집권한 파스 2기 정부는 실레스 1기 정책을 계승하여 건설, 광업, 석유 부문의 호황을 바탕으로 1961~1964년 연평균 5.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그러나 당내 온건파 지도자인 왈테르 게바라(Wálter Guevara)와 레친 사이의 갈등으로 게바라가 사임하면서 향후 MNR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기에 1961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연임이 가능해지자 파스가 자신을 중심으로 정권을 재창출하려고 시도하면서 1964년 대선에 출마 의지를 가졌던 레친의 분노를 샀다.
이로서 게바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와 레친을 중심으로 한 강경좌파 간의 분쟁에 더해 향후 대권을 둘러싸고 파스와 레친이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MNR의 분열은 더욱 극심해졌다. 파스 2기 정부는 정권의 보위를 넘어서 이제 권력투쟁의 라이벌인 레친의 기반으로 변질된 노동자-농민 민병대를 해체하고 볼리비아군을 다시 재건하려고 했다. MNR의 분열과 MNR 정권을 물리적으로 떠받치던 노동자-농민 민병대의 해체, 볼리비아 군대의 재건은 궁극적으로 공군사령관 레네 바리엔토스(René Barrientos, 1964~1965, 1965~1966, 1966~1969)와 같은 정치군인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입지를 강화했다. 파스는 1964년 선거에서 러닝메이트로 바리엔토스를 지명하여 같이 당선되었는데 바리엔토스는 그해 11월 4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계 진출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 1971년 볼리비아의 경제활동 지도
바리엔토스는 토지개혁과 같은 MNR의 유산을 일부 계승하면서 체 게바라의 게릴라 운동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MNR 정부 기간 동안 조직되었던 대중 조직들을 농민 단체만 남기고 전부 해산하고자 했다. 1969년 4월 27일 바리엔토스가 지방 순시 중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잦은 정권교체가 일어났으나 1971년 우고 반세르(Hugo Banzer, 1971~1978, 1997~2001)가 집권한 후에야 안정을 찾았다. 반세르는 MNR의 우익 파벌과 팔랑헤당과 연합하고 반대파에게 잔인한 탄압을 가하여 1978년까지 통치했다. 반세르의 통치 기간 중 볼리비아는 광물과 천연가스 수출로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또한 1차 산물 중에서도 주석에만 극단적으로 의존하던 기존 경제구조도 어느정도 다각화를 하여 주석 외에 원유, 천연가스, 비철금속 원광, 각종 농산물의 수출 비중도 성장했다.
1978년 반세르가 퇴진하고 볼리비아는 1969~1971년을 연상시키는 대혼란을 빚었다. 4년간 10개 정부가 들어섰고 1982년이 되어서야 실레스의 민주정이 재집권하면서 비로소 안정적인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실레스 2기 정부는 주석 가격 폭락이 초래한 경제위기 대처에 실패하면서 1984년부터 일어난 초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통치불능 상태에 처했다. 볼리비아는 조기 선거를 치루어 파스가 4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파스 4기 정부는 제프리 삭스의 조언 하에 자유무역과 가격자유화, 세제 개혁 등을 포함한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하여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치뤄진 선거(총선, 대선 모두)에서 어느 정당들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 정당들은 이른바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정부를 운영했으며 당시의 정치 행태를 가리켜 협약민주주의(Democracia Pactada)라고 한다.[7] 당시 볼리비아의 정권은 민족주의민주행동(ADN), 혁명좌파운동(MIR), MNR 이상 3개 정당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에 따라 결정되었다. 협약민주주의 기간 동안 정부는 지방정부의 권한 강화 및 경제의 자유화를 위해 노력했다.
협약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는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경제적으로 밀접한 아르헨티나가 1998년부터 경제위기에 빠지면서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볼리비아인 이주노동자의 송금액이 감소하였다. 또한 반세르 2기 정부가 유류 가격을 인상하고 원주민이 재배하던 코카 재배 근절에 나서자 정부에 대한 원주민들이 불만이 증가했다. 2002년 선거에서 원주민 에보 모랄레스(2006~2019)가 이끄는 사회주의 운동(MAS)이 제2당으로 약진하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명의 대통령이 연이어 집권하는 일련의 정치위기 끝에 2005년 선거에서 모랄레스가 과반을 득표하고 하원에서도 MAS가 단독 과반을 차지하였다. 협약민주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고, 중간에 약간의 잡음을 거친 채 2024년 지금도 계속되는 MAS의 장기 집권이 시작되었다.
4.4. 볼리비아 다민족국의 역사(2009~현재)
모랄레스는 원주민의 권리를 향상하기 위한 인디헤니스모 정책을 펼쳤다. 2009년 인디헤니스모 정책의 일환으로 국명도 기존 볼리비아 공화국에서 "볼리비아 다민족국"(Estado Plurinacional de Bolivia)으로 변경했다. 모랄레스 정부는 2000년대 초반 외국 기업 국유화와 원자재 가격 성장으로 윤택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사회와 경제에서 업적을 남겼으나 볼리비아 정치의 오랜 특징인 권위주의를 타파하는데는 관심이 없었다.[8] 모랄레스는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2019년 대선 과정에서 4선을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야권지지자들의 시위로 사임하였다. 중간에 자니네 아녜스 장관이 잠시 대통령으로 재임했다가 2020년 대선에 MAS의 루이스 아르세(2020~현직)가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24년 기준 볼리비아는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다.#[1] 근대 스페인 왕국의 압스부르고 왕조는 포토시의 은 덕분에 몇 번이나 파산놀이(...)를 했는데도 다시 일어섰다.[2] 이 때 볼리비아는 알토페루(고지대 페루)로 불렸다.[3] # 이 연합은 국기도 갖고 있었는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이 여기에도 들어가 있다.[4] 볼리비아는 내륙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태평양 해안을 돌려주거나 항구 사용권이라도 달라며 칠레와의 외교분쟁도 불사하고 있고, 해안 영토를 상실한 이후에도 해군을 폐지하지 않고 운영하고 있는데 볼리비아 해군은 티티카카 호수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또 여기에 바다를 접한 이웃나라인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항구를 적극적으로 빌려서 자국 국적의 해운 수송 선박을 확보, 등록해 사용하고(지금도 아르헨티나와 페루에서는 볼리비아산 물품들의 물동량과 유통거래가 많이 오간다), 이들 나라 대학교와 사관학교에 선원 및 해군 수병 육성과 해운업 교육을 위해 유학생들까지 꾸준히 파견하고 있다. 언젠가는 칠레로부터 이 지역을 되찾거나 칠레 항구의 사용권을 확보해 바다로 나가기 위한 볼리비아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5] 그러나 이미 이전 볼리비아령이었다가 볼리비아가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전해 칠레에 합병되어 현재 칠레 땅인 안토파가스타와 카라마, 탈탈 등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칠레 본국에서 이주해온 칠레인 이주민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라서(심지어 볼리비아인 출신마저 칠레 잔류를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역 주민들 상당수는 칠레 잔류를 주장, 볼리비아로의 재귀속을 결사 반대하고 있으며, 현재 볼리비아와 이 일대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칠레 역시 주민들이 칠레에 남고 싶어한다는 논거를 내세우며 이들 지역에 대한 볼리비아의 영유권 반환 및 항구 사용 허가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에 또 칠레가 일방적인 침략전쟁으로 빼앗아 합병한 영토가 아니라 볼리비아가 현지의 구리 광산 개발을 위해 칠레와 맺은 공동개발 조약을 파기하면서 칠레의 분노를 초래하여 인접국과의 외교 정책 실패로 촉발된 전면전에서 패배해 영유권을 상실한 곳이라 국제사회에서도 외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8년 볼리비아가 안토파가스타 등 구 볼리비아령이던 태평양 연안의 북부 칠레 지역에 대한 영유권 문제를 두고 칠레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였는데 정작 국제사법재판소는 최종 2심 판결에서 칠레는 볼리비아와 이 일대에 대한 영유권 협상에 임할 의무가 없다며 사실상 칠레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볼리비아에게 항구를 빌려주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페루 등 해안선을 접한 남미 이웃나라들에서도 안토파가스타를 칠레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6] 볼리비아의 토지개혁은 경제적 성취를 얻기보다는 다분히 사회적 성취를 얻은 것에 가깝다. 토지개혁으로 농가의 영양공급은 향상되었지만 정부가 기대한 식량 생산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1960년대 이후 동부 저지대 위주로 상업적 영농과 축산업이 발달하면서 식량 생산 증가와 농업 다각화가 그나마 이루어졌다. 원주민이 밀집한 고지대의 농장이 정부의 지원 부족과 후진 기술력으로 인해 정체된 사이 메스티소 농민이 밀집한 저지대의 농장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전하여 지역 간 격차가 확대되었다. 이 문제는 볼리비아의 고질적인 인종 간 빈부격차 문제와 결부되어 오늘날 볼리비아 사회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른 상태이다.[7] 라틴아메리카에서 협약민주주의는 낮선 것이 아니다. 유사한 사례로 인근의 베네수엘라의 푼토피호와 콜롬비아의 국민전선이 있다. 공통적으로 2개 또는 3개 기성 정당 간의 권력 배분을 통해 정치 안정을 꾀하다가, 점차적으로 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타 정당을 배제하면서 폐쇄성으로 치달았다고 결국 붕괴되었다.[8] 볼리비아의 정치사의 전반적인 특징은 좌우를 막론하고 권위주의가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52~1964년에 권력을 잡은 MNR과 2006년 집권한 모랄레스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모랄레스 집권기 볼리비아 정치는 삼권분립을 문서상으로나 보장하는 외견적 입헌주의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