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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19:53:30

불만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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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자코바이트, 스코틀랜드 자치운동, 웨스트 로디언 질의, 1979년 자치권 이양 투표, 1997년 자치권 이양 투표, 스코틀랜드 독립운동(독립 투표, 여론조사), 영국의 자치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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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내용3. 기타4. 관련 문서

1. 개요

Winter of Discontent

영국에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제임스 캘러헌 내각이 도입한 임금인상률 상한제에 반발하여 영국 내 노동조합들이 1978년~1979년 사이 겨울에 일으킨 일련의 총파업. 영국병이 정점에 이른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노동당 정권은 붕괴되고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보수당 마거릿 대처 정권이 장기 집권을 하는 계기가 된다.

2. 내용

1960년대 후반 이후 영국 경제는 고복지·고비용·저효율로 상징되는 영국병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73년 오일쇼크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였고, 세계 경제의 침체와 맞물려 영국 경제는 더욱 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특히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는데, 1974년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12개월 동안만 무려 물가가 27%가 올라가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한편으로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들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실업률 상승을 억제[1]할 필요가 있었던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 내각은 이 상황에서 소득정책[2]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든다.

이러한 국가에 의한 임금 상승 억제는 당시 교조화되어있던 영국 노조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결국 1978년을 기점으로 캘러헌 내각은[3] 소득정책 폐지 및 임금 인상에 대한 단체 교섭의 부활을 약속하게 된다. 하지만 단체 교섭의 부활을 영국 정부가 선언함과 동시에 진정되는 듯 보였던 인플레이션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캘러헌 내각은 1978년도 임금 인상률을 5%로 제한할 것을 선언한다. 이러한 약속 번복에 노동조합들은 극렬히 반발하게 된다.

팽팽해져가던 긴장 상태에 불을 붙인 것은 포드사였다. 포드사가 무난했던 실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권유[4]에 맞추어 5%에 못미치는 임금 인상을 노조 측에 제시하자 포드 노조측은 파업으로 맞대응했다. 결국 1978년 11월, 노조 측에 굴복한 포드사는 5%를 상회하는 임금 인상을 노조 측에게 약속하게 된다. 상술했듯이 제임스 캘러헌 내각은 임금 인상률 제한 정책을 도입하면서 임금 인상률 상한선 5%를 '권유'하되 그 이상의 인상을 제시한 기업에게는 벌칙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선언했었고, 이러한 입장에 입각하여 캘러헌 내각은 포드 사에 대한 제재안을 의회에 상정한다.

내각의 이 제재안은 여야 양측으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부결된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시장 경제의 원리를 침해하기에 해당 법안에 당연히 반대표를 던졌고, 여당인 노동당 내부에서도 강경 좌파 세력은 정부가 왜 임금교섭에 간섭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느냐고 반대표를 던졌다. 한편 같은 해 10월에 있었던 노동당 전당대회에서는 본인들의 당수인 캘러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정부가 노동자들의 임금 협상에 개입하는 것을 중단할 것"을 규정한 결의안이 압도적인 득표수 차이로 통과된다. 이처럼 제임스 캘러헌 내각이 여당 내부 세력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가운데 막 해가 넘어간 1979년 1월 대형 폭탄이 영국 사회를 강타한다. 1월 초 유조차 트럭 운전사들이 무려 40%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트럭 운전사들의 파업으로 영국 내 물류 운송이 상당부분 마비된 가운데, 파업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월 22일에는 무려 150만명이 참가하여 1926년 이후 50여년만에 최대 규모의 총파업 및 시위가 이루어졌으며, 철도 노동자들과 간호사 등 공공부문의 근로자들 역시 임금 인상률 상한제의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가담했다. 여기에 맨체스터리버풀 지역의 청소부 및 시신 매장 노동자들 역시 파업에 동참하면서 영국 사회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된다.[5] 결국 캘러헌 내각은 노조 측에게 백기 투항을 했고, 2월 중순에 파업이 상당부분 중단되면서 불만의 겨울을 간신히 끝을 맺게 된다.

여당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캘러헌과 그 내각은 불만의 겨울을 계기로 1979년 3월에 내각불신임결의를 당했으며[6], 이로 인해 5월에 치러진 조기 총선에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은 노동당과 캘러헌 내각은 참패했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1974년 10월에 치른 총선 결과보다 62석이 증가한 339석을 획득, 13,697,923표(43.9%)를 얻어 50석이 감소한 269석의 노동당을 누르고 당당히 과반수 이상의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당시 선거결과 분석에 따르면 노동자 가운데 15% 가량이 노동당을 뽑지 않고 보수당을 지지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3. 기타

4. 관련 문서


[1]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실업률과 물가반비례 관계라는 것이 통용되던 시기로, 아직까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는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민간에서도 돌기 시작했다.[2] Income Policy. 물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임금이나 금리ㆍ지대 등의 여러 소득 및 가격 일반에 정부가 관여하고, 규제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임금소득의 억제가 소득정책의 주요 대상이 되기 때문에 좁은 의미로는 임금억제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3] 소득정책을 도입한 윌슨 총리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1976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4] 노동자 눈치를 보던 제임스 캘러헌 내각에서 임금 인상률 상한선 5%를 법적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 양측에 '권유'하는 어정쩡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또 웃긴건, 법적인 규제가 아닌데도 5% 이상의 인상을 제시한 기업에게는 벌칙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뭐도 아닌 어정쩡한 절충안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캘러헌 내각만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었다(...)[5] 당시 더 선 등 영국 언론들의 보도를 읽어 보면 더 선이 보수 성향 타블로이드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암환자들이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신들이 매립되지 못하는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뭔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6] 그렇지만 정말 간신히 결의안이 통과했다. 311:310으로 1표 차 가결. 고작 11석만 가졌던 SNP가 불신임안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당시 죽을 병으로 인해 결석한 노동당 의원 앨프레드 브러턴(Alfred Broughton)이 표결에 참여했다면 부결되었을 것이다. 의장은 가부동수일 경우에만 투표가 가능하며, 그것도 현상변경을 불허하는 쪽으로 투표하는 것이 관례여서, 311:311 가부동수일 경우 의장의 반대표로 캘러헌 불신임안은 부결되었을 것이기 때문. 그 뒤로 대처가 총리가 되고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영국 역사의 큰 흐름을 결정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7] 당시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11석을 갖고 있었는데 해당 투표를 실시하기 전에 노동당이 이상한 규정을 적용해서 가결시킨 것에 대한 복수로 11인 전원이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하는 바람에 1표 차이로 가결되어 캘러헌 내각이 실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