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02:02:30

비로비잔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009999>
파일:유대인 자치주 주장.svg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9999, #009999 20%, #009999 80%, #009999);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파일:10.Birobidzhan.png
비로비잔*
<rowcolor=#fff>
파일:레닌스키군.png
레닌스키
파일:비로비잔스키군.png
비로비잔스키
파일:스미도비치스키군.png
스미도비치스키
파일:오블루첸스키군.png
오블루첸스키
파일:옥탸브리스키군.png
옥탸브리스키
}}}}}}}}}
파일:Coat_of_Arms_of_Birobidzhan.png
비로비잔
Биробиджан
ביראָבידזשאַן‏‎
Birobidzhan
소속 유대인 자치주
설립 1915년
인구 70,433 (2021)
면적 169.38㎢
인구밀도 415.83명/㎢
시간대 UTC+10

1. 개요2. 역사

[clearfix]

1. 개요

비로비잔러시아의 도시로 유대인 자치주의 주청 소재지이다. 유대인 자치주의 인구 대부분이 비로비잔에 거주하고 있다.

비로비잔은 유대인 자치주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비로비잔 역이나 간판에는 러시아어이디시어 표기가 병기되어 있다. 하지만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 비중은 1%가 안 되고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이며 소수의 고려인들과 퉁구스계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과 접해 있어서 중국인들이 비로비잔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중국어도 자주 들린다.

2. 역사

원래는 퉁구스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지만, 19세기 이후에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유대인 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개척하면서 러시아 문화권이 되었다. 도시 자체는 러시아 제국에서 아무르 강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면서 1912년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티혼카야 역(станция Тихонькая)으로 불렸으며 1928년 당시 역 운영을 위한 인원과 가족을 포함하여 237가구 도합 623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소련에서는 이 지역에 초등학교와 공공 상점 그리고 우체국을 설치하였다.

1928년 5월 러시아 극동 영토에 유대인 자치주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세워졌고 소련 정부에서는 티혼카야 역을 유대인 자치주 중심지로 지정하였다. 유대인 자치주 설립 계획은 소련 내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소련을 이탈하는 것을 예방하고,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소수민족은 소수민족 문화를 보존할 자치 영토가 있어야 한다는 레닌주의 교리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극동 지역에 러시아계 인구를 정착시켜 일본 제국의 확장으로부터 러시아 극동 영토를 보존한다는 세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소련과 봉천군벌 사이에 벌어진 중동로 사건 당시 소련군은 압도적으로 봉천군벌 군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1931년 일제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건설되면서 해당 지역 방어 관련하여 긴장감이 높아졌다. 소련은 당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던 유대인 일부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새로 비로비잔(Биробиджан, 비라강과 비잔강을 합친 지명)으로 개명한 티혼카야 역을 중심으로 유대인 자치주에 정착시켰다. 1928년부터 1933년 사이에 도합 19,635명의 유대인이 비로비잔 역에 도착하였으나 이 중 11,450명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1932년도 비로비잔은 2,500여 명의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일부 미국이나 아르헨티나에서 부적응한 유대인들이 소련으로 돌아와 비로비잔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민 갔던 유대인들 일부가 소련 비로비잔으로 이민하면서 1936년도 초 비로비잔 내 인구는 1만 2천여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다만 비로비잔은 교통, 군사 요충지라는 점 외에 특별한 자원이 있는것이 아니어서 이 지역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이 지역에 무성한 삼림을 베어다가 유럽식 가구를 만들어서 하르빈[1]에 있는 지인들을 통해 만주국에 몰래 수출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다.

1939년부로 인구가 3만여 명으로 증가한 의료 전문 학교가 건설되었으며 비로비잔 시에서 자체적으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고 이디시어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 시기 바로비잔은 소규모 극장과 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유대인 자치주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2차 대전 당시 비로비잔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로부터 안전하였고, 여러모로 자치와 평화를 누렸으나 대신 소련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파견된 비로비잔 시민 중 3분의 2 이상이 전사하였다 한다.

이후 비로비잔 시에는 비유대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이주가 증가한 반면 소련-이스라엘 사이의 긴장 관계가 완화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한데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유대인 해외 이주가 가속화하면서, 실질적으로 비로비잔 내 유대인 인구 비율은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이하 수준으로 감소한다.[2] 아직 시내에 시나고그도 두엇 있긴 하지만, 비로비잔 시가 한 때 유대인 자치주의 주도로서 기능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그저 도시 역사와 상징으로 남게되었다.


[1] 1917년 적백내전 이후 많은 러시아인 난민들이 하르빈에 정착했는데 그 중에 특히 유대인들이 많았다.[2] 원체 (비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촌보다는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