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00:25:59

순타태자

사아군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be673> 온조왕 다루왕 근초고왕 침류왕
부여다루 부여기루 부여구수 부여아신
<rowcolor=#fbe673> 아신왕 문주왕 무령왕
부여전지 부여삼근 순타태자 부여명농
<rowcolor=#fbe673> 성왕 위덕왕 혜왕
부여창 임성태자 아좌태자 부여선
<rowcolor=#fbe673> 무왕 의자왕
부여의자 부여융 부여효
}}}}}}}}}



純陀太子
(? ~ 513년 10월 13일[1])

1. 개요2. 생애3. 동일인물설
3.1. 반박
4. 여담5. 참고문헌

1. 개요

백제의 왕족.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인 제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만 등장한다.

2. 생애

秋八月癸未朔戊申 百濟太子淳陀薨
가을 8월 계미삭 무신일(26일), 백제 태자 순타가 죽었다.
일본서기》 권 17 게이타이 덴노 7년(513)#

사실상 위 기록이 기록의 전부. 사망에 대한 기록밖에 없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 수 없다. 25대 무령왕의 뒤를 이은 26대 성왕은 장자 또는 원자라는 표현이 없는 걸 보면 순타태자는 성왕의 형제라는 사실 정도만 간추려 볼 수 있다.

성왕은 무령왕과 나이 차이가 40살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령왕이 사촌동생 삼근왕과 이복동생 내지는 사촌동생인 동성왕이 연달아 살해당하는 혼란 속에서 '형'의 신분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성왕은 501년 무령왕이 즉위한 뒤 무령왕의 즉위를 도운 가문 출신을 후처로 맞아 태어난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성왕은 504년생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순타가 성왕의 친형일 수도 있고, 무령왕이 왜에서 태어나 성장기에 왜에서 살았다는 점과 신찬성씨록에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제외해도 무령왕의 후손을 자처한 가문이 여럿 있다는 점에서 젊은 시절 혼인해 일본에 후손을 남긴 전처의 아들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순타의 어머니가 아예 왜인일 수도 있다.

이후 《속일본기》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일본에 뿌리내렸고, 후에 고닌 덴노의 후궁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한반도측에 순타태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보니 교차검증이 어려워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집안과 백제 무령왕과의 혈연 관계는 미궁이긴 하다. 물론 간무 덴노가 직접 말할 정도면 모친인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이미 고닌 덴노 후궁 시절부터 당시 주변인들도 아는 백제계 도래인 집안 출신이었던건 맞아보이나, 자세한 계보 등은 전하지 않다보니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미 멸망해서 확인도 어려운) 백제계 왕족 혈통과 엮은거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신찬성씨록에도 나오듯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은 왕족 후손임을 주장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물론 진짜 왕족인 경우도 있긴 하니 모든 건 추정일 뿐이다.

3. 동일인물설

(七年) 夏四月 百濟王遣斯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 故謹遣斯我 奉事於朝 遂有子 曰法師君 是倭君之先也
(7년, 505) 여름 4월 백제왕이 사아군(斯我君)[2]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조(調)를 바친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국주(百濟國主)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법사군(法師君)이라 하였는데 곧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선조이다.
일본서기》 권16 부레쓰 덴노#
무령왕 대에 사신으로 파견된 왕족인 부여사아가 순타태자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사아는 《일본서기》에서, 순타태자는 《속일본기》에서 니이가사의 조상으로 나온다.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왜국(야마토)의 국왕, 즉 후의 천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키미'는 반드시 군주의 의미로만 쓰인 건 아니고 존칭으로도 쓰였다. 예를 들어 《겐지모노가타리》의 겐지노 키미(원씨군, 源氏君)라는 칭호가 나오며, 사아군(斯我君)의 경우도 왕족인 부여사아를 존칭으로 부른 것이다. 법사군(法師君)의 경우는 출가를 해서 법사라 불린 건지 불교 지식에 해박해서 존칭으로 법사라 불린 건지 아니면 아예 본명이 불교식에서 따와 법사였던 건지 알 수 없다. 현대 한국어로는 '법사님' 정도의 존칭이 된다.

게다가 천황의 경우는 그냥 키미가 아니라 아예 '오오키미(대왕, 大王/대군, 大君)'라는 고유 호칭으로 불렸다. 즉 야마토노 키미(倭君)는 야마토씨를 존칭으로 부른 건데 여기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가리킨다. 니이가사의 이전 성씨가 '야마토(화, 和)씨'였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인 '倭(왜)'와 '和(화)'가 다른 것은 아직 정형화된 표기가 정착하기 전인 고대에는 훈독이 같으면 대충 혼용되어 쓰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3.1. 반박

순타태자가 505년 일본에 파견된 왕족인 사아군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사아군이 곧 순타태자라면 처음부터 태자라고 표기할 일이지 굳이 골족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아와 순타라는 이름 사이에는 유사점이 전혀 없다. 야마토노키미(倭君)가 야마토노후히토(和史)와 같은 성씨라는 것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대 일본에서 키미(君)와 후히토(史)는 격이 매우 다른 가바네였다. 키미는 매우 높은 등급으로 황족 다음 가는 위상이었다면 후히토는 하급 관인층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4. 여담

순타(純陀/淳陀)는 석가모니에게 버섯을 공양한 인물의 이름이었다. 독버섯인 줄도 모르고 석가모니에게 공양해서 석가의 병을 더 악화시켰다. 따라서 순타는 법왕 부여선의 사례처럼 불교식 시호일 가능성이 높다.

송산리 29호분의 피장자가 순타태자라는 설이 있다.#

5. 참고문헌



[1] 율리우스력 10월 11일, 음력 8월 26일[2] 훈은 '시가 키시'. '키시'는 건길지와 관련있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