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辭要王신라 초의 인물. 유리 이사금의 장인으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등장한다.
2. 생애
삼국유사 왕력편에 의하면 사요왕은 유리 이사금의 장인으로, 딸 김씨(金氏)는 유리왕과 혼인했다고 한다. 대체로 갈문왕의 일원이었는데 이름이 생략된 것으로 여겨진다.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이 사요왕이 아닌 일지 갈문왕[1]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나와서 사요왕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주석으로 왕비의 성이 박씨이며 허루왕(許婁王)의 딸과 혼인했다는 이설을 실었다. 그런데 허루 갈문왕은 파사 이사금 즉위조 기사에서 파사 이사금의 왕비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의 아버지-즉 김씨-로 등장해서 기록이 중구난방이다.
고고학적으로 가면 상황이 더 꼬인다. 파사 이사금의 장인이라는 허루 갈문왕은 사서에 따르면 한기부 출신인데, 한기부는 김씨 족단의 최초 근거지로 4세기 초반 충주 금릉동에서 마한 거수국인 ??국의 지배층이었다 백제에게 멸망당한 뒤 사로국에 도망쳐서 세운 부이기 때문에 사로국에서 박씨 족단이 출몰하는 시기가 4세기 초반에서 올라가지 않는다. 또한 사서에서 유리 이사금의 아들로 나오는 파사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의 고고학적 활동 연대는 4세기 초반~중반 정도로 동시대에 활동한 대신 파사 이사금-지마 이사금의 가계가 한기부 김씨와 대대로 겹사돈했다는 사서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을 높인다. 따라서 허루 갈문왕은 김씨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유리 이사금의 활동 연대는 3세기 중후반에서 더 내려가지 않고, 1대 차이라기에는 너무 활동 연대의 차이가 큰 데다, 유리 이사금의 부인 기록이 중구난방인 점과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 기록이 엉망이라는 점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파사와 일성이 친형제라는 사서의 기록을 신용하지 않는다.[2]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하면 유리의 부인으로는 일지 갈문왕의 딸, 허루 갈문왕의 딸 박씨, 사요왕의 딸 김씨로 셋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지 갈문왕은 사서 기록을 보면 박씨가 확실하고, 초기 신라 사회를 보면 유리 이사금-유례 이사금, 탈해 이사금-첨해 이사금-흘해 이사금, 파사 이사금-실성 마립간[3]처럼 이름이 유사하거나 성이 달라도 동명이인으로 추정되는 사례가 꽤 있기 때문에[4] 허루왕 박씨와 허루왕 김씨가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으나, 문제는 사요왕의 딸 김씨가 유리와 혼인한다는 건 연대상 불가능에 가깝다. 일지 갈문왕도 4세기 인물인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로도 전해짐을 고려하면 유리보다는 후대 인물로 추정되므로,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사요는 후대에서 박씨를 김씨로 오기하지 않는 한 가능성이 가장 떨어진다.
초기 박씨 왕들을 보면 유독 세대 누락이 잦은 게 확인되는데, 혁거세 거서간은 2세기 중~후반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고, 석씨 족단과 관련된 기록이 많은 남해 차차웅-유리 이사금 부자는 석씨와의 겹사돈이 강조되는 대신 석씨 족단의 대대적인 출몰 시기가 3세기 중반에 가깝고 혁거세 거서간의 60년이라는 재위기간이 누가 봐도 비정상이라는 점, 내례부인 박씨에 대한 기록 때문에[5] 남해 차차웅은 혁거세 거서간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가 더 유력해 보인다.[6] 같은 이유로 유리의 아들이라 기록된 파사 이사금과 일성 이사금도 연대 차이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더 먼 후손이었을 것이다.
즉 유리의 부인에 대한 전승이 3가지인 것은 어머니가 따로 있는 파사와 일성을 친형제로 묶는 과정에서 각자의 전승이 뒤섞였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유리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파사의 어머니'와 '일성의 어머니', 그리고 부인(?)으로 추정되는 3명이 된다. 파사는 유리의 차남 또는 유리의 동생 나로의 아들이라 전해지고, 일성은 유리의 장남, 일지 갈문왕의 아들, 지마의 아들로 설이 갈린다. 고고학적인 활동 연대를 고려하면 일성이 지마의 아들이라 보기는 힘들며, 일성이 갈문왕으로 추봉했다는 파사의 손자 박아도 또한 손자인 박제상의 나이(360~370년대생)를 고려하면 아도의 아들도 가능성이 떨어진다. 사서의 기록을 보아 일성이 어떤 식으로든 지마와 연이 있던 건 맞는 듯하나 일성과 지마가 사돈지간이었다는 기록[7]과 지마와 일성의 고고학적 활동 연대가 거의 겹침을 고려하면 둘의 나이는 가까운 편이었을 것이다.
파사-지마, 일성-아달라의 부인을 통해 추정해보면, 파사-지마 부자는 한기부 김씨가 성립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당시 한기부 갈문왕의 딸과 대대로 혼인하며 한기부 김씨와 유착하는 양상을 보인다.[8] 반면에 일성-아달라 부자의 부인은 모두 박씨 왕의 딸이며, 박씨와의 연관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고학적 연대와 사서의 배치를 보아 파사가 일성보다 연상임이 유력한데, 일지 갈문왕은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 또는 '외조부'이며, 김씨 족단이 사로국에 출몰한 시기를 감안하면 파사의 어머니가 김씨임은 힘들어 보인다. 또 한기부의 족장을 보면 파사 이사금 시절 금관국의 건국자인 '늙은 수로왕'에게 결례를 저질렀다 분노한 수로왕에게 살해당한 보제,[9] 파사의 장인 허루 갈문왕, 지마의 장인 마제 갈문왕으로 제법 빡빡하다. 구도 갈문왕이 아달라 이사금의 대(4세기 중반)에 파진찬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서술과 훗날 아들인 미추가 왕이 된 뒤에(4세기 중반) 갈문왕으로 추봉했다는 서술, 석씨 왕 시절[10] 장군으로 활동하다 백제에게 패전해서 부곡성(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에 좌천당하는 등 제법 다사다난했음을 고려하면 사요 갈문왕이 구도의 선대 탁부 김씨 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놓고 봤을 때, 파사의 어머니는 박씨가 거의 확실하며 일성은 어머니가 박씨일 수도 있고 김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서를 보면 후기 김씨 왕조의 일원이 박씨로 성을 바꿔 쓰거나 박씨와 김씨의 전승이 혼동되어 전해지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나기 때문에[11] 허루 갈문왕 박씨와 김씨가 동명이인이 아니라, 후대에 파사의 장인 허루 갈문왕 박씨가 혼동되었을 여지도 있다. 만약 허루 갈문왕 박씨가 후대에 오인된 것이라면 유리의 부인의 가문 내력은 오리무중이 된다. 사실 혁거세 거서간의 처 알영부인과 남해 차차웅의 처 운제부인도 사서에서 가계를 일체 알 수 없고, 운제부인이 경주 이씨라는 것도 조선시대 족보에서야 나타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짐을 고려하면 3세기 인물인 유리의 부인이 가계가 제대로 안 남은 건 그리 이상한 게 아니다. 석씨 왕조의 경우 사로국에 막 정착했을 때 박씨 왕조와 잠깐 통혼한 걸 빼면 수세대 동안 동성 근친혼만을 반복했고, 4세기 들어 골정계에서 김씨나 박씨 등이 조금 나타나긴 하나 이매계처럼 동성 근친혼을 고수한 일파도 있었음을 고려하면 석씨 왕조의 전승이 유독 구체적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 수도 있다.
3. 기록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남해(南解)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원주1]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1] 일성 이사금 즉위조에 일설로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가 일지 갈문왕이라는 기록이 실려있다.[2] 파사의 활동 연대가 일성보다 앞이기 때문에 일성은 파사의 친형이 아니라 형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종형제로 추정된다. 소지 마립간-지증왕처럼 선대와 후대의 나이 차이가 뒤집히는 경우는 종종 있다. 실제로 파사는 유리의 차남 또는 '유리의 동생 나로'의 아들이라 전해진다.[3] 당대 신라 금석문을 보면 파(巴)=보(寶/保)를 이표기로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실(實)을 보(寶)라는 글자로 바꾸면 보성=파성이 되어 파사와 유사해진다. 일본서기에서 실성이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걸 파사 이사금이 보냈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제기된 가설이다.[4] 신라에서 성씨를 사용한 것은 진흥왕 대부터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성씨 자체가 없었고 단순한 동명이인이었을 것이다. 진흥왕 이전은 후대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구전을 통해 성씨를 소급 적용한 것이다.[5] 이매의 처 내례부인과 아달라 이사금의 처 내례부인은 1세기에 가까운 시대 차이가 나서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 둘 다 족보상으로는 혁거세의 5대손이기 때문에 박씨 왕조의 기년 인상의 기준으로 사용한 듯하다.[6] 사서에 따르면 아달라의 처 내례부인(혁거세-남해-유리-파사-지마-내례부인)과 이매(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이매)는 모두 혁거세의 5대손이다. 탈해 이사금을 김알지처럼 석씨 족단의 시조이기는 하나 실제로 아효부인과 혼인한 걸 벌휴라 가정할 경우 혁거세-???-???-남해-유리-내례부인)로 5대손이 된다. 전근대에는 1세대가 약 20년 차이가 났으므로 혁거세의 60년 재위기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7] 일성의 아들로만 전해지는 아달라 이사금의 처 내례부인 박씨는 지마의 딸이다.[8] 구도-미추-내물로 이어지는 김씨 왕조는 구도의 아내인 이칠 갈문왕의 딸 술례부인 박씨를 통해 탁부에 속했기 때문에 성만 같지 소속이 달랐다.[9] 파사 23년이라고 하는데 수로왕의 연대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초기에 있던 일이었을 듯하다. 유리와 파사 사이의 세대를 삭제하는 과정에서 파사의 선대의 일이 덧붙여졌을 수도 있다.[10] 벌휴 이사금 시절이라 나오는데 실제 기년을 고려하면 벌휴는 아니다. 그냥 4세기 석씨 왕이라 봐야 할 듯하다.[11] 박제상/김제상, 박이차돈/김이차돈/석이차돈. 제상은 박씨가, 이차돈은 석씨의 선대 전승이 구체적이기 때문에 대체로 박제상과 석이차돈으로 보고 있다. 단 법흥왕 시대까지도 신라에서는 성씨를 안 써서 해당 명칭들은 모두 후대에서 소급 적용한 것이라 당대에는 그냥 제상과 이차돈이었다.[원주1] 혹은 말하기를 왕비의 성은 박(朴)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원주2] 弩라고도 한다[원주3] 아버지는 남해(南解)이고, 어머니는 운제(雲帝)이다. 왕비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인 김(金)씨이다. 갑신(甲申)년에 즉위하여 33년을 다스렸다. 니질금(尼叱今)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