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3년
1. 개요
후한 말기의 관리.2. 생애
《후한서》 <효령제기>에 따르면 진국(陳國)의 국상(國相)이었으나, 유총을 모함했다가 하옥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3년에 사천은 위음이 유총과 함께 하늘의 제사를 지내면서 좋지 않은 소원을 빌어 도리에 어긋나는 죄를 저질렀다고 상주했는데, 이 당시 영제는 왕보의 모함으로 유회가 반역을 꾀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처첩, 자녀, 기녀 등을 모두 옥사하고 휘하의 관리들을 모조리 주살한 직후라 처벌을 내리는 것을 주저해 왕보를 시켜 취조하게 했다.
위음은 오방제의 황로군에게 장수의 복을 빌었을 뿐이라 해명했고, 이미 초왕 유영이 제사를 올린 전례도 있었지만 왕보는 위음의 직분은 왕을 바로잡아 고치는데 있는데 바로잡지 못했으며, 사천은 왕을 무고했다고 상주하면서 사천은 위음과 함께 주살되었다.
《후한서》에는 패국(沛國)의 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현의 주석에서 진경왕전과 동관한기를 인용해 사천이 패국의 상이 아닌 진국의 상임을 정정했다.
3. 기타
이후 진국의 국상에 오른 인물로 낙준이 알려져 있지만 사천이 사망한 뒤 바로 임명되었는지는 불명이다. 허정의 동생인 허창이 진국상을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상식적으로 낙준 혼자 임기를 초월하여 20년 넘게 국상을 맡았을 리도 없으니 허창이 예주자사 공주에게 의탁하자 그의 후임으로 진국상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진국의 상 사천을 죽일 때 진국의 국왕이 유총인 점을 미뤄보면, 유총은 적어도 173년 이전에 아버지 진효왕 유승으로부터 봉국을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