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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05:01:58

사택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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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조 대좌평* 사택지적 | 사택천복
* [ruby(대좌평, ruby=大佐平)]은 일반적으로 [ruby(상좌평, ruby=上佐平)]과 동일한 직위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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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 대좌평
사택천복 | 砂宅千福
<colbgcolor=#00A6A9> 직위 대좌평(大佐平)
성씨 사택(砂宅)
이름 천복(千福)[1] / 정복(貞福)[2]
생몰연도 미상

1. 개요2. 기록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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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인물. 의자왕 시기 대좌평(大佐平)[3]을 역임했다.

2. 기록

『삼국사기』 무열왕 7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660년 7월 13일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대좌평이었던 사택천복은 부여융 등과 함께 사비성을 나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버티던 의자왕도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고(...) 9월 3일 의자왕 및 왕자들, 대신과 장수들, 백성 등 총 12,807명이 사비를 떠나 으로 돌아가는 당나라 군대를 따라 낙양으로 갈 때 사택천복도 함께 끌려갔다.

일본서기』 제명 5년 7월조의 세주에 인용된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에는 11월 1일에 소정방 등에게 잡힌 의자왕, 태자 융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과 국변성(國辨成)[4]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정에 바쳤는데, 천자가 은칙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풀려난 이후 그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3. 기타



[1] 삼국사기[2] 삼국유사[3] 상좌평과 동일한 직위로 추측되나 확실치는 않다.[4] 동시대의 인물로 사택천복과 마찬가지로 대성팔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