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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1-05 19:18:39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영향


1. 개관2. 상세
2.1. 안전 평가 실시2.2. 사회에 미친 영향2.3. 건축계에 미친 영향2.4.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2.5. 의학에 미친 영향

1.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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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1일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을 찾은 김영삼 대통령.
그 왼쪽에는 이인제 경기도지사와 김덕룡 민주자유당 국회의원[1] 이 있고,
오른쪽에 노란 모자를 쓴 사람은 조순 서울특별시장이 있다.[2]

사고 후 김영삼 정부는 붕괴 장소를 사상 최초로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으며,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김영삼 정권시대의 정점을 찍은 사고다.

물론, 김영삼 때 지어진 건물이 아니니 그에게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볼 수도 있으며 실제로 성수대교 붕괴사고 때 YS가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지원 의원이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라고 응수하면서 한 큐에 침묵시켜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성수대교는 부실공사 그 자체로 사고가 터진 것과 달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부실공사와 이후 운영주체의 마개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므로 일방적으로 건설 시기만을 탓할 수는 없다. 어쨌든 문민정부의 연이은 사고의 피날레는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로 장렬하게 마감을 해주셨다.

이 때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은 "언제까지 당해야 하나"였다. 해당 사진

전 세계가 고층 건물의 설계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설계부터 확실하게 하자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후로 터진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함께 20세기 말 가장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안전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 사고라 할 수 있다. 대중이 부실공사를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짓'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을 죽이는 짓임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사고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부실 공사의 근본 원인이 공사비 착복과 해당 공무원들의 비리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나름대로 비리 척결에 한 몫 했다.

사고 발생 이후 한국의 건축기술에 대한 불신이 높아져서 해외공사 수주율이 뚝 떨어졌지만[3] 그 뒤 공짜나 다름없이 지어주면서 위기를 넘긴 다음 다시 회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해외의 공대생 혹은 건축과 학생들 앞에서 한국인이 한국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면 어김없이 그들 입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떡밥으로 튀어나와 데꿀멍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서 해외에서 잊혀질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게 이 사건은 21세기에서도 심심하면 최악의 참사를 꼽을 때 순위권 안에 들어가는 사건이고 디스커버리 채널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즉, 앞으로도 심심하면 관련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영될 만큼 비중이 큰 사건이다. 이러한 두 사건 때문에 나라망신을 제대로 당한데다가 애꿎은 다른 건설회사까지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2. 상세

2.1. 안전 평가 실시

붕괴 사고 이후 삼풍이 지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충격과 공포였다.

이로 인해 당산철교를 비롯한 여러 구조물이 철거된 다음 다시 지어졌다.[4] 특히 당산철교의 경우 제2의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엉망진창 상황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최일구 앵커의 기자 시절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걸 고발해낸 것.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건물이 조금만 오래 되어도 철거하고 다시 짓는, 그것도 2~30년 주기로 빨리 재건축하는 관행 역시 이 사건으로 부채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기후적 요인으로 인해 한국에서 건축물이 다른 선진국과 동급으로 100년 이상 버틸 순 없겠지만 말이다.

2.2. 사회에 미친 영향

사고 이후 일반 국민들과 재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백화점 및 대형건물 기피현상'이 만연해졌고, 화투판에선 풍 3개면 패도 못 돌리고 죽는 '삼풍 고스톱'이 유행했다.

2.3. 건축계에 미친 영향

삼풍백화점은 이른바 무량판 구조로 지어졌다. 이것은 기둥과 바닥 사이에 보가 없이 바닥이 기둥에 직접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실내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하중과 바닥 구조체의 무게가 기둥으로 직접 전달되는 방식이다. 삼풍 백화점의 붕괴 사고 원인은 무량판 구조 그 자체가 아니라 각종 착복과 비리를 위한 무리한 설계변경삥땅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량판 구조 자체는 제대로만 설계한다면 별 문제가 없기에 해외에서는 아직까지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2005년에 제작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삼풍 백화점, 예고된 붕괴' 에 출연했던 미국 구조 전문가는 "오히려 삼풍백화점 건물이 무량판 구조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무리한 설계변경에다 설계 하중의 4배가 넘는 무게를 올려놓는 등의 각종 뻘짓에도 불구하고 5년이나 넘게 버틸 수가 있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국내 건설업계에서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의 무량판 구조는 일종의 금기가 되면서 건축주나 설계자가 꺼리게 되었다. 상술했듯 삼풍의 부실시공은 건축의 "ㄱ자"도 모르는 이준 회장이 멋대로 설계에 간섭하여 발생한 일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미친놈 하나가 어설프게 대충 구현하고 사고친 것 때문에 멀쩡한 건축공법까지 억울하게 몰매를 맞은 격이다. 삼풍백화점 사고 이후 시간이 흐른 뒤로는 다시 절찬리에 운용중이며, 기둥에 주두나 지판은 물론 철근 정착까지 해당 사항이 구조기준에 명시되어 있고 2방향 슬래브 전단강도 산출 공식도 도입되어 뚫림전단 파괴를 방지하고 있다.

그리고 삼풍백화점 이전까지 국내에서는 모든 건축물은 부재를 탄성상태로 보는 허용응력 설계법(WSD)으로 설계했으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이후 콘크리트 건축물은 극한강도 설계법이나 한계상태 설계법으로 설계한다. 삼풍백화점이 부재의 역학적 해석방식까지 바꿔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극한강도 설계법(USD)과 한계상태 설계법(LSD)이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사고 당시 기준으로도 40~50여년 전부터 였다.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70~80년대 부터 이미 구조기준에 해당 설계법을 도입한 상태였다.[5] 우리나라의 콘크리트 구조기준은 2000년 전후로 그간 논의를 거쳐 극한강도 설계법을 전면 도입하고, 균열이나 처짐 등에 한정하여 허용응력 설계법을 운용하고 있다. 한계상태 설계법의 경우 도로교 설계기준에 도입되었는데 2015년 개정 기준으로 그 전에는 재량적으로 도입하였다가 그 후부터 기준에 전면도입 되었다. 한계상태 설계법은 차치하더라도, 극한강도 설계법 도입에 삼풍백화점 사고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사고 발생 후 해외의 건축물 발파 해체 공법 종사자들이 다 몰려와서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을 보고 발파 공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전해진 것은 오직 건축공법 뿐이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 안전불감증으로 시공불량에 의한 대형 안전사고는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 때 마다 담당자들과 관련 기관들의 부실하고 허술한 대처가 그 사고의 피해를 키우는 패턴은 다시 터졌다.

2.4. 소방 방재에 미친 영향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까지는 이런 대규모 재난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사태가 발생하자 경찰, 소방서, 군,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달려오긴 했으나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구조활동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주한미군이 도우러 와서 지휘본부가 어디냐고 물어도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구조활동은 말그대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다가 며칠 후에서야 청와대에 의해 소방본부가 중심이 되어 현장지휘본부를 꾸렸다.

그 당시 달려온 소방대원들은 열심히 구조활동을 펼쳤으나, 이런 대규모 재난사태에 대한 대처메뉴얼이나 구조에 관한 의학지식이 없어서. 구조자들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현장에서 죽어가기도 했다.

경상자들을 바로 옆이나 근처의 병원 응급실로 바로 보내서, 막상 중상자들을 치료하러 먼 병원 응급실로 보내는 중에 사망하거나, 붕괴된 잔해에 깔린 구조자를 위해 무턱대고 잔해를 치워보니 쇼크로 구조자들이 사망... 잔해를 무턱대고 치우면 쇼크로 구조자들이 사망한다는 내용이 일선소방관들에게 전해지고, 구조방법을 바꿔보라는 방침이 전파. 이번에는 잔해를 살짝 들어올리고 구조자들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구조방법을 바꿔보니 잔해에 깔려있던 구조자들의 다리나, 팔 부분이 그 과정에서 절단당하고. 먼 거리의 응급실까지 가는 도중에 과다출혈로 사망...

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중앙119구조본부가 창설되어 국가적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고, 이 때의 구조활동에서 얻은 노하우도 이후의 크고 작은 구조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사람들은 소방서라고 하면 화재시 불 꺼주는 곳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 사태 이후로는 유압식/전동식 장비들이 적극 활용되면서 사람을 구조해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제대로 생겼다. 이후 이 노하우들을 가진 119구조본부는 해외의 대규모 재난(지진 등) 발생시 현장에 파견되어 활동하는 등, 국제적인 구조 활동도 돕고 있다.

또한 당시 119구급대로 활동하는 구급으로 채용된 소방공무원이 있었지만 간호조무사나 군 의무병 전역자를 특별채용 하는 등 소방공무원의 의학적 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였다. 제대로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도 없었고 구출이후 사진을 보면 경추고정대나 척추보호장비 없이 단순히 사람이 직접 들어 옮기거나 들것에만 옮겨지고 있는 사진만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의학계에서 응급의료체계가 대두되면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의 응급의료기금을 통해 119구급대에도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 자동심장충격기 등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기 시작한다.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되면서 인력도 간호사, 응급구조사를 채용하게 되었다.

2.5. 의학에 미친 영향

아이러니하게도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항상성 보존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과정' 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저런 '굶어 죽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만큼 극심한 기근을 겪는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한지라(아프리카 내전국들처럼)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어렵고, 반대로 안정적인 모니터링이 쉬운 국가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안정적인지라 저런 극심한 기아가 일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관찰이 어려웠는데 이 사건이 발생함으로 인해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사례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의 아이러니와 맥락이 닿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11일만에 발견된 최명석씨는 구조 후 갑작스런 과다한 영양섭취로 인해서 간에 손상을 입고 자신보다 나중에 구조된 유지환, 박승현 씨보다 더 오랜 기간 병원 생활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전에 지하 갱도 붕괴나 기타 여러가지 사유에 의해서 장기간 기아 상태의 환자가 갑작스런 영양소 과다 섭취에 대한 신체반응에 대한 국내의 연구나 임상이 전무해서 벌어진 일화.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먹을걸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본 상식이었다. 단지 이게 오직 경험에 근거한 지식이었던 관계로 과학적으로 왜 그런건지는 검증된 적이 없다 보니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압좌 증후군(Crush syndrome)이 재조명 받기도 했다.[6]

또한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재난 시 부상자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응급 의료체계의 개편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붕괴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은 경상자와 중상자의 분류 없이 사고 현장과 가까운 대형 종합병원인 강남성모병원(현재의 서울성모병원)과 영동세브란스병원(현재의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했다.
하지만 사고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예상보다 너무 많은 환자가 몰린 덕분에 두 병원은 큰 혼란을 겪었다. 두 병원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형 병원이라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경상자들이 몰리는 바람에 이를 모두 해결하지 못했고 때문에 중상자 응급처치, 수술이 늦어지거나 일단 두 병원으로 이송했다가 다른 병원으로 재이송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95년에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년뒤 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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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S의 분신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삼풍백화점이 지역구(서초구 을)에 위치해있었다.[2] 이인제와 조순의 경우 사고 발생 당일에는 당선인 신분이었다가 저 사진을 찍은 날 각각 경기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으로 취임했다.[3] 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스팡에 신공항을 지었던 당시 한국 기업들은 거부당했었는데, 이러한 부실공사 관행으로 말레이시아측에서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4] 근데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전두환 정부이다. 5공 때 잘못 지어진 게 대부분이기 때문. 물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러한 위험을 인식 후 대대적인 수리를 했었더라면 이런 일들은 없었겠지만. 근데 다 뜯어버리고 다시 지은 건 잘한 거긴 하다. 5공이었다면 그냥 내팽개치고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이랬을 테니까(…).[5] 미국의 경우 1956년에 강도설계법을 부록 기재, 1963년에 허용응력 설계법과 같이 본문에 기재, 1971년 허용응력 설계법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본문에 강도설계법을 기재하였다. 부록 기재부터 치면 까마득하게 늦게 도입된 셈이다.[6] 압좌 증후군이란? 무거운 잔해에 짓눌려 있는 동안 조직이 괴사해 독성물질을 품고 있다가 구조된 후 그것이 혈액을 타고 온몸에 퍼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