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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âlons-en-Champagne}}} 샬롱앙샹파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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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
<colbgcolor=#2b5df2><colcolor=#fcef3c> 국가 | 프랑스 | ||||
행정단위 | 코뮌 | ||||
레지옹 | 그랑테스트 | ||||
데파르트망 | 마른 | ||||
아롱디스망 | 샬롱앙샹파뉴 | ||||
INSEE 코드 | 24322 | ||||
인문지리 | |||||
시장 | Benoist Apparu | ||||
면적 | 26.05㎢ | ||||
인구 | 43,218명(2022년) | ||||
인구밀도 | 1,700명/㎢ |
1. 개요
프랑스 북부의 도시. 마른의 주도이다. 이전에는 샬롱쉬르마른이었지만 1995년에 공식적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 역사
샬롱앙샹파뉴는 마른강과 접하고 있는데 이 강은 센강과 연결되어있어서 파리로 나무와 곡물, 와인, 샴페인을 운반하였다. 중세 시대 내내 샬롱앙샹파뉴 주변은 포도나무가 있었으며 와인과 샴페인을 팔아 쌓은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았다.샬롱앙샹파뉴는 신석기 시대 때 부터 사람이 살았지만 마른강의 여러 지류가 만나는 지점이자 리옹에서 불로뉴로 이어지는 도로가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서 로마의 요새가 있었다. 그래서 서기 451년 훈족의 아틸라가 로마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결전을 벌인 카탈라우눔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서 훈족의 갈리아 침공이 종식되었다.
11세기 도시는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였으며 샬롱의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 시토회와 성전기사단을 설립해 지적 개화와 경제적 개화를 동시에 발전시켰다. 이는 샹파뉴 백작령의 상속녀인 호아나 1세가 공정왕 필리프와 결혼하면서 샹파뉴가 프랑스 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샬롱 주교는 자신의 권리를 잃지 않았다. 중세 시기 샬롱앙샹파뉴는 15개의 교회, 2개의 수도원, 4개의 수녀원, 7개의 병원이 위치한 대도시로 샬롱의 직물은 전유럽에 널리 알려진 직물이 되엇다.
16세기 위그노 전쟁이 벌어지자 샬롱앙샹파뉴는 구교와 신교 세력에 의해 약탈당했다. 하지만 줄을 잘 사서 샬롱 주교는 나중에 프랑스의 왕이 되는 앙리 4세를 지지하였고 나중에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자 왕실 법원과 조폐국을 설치하는 등 샬롱앙샹파뉴에 사는 부르주아들에게 보답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샬롱 주교의 세속적 권한을 약화시켜 권력이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경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은 샬롱앙샹파뉴를 점령한 다음 3,000만 프랑의 벌금을 내지 않으면 도시를 파괴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이 금액은 샬롱 주교인 조제프 티시에의 개입으로 50만 프랑으로 줄어들었고, 도시는 파괴되지 않았다.[1] 1940년 5월 11일부터 6월 10일까지 독일의 프랑스 침공 중 루프트바페가 도심을 정기적으로 폭격하여 민간인 25명과 프랑스군 24명이 사망 하고 건물 100채가 파괴되었다. 또한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이 마른강을 건너 트루아와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의 철도 노선이 있는 샬롱앙샹파뉴를 점령하려고 했다. 프랑스군은 마른강의 다리를 폭파시키면서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독일군은 치열한 시가전 끝에 1940년 6월 15일 샬롱앙샹파뉴를 점령하였다. 이 도시는 1944년 8월 29일 미군의 조지 패튼 장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3. 랜드마크
- 생테티엔 대성당 (Cathédralle Saint-Étien de Châlons) : 샬롱 주교의 본거지로 1147년 10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봉헌되었다.
- 무르믈롱 군사 기지 (Camp de Mourmelon) : 나폴레옹 3세시절 만들어진 약 10,000ha 규모의 군사 기지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출발한 곳이기도 하다. 이 기지는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
- 생트 크루아 문 (Porte Sainte-Croix) : 샬롱앙샹파뉴로 들어가는 문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위해 지나간 문이라서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헌정되기도 했다.
- 생 알팽 교회 (Église Saint-Alpin) : 샬롱의 주교였던 생 알팽에게 헌정된 고딕 양식의 교회
- 샬롱앙샹파뉴 국립묘지 (Nécropole nationale de Châlons-en-Champagne)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프랑스군이 묻힌 무덤.
[1] 독일군의 점령 기간 동안 샬롱앙샹파뉴에 위치한 샴페인하우스의 샴페인이 5만병 이상 약탈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