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이천 서씨[2] |
출생 | 1920년 10월 5일 |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3] | |
사망 | 1977년 11월 1일 (향년 57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76-3번지 자택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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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서창석은 둘째 작은아버지이고, 서태석은 8촌 삼종형(三從兄)이다.
2. 생애
1920년 10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現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서 아버지 서광수(徐光洙, 1902. 8. 26 ~ 1961. 5. 28)[4]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옥례(金玉禮, 1900. 8. 8 ~ 1968. 9. 20)[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40년대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었으나, 이후 탈영해 1944년 7월 5일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1944년 10월 안휘성에서 광복군 훈련반인 한광반(韓光班) 제1기를 수료한 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기간요원으로 활동했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대 대원 및 부대장으로 전보되어 임시정부 고위 간부들의 경호담당으로 활약했고, 1945년 1월부터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처 및 참모처 등지에서 근무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1948년 1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2조사부 조사관에 임명되어 산업 및 경제 방면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사를 담당했다. 1949년 1월 25일에는 특수경찰대원들을 지휘해 악명높은 친일 경찰 노덕술의 가택을 수사하고 노덕술을 경호하던 정복 경관 4명을 수감하기도 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1977년 11월 1일 새벽 4시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76-3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기독교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