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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1:59:02

서지 랭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서지 랭
Serge La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rge_Lang.jpg
출생 1927년 5월 19일
프랑스 일드프랑스 파리
사망 2005년 9월 12일 (향년 78세)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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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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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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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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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수학자, 교수
현직 예일 대학교 (수학과 / 명예교수) (2004~2005년)
학력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물리학 / 학사) (1946년)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 / 박사) (1951년)
지도교수 에밀 아르틴 (Emil Artin)
지도학생 김민형
경력 예일 대학교 (수학과 / 종신교수) (1972~2004년)
컬럼비아 대학교 (수학과 / 교수) (1955~1971년)
시카고 대학교 (강사 / 1953~1955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방문교수 / 1951~1953년)
프린스턴 대학교 (강사 / 1951~1953년)

1. 개요2. 저서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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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지 랭(Serge Lang) 은 프랑스계 미국인 수학자로,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부터 대학원 레벨 정도의 수학까지 모두 다룬 저서들로 유명하다. 그는 어렸을 때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다. 이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진학하여 1946년에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프린스턴 대학교의 에밀 아르틴(Emil Artin) 교수 밑에서 대수적 폐체[1] 관련 논문으로 1951년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

그 이후에는 시카고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예일 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2. 저서


이외에도 다방면의 정말 많은 책을 집필하였다.

3. 여담

대수학 강의실에 돌을 던지면 서지 랭 대수학 교재로 공부하는 학생이 맞는다는 농담이 있기도 하다.

사진의 노란 책은 그가 집필한 대학원 수준 추상대수 교과서인데, 이후의 대학원 대수학 교과서에 영향을 미쳐 대수학 교수법을 바꿔놓았다는 호평과 함께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혹평을 동시에 듣는 책이다.

대수학이 전공이지만 찾아보면 온갖 잡다한 교과서를 썼다. 그의 저서들만 가지고 대학원 석사 정도까지 공부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설에 의하면 방학 동안에 저서 한 권씩을 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루딘 교수와 함께 3종 세트 메이커로 악명이 높다.

옥스퍼드 대학교 수학과 석좌교수인 김민형 교수의 예일대 박사학위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김민형 교수는 2022년 저서 <수학의 기쁨 혹은 가능성>에서 랭의 기질과 성격을 떠올리며 지칠 줄 모르는 사회정의의 전사였다고 평했다. 표정은 날카로웠지만 깔깔 웃음을 터뜨리는 인물이었으나, 싸움닭 기질이 있었는지 자신처럼 털털한 인사에게는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는 일도 흔했다고.'문명충돌론'으로 유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P. 헌팅턴이 美 국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 후보로 지명되자 헌팅턴의 업적을 "과학으로 위장한 정치적 의견"이라고 주장하며 반대운동을 펼쳐 무산시켰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니콜라 부르바키 활동 시절부터 프랑스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 문제에도 평생 관심을 가진 듯.

흑역사로 에이즈 음모론을 주장했다. 즉 에이즈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

또한 부르바키 멤버들 중 타니야마-시무라 추측의 아이디어를 도둑질하고 그걸 거들었다는 혐의로 앙드레 베유장피에르 세르를 무려 미국수학회 매체를 통해 공개 저격하여 수학계를 뒤집어놓기도 했다. 궁금한 사람들은 "Some History of Shimura-Taniyama Conjecture"라는 제목의 미국수학회 문건을 검색해볼 것. 여기 연루된 인사들이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 거물들인데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증명에 쓰인 핵심 실마리였다는 점에서 임팩트가 있는 이슈였다. 시무라 고로는 자신이 베유에게 도움을 받은 바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랭이 이를 근거로 베유와 세르를 저격했지만, 사실 수학자(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학자들도 모두)들이 사석에서 연구 주제 갖고 토론하다가 서로 이것저것 아무말을 주고받은 것이 훗날 연구성과에 대한 공로를 누가 가져가냐는 문제로 번져 서로 빈정상하는 일이 많기는 했다.[3] 그리고 사실 베유나 세르는 니콜라 부르바키 같은 공동 필명을 써먹을 정도로 명제에 붙는 이름 따위엔 별 관심이 없던 (사실은 원래부터 자기 이름으로 내걸린 업적이 많고 많았던) 위인들이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런 현상을 두고 영미권에선 시무라와 타니야마의 공로를 강조하는 반면 불어권에서는 추측을 뜨거운 감자로 끌어올린 베유의 공로를 강조하는 편가르기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이런 논란을 의식했는지 이후 수학계에서는 리처드 테일러 등의 여러 연구자들이 증명을 완료한 후에는 명제의 이름을 특정 수학자의 이름으로 부르기보다는 모듈러성 정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석궁 테러로 유명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에 대해 김명호 교수의 대학 본고사 답안 오류 주장[4]에 문제가 없음을 지적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사망 며칠 전까지 연구실에 나왔다고 한다.


[1] 복소수체와 같이 해당 체 위의 다항방정식이 항상 해당 체 내에서 해를 갖는 체.[2] https://pma.caltech.edu/documents/2624/1996_-_Serge_Lang_typo_in_date_on_pamphlet.pdf[3] 로피탈의 정리 같은 사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이다. 적어도 베유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분을 주장한 적이 없으며(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진짜 피타고라스가 증명했겠냐 증명자 이름 따위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한거다 하는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오히려 시무라와 타니야마의 논문을 핫이슈로 부각시킨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하기 때문. 다만 학자들끼리의 사적 대화에서 어떠한 썰을 주고받았다는 루머가 세르에 의해 침소봉대된 것, 그리고 그것이 희대의 싸움닭인 랭의 귀에 들어가 랭이 괜히 싸움을 붙이려 든 것이 문제였다. 시무라가 베유의 사망 당시 추도사를 남긴 예를 보면 젊은 시절부터 자주 교류한 노학자를 이간질할만큼 큰 앙금으로 남지는 않은 듯 하나, 이 일은 젊은 수학자들에겐 수학계의 연구윤리와 수학자 간 학술적 교류의 '선'을 두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 아이작 뉴턴라이프니츠의 미적분 키배야 워낙 유명하고,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보여이 야노시 등 여러 수학자들과 이런 서간을 주고받은 바 있었다. 20세기에도 증명을 비주류 언어로 발표했다가 먹금당한채 메이저 언어인 영어·불어·독어 논문에서 증명을 발표한 학자가 명제를 증명한 주역 내지 영웅으로 대접받는 일이 흔했다.[4] 김명호 교수는 이 주장을 하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