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흥 김씨는 북한 황해북도 서흥군을 관향으로 하는 본관이다. 시조 김보(金寶)는 경순왕의 후손이다. 김보(金寶)의 손자 김천록(金天祿)이 삼별초 진압 및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에서 김방경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고 이 공적으로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지면서 가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만 사료상으로 볼 때 서흥 김씨의 연원이 경순왕이 아니라 서흥의 토착 세력인 김행파와 김행도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 또한 크다. 당시 숭조 사업이 만연하였던 점[1]과 서흥 일대의 김씨 같은 경우 일찍이 토착 세력인 김행파 · 김행도가 크게 떨쳤던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서흥 김씨의 시조인 김보는 경순왕의 4남 김은열의 후손이 아니라 김행파 또는 김행도의 후손일 개연성이 더 크다.9세손 김굉필(金宏弼)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고, 우의정, 영의정으로 거듭 추증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서흥김씨가 명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남도 합천 초계면 근처에 많이 산다고들 한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36,402명이 있다고 조사되었다.
2. 출신인물
- 김치양: 고려 초기의 권신이자 천추태후의 비공식 연인. 서흥 김씨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서흥 김씨가 서흥을 본관으로 삼게 된 건 김치양이 활동하던 고려 초기가 아니라 한참 뒤인 여몽전쟁 대의 일이다. 김치양은 드라마에서의 역사왜곡의 영향으로 경순왕의 후손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동주 김씨는 신라계가 아닌 태조 왕건이 패서지역의 토착호족 행파(行波)에게 사성하며 탄생한 김씨로, 본관인 동주는 황해도 서흥군의 옛 이름이라 서흥 김씨와 본관이 같아 자주 혼동된다. 다만 동주 김씨나 서흥 김씨가 동일한 성씨일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긴 한데, 이 가설에 따르면 아예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김행파가 진짜 시조일 가능성이 높아지며, 서흥을 봉지로 하사 받았다는 스토리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 된다.[2]
- 김천록
- 김굉필: 조선 전기 유학자 겸 관리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
- 김충수: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 김희봉(1874)
- 김인득: 벽산그룹 창업자.
- 김희옥: 법조인. 전 헌법재판관.
- 김원준: 前경찰공무원. 제37대 경기남부경찰청장(치안정감).
- 김상옥: 시인. 아래 적힌 김자옥과 김태욱의 큰아버지다. 독립운동가 김상옥이 아니다.
- 김자옥: 배우.
- 김태욱: 김자옥의 동생. SBS 아나운서.
- 김동진(1982): 축구선수.
- 김강률: 야구선수(두산베어스)
- 김태기(1956):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재희(NCT): 가수, 본명 김대영
- 파파독
[1] 경주 김씨 및 이와 연관된 가문들을 통한 족보 위조 현상은 예로부터 있었다. 물론 경순왕이 항복한 이후 왕가의 부마가 되면서 낙랑공주 왕씨나 부인 왕씨와 더불어 자식을 낳아 많은 김씨 분파들이 생겨난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순왕을 시조로 삼는 성씨들 및 그 인구 자체는 과학적으로 볼 때 자연증가분을 넘어설 정도로 지나치게 많다.[2] 즉 다른 게 아니라 무려 왕가를 찬탈하려 했던 대역죄인인 김치양 및 그가 포함되어 있던 옛 가문을 배제하면서 본관의 명칭을 바꾸고 가문의 유명인을 시조로 삼는 술작이 가해진 것이 된다. 당대는 현실적으로 가문의 배경이 출세에 중요한 시대였기에 개연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실제로 가장 성공적인 무신정권이었던 최씨 정권을 만들었던 최충헌의 우봉 최씨는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로는 왕실과 신 정부에 찍혀서 그런지 순식간에 가세가 기운다. 그나마 이들은 왕가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을 뿐, 넘보진 않았기 때문인지 완전히 소멸당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