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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0:21:00

선거이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宣居怡
1545년(명종 1) ~ 1598년(선조 3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사신(思愼), 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으로는 최고위직[2]에 있으면서 한산도 대첩행주대첩의 3대첩중 2곳에서 대공을 세운 유일한 장수이다.

2. 생애

1545년 전라도 보성군(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도사(都事: 종5품) 선상(宣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3]

1545년(명종 원년) 7월 25일에 출생하여,1569년(선조 2년) 공신(유성군 선형)의 후손 자격으로 겸사복(兼司僕 국왕 직속경호대)으로 임명되었고, 1579년(선조 12년)에는 식년시(매3년마다 보는 정식 시험)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북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 정3품, 군단장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1587년 동갑내기 친구인 ‘조산만호(造山萬戶 종4품) 이순신(李舜臣)’이 녹둔도(鹿屯島)에서 여진족과 항전을 벌였으나, 북병사 이일(李 鎰)은 본인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전투력 손실을 이유로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게 된다. 이때, ‘선거이’는 감옥으로 가는 ‘이순신’에게 “모함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데 술이라도 한잔 하고 가라“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4]

이뿐 만아니라, ‘선거이’는 ‘이순신’을 구출하기 위해,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 국방부장관) 정언신'에게 무고함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가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후 ‘이순신’은 석방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녹둔도(鹿屯島)를 침략했던 여진족을 토벌(시전부락 전투)하는 전공을 세운다.[5]

1588년 거제현령(종5품), 성주목사(정3품)를 거쳐 1589년 광릉헌관(조선 7대왕 세조의 제사를 책임지는 정3품 관리)이 되었다.[6]

1590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정3품, 전라도 해남 우측 해군 전단장)’가 된다.[7] ‘이순신’은 가장 절친한 전우인‘선거이’의 당상관(최고위 관리) 취임을 축하하러 전라우수영에 도착했고, ‘선거이’는 여러 계급이나 아래였던 ‘이순신’을 너무나 반가워하며 가장 귀한 손님으로 각별하게 대접했다. 1591년에는 진도군수(종4품)를 겸직하라는 명을 받는다.

1592년 3월 17일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당시 군인으로 최고위 직책 전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8]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함에 따라, 진급 명령서를 전달받지 못한 ‘선거이’는, 후임으로 임명된 ‘이억기’ 에게 전라우수영을 넘겨주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 로 취임한 친구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진도군수’ 자격으로 ‘한산도 대첩’에 참전하여 승전한다.

1592년 11월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전라도 군단장)로 다시 임명되어 ‘오산 독산성’ 전투에서 승전하였으나 왜군의 총탄에 부상을 당했다. 1593년 2월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로서 ‘도원수 겸 전라도관찰사(종2품, 전라도 도지사) 권율’과 함께 ‘행주 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운봉전투, 금령전투, 사평전투에서 승전했으나 1593년 6월 경상도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에 반대하면서, 전투 병력을 후방으로 보냈다. ‘부원수 선거이’는 “조선군은 병력이 적고, 왜군은 병력이 많으니 조선의 모든 병력들이 진주성 내로 진입했다가 포위-고립된다면, 조선군 전체가 섬멸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은 병력을 보존하여 북진을 저지하고 호남을 방위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도원수 권율’을 설득했다.

결국 ‘도원수 권율’의 승인과 명령을 받고 병력들을 후퇴시켰으나, ‘명령 불복종’이란 단어는 ‘권율’은 빼고 ‘선거이’에게만 적용됐다. 그로인해 선무공신 1등(이순신, 권율, 원균)에 오르지 못했다.

1594년 9월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 충청도 군단장)’로 부임했다가 1594년 11월 ‘충청도 수군절도사(정3품, 충청도 해군 전단장)’로 좌천됐다.

1595년 9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해져 부임하지 못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픈 몸을 이끌고 ‘부원수 겸 7도 병마절도사(명예직)‘ 자격으로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제2차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 70여명을 사살하고 1598년 1월 적의 총탄에 54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치열했던 전쟁의 마지막 상황이어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고, 고향인 ‘전남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에서 시신도 없이‘초혼장(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들여 지내는 장례)’으로 장례를 치렀다.

3. 여담

종일 다락에 앉아 있는데. ‘충청 수사’가 말이 분명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가보니 중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습기가 많은 곳에서 발생하는, 뼈마디가 처리고 아픈 ‘풍습병’으로 많이 상했다. 무척 염려가 된다.
난중일기, 1595년 6월 20일
‘충청수사’와의 이별하는 술잔을 ‘경상우수사’도 참석하여 함께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수사 선 거이’와 작별하며 내가 써 준 시는 이러하다.
수사 ‘선 거이’와 작별하며 (贈別宣水使居怡 증 별 선수사 거이)
북쪽에 가서도 함께 동고동락 했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같이 했지.(北去同勤苦 북거동근고 南來共死生 남래공사생)
오늘밤은 달 아래 술 한잔을 나누고, 내일은 이별의 정을 나누는구나.(一杯今夜月 일배금야월 明日別離情 명일별리정)
난중일기, 1595년 9월 14일
고(故) 전라 병사 ‘선 거이’는 곧 세조조의 적개공신 ‘유성군 선 형’의 증손으로,(..중략..) 목을 베고 사로잡은 적이 70여 급이나 되었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혈전을 벌였습니다만 다시 탄환에 맞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성록’ 1799년 8월 22일

[1] 공교롭게도 충무공 이순신과 생몰연도가 같다. 다만 이순신보다 3개월 정도 늦게 태어나서, 10개월 정도 먼저 사망했다.[2] 부원수 겸 전라도 병마절도사[3] 보성선씨의 시조 '선윤지'의 8세손이며 우의정(정1품) '유성군 선 형'의 증손이다. 위로 형 선거정(宣居正)이 있다. 할아버지는 오위도총부도사(종5품) 숙철(淑鐵), 아버지는 의금부도사(종5품) 상(祥)이다.[4] 이에 ‘이순신’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술은 마셔서 뭐 하겠냐“ 라고 말했다.[5]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참여한 장군들 중 선거이의 이름과 직책이 있다.[6] 송간 이정회(李庭檜)가 35년간 작성한 친필 일기로 광릉헌관 ‘선거이“가 나온다.[7] ‘선거이’가 정3품 수군절도사로 임명될 때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이었다.[8] 1달도 못돼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임명장이 전달되지 못하고 조정(국가, 정부)에 남아 있다가, 현재는 ‘충남 천안 목천읍’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https://search.i815.or.kr/sojang/read.do?isTotalSearch=Y&doc=&adminId=1-00287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