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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1:48:04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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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인 의미2. 그리스도교의 회개(Repentance)
2.1. 성령훼방죄 (성령 모독죄)2.2. 가톨릭 교회에서의 회개2.3. 잘못된 회개2.4. 회개로 미래에 지을 죄를 미리 사함 받을 수 있는가?
3. 관련 문서

1. 일반적인 의미



잘못을 뉘우치고(悔) 고친다(改)는 뜻. 개과천선과 비슷하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 그 잘못을 고치고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 불교에서는 참회(懺悔) 등으로 표현한다. 철자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회계와 자주 헷갈리는데, '회계'는 돈계산이라는 뜻이다.

2. 그리스도교의 회개(Repentance)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마태오의 복음서 3장 2절 (공동번역 성서)
Metanoia / 메타노이아

그리스도교에서는 '회개'를 인간의 '외적 행동 변화'가 아니라, '내적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던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는 것도 회개(또는 회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 나라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한 사상 중 하나로 회개를 통해 인간은 를 사함 받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천국지옥의 개념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희생으로 자신이 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믿고[1] 다시는 믿기 전의 나쁜 행실이나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느님 앞에 결심한 뒤, 가톨릭정교회의 경우엔 초기교회부터 이어져 온 전승에 따라 세례를 받음으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2]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사함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 또다시 크든 작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에 사람은 늘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면서 회개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람이 짓는 죄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나, 그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며,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어도 삶을 돌아보면 부족함 투성이이기 때문에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 무엇 하나 스스로 내세우지 못하고 그저 낮은 자세로 그분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회개의 자세이다.

기독교에서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율법주의와 믿음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의 차이는 바로 회개 여부에 달려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하려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이 있기 마련이고 마음 속의 악은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게 되어있어,[3] 회개로 마음 속의 악을 우선적으로 없애면서 믿음으로 하느님을 따르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기독교의 개념들 중 가장 오해를 많이 받는 개념 이기도 한데, 이것은 단순히 일반인들이 무지해서 그렇다기보단 한국 개신교계의 부패에 대부분 책임이 있다.

2.1. 성령훼방죄 (성령 모독죄)

성경과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규정하는 특이한 죄가 있는데, 그것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 (성령 모독죄)'이다.
"그러므로 잘 들어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2장 31~32절(공동번역)
1864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4]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뉘우침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기를 일부러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죄의 용서와 성령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함은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게 하고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4항
그러나 사람의 아들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불신이 있더라도 그가 행하는 것의 진실성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분이 말했듯이 그분이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전하라고 주신 진리이며 그 분이 하신 기적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무지에서가 아니고 악의(惡意)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모독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악의로 거부함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수 있다』(마태11, 19)고 말씀하셨고 이 지혜는 하느님의 영과 동등한 성격을 띠고 있다(지혜9,10.17). 그러니 하느님이 보면 사람을 경멸하는 일은 봐줄 수 있어도 그 사자(使者)를 통하여 극명하게 나타난 하느님의 지혜 또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이 된다.
가톨릭 신문-성령모독 독성죄

이 구절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은데, 일단 주류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는 '성령 훼방죄 = 아무리 회개해도 한번 지으면 그 이후론 용서 못받는 특정한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다는 것이 교리기 때문.

주류 그리스도교 종파 중 가톨릭정교회에서는 과거부터 성령 모독죄를 대체로 이렇게 구분해왔고,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개신교 역시 비슷하다.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인간의 회개를 위해 작용하는 성령의 도움(은총)을 죄인 쪽에서 거부하고 훼방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이 상태로는 구원받을 수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위치에 서게 된다. 하느님께서 용서를 해주려 해도 저 상태는 인간이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상태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 죄다.

그런데, 이렇게 명확한 교리가 정립되지 않은 몇몇 개신교에서는 목사가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고 남용하는 경우도 있어, 개인의 판단 하에 마구 가져다 붙이면 심히 난감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으며, 만약 그것이 성령훼방죄이면 본인도 성령훼방죄를 저지른 적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공관복음은 바리새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는다고 말한 것을 성령모독죄라고 말하며 그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기상 이 때는 십자가 사건 이전의 시기인데, 이 때에는 죄가 가리어져 용서를 받았고,[5] 죄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6]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사람에게 성령에 대한 죄가 없는 이상 회개하면 성령의 개입으로 그 사람의 죄가 가리어졌으나, 성령에 대한 죄가 있으면 인간과 성령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성령께서 성령모독죄를 가리는 것에 있어서 개입할 권한 자체가 막혀 그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했고,[7] 신약 시대에는 예수의 피 자체가 모든 죄를 없게 할 수 있으므로[8] 성령모독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한 다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조롱하는 것도 공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했던 성령모독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9] 베드로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점에서, 신약 시대에 성령의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약성경은 죄에 대해 아는 것이 그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10] 성령모독죄가 신약시대에도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는 죄였으면 신약성경은 성령모독죄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2.2. 가톨릭 교회에서의 회개

가톨릭 교회정교회에서는 나약한 인간이 죄에 계속 빠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를 돕기 위해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자주 받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1서 4장 18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죄를 질책하시는데, 그대도 자신의 죄를 질책한다면 그대는 하느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람과 죄인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대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 죄인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을 구원하시도록 그대가 만든 것을 부수십시오… 그대가 만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자신의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기에, 그대의 선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악행의 고백은 선행의 시작입니다. 그대는 진리를 행하고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요한 복음서 강해」 12,13: CCL 36,128(PL 35, 1491)
그대는 거리에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을 때마다 지은 죄에 대해 참회하십시오. 또 다시 죄를 지을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새롭게 뉘우치십시오. 약속된 상급[11]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교회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입니다. 여기 교회에서는 그대의 죄를 셈하지 않고,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 따름입니다. 오직 하느님께 그대의 죄를 드러내십시오.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행하였나이다"(시편 51, 6). 그러면 그대의 죄는 용서받을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참회에 관한 설교」 3장 4절

일단 가톨릭에서, 회개는 두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회개의 동기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있는 완전한 회개, 즉 하느님의 사랑을 침해한 것에 대해 슬퍼하고 죄를 끊으려 하는 상등통회가 있고, 두번째로는 단순히 하느님이 두려워서, 벌받는 것이 무서워서하는 불완전한 회개, 일명 하등통회가 있다. 우선 두가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자가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를 보려면 최소한 하등통회의 정신은 갖추고 고해실로 들어가거나 사제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죄만 고해실에서 떠들고 뉘우치는 감정도 없이 고해성사를 한다면 그것은 모고해라고 해서 다시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봐야하는 큰 대죄가 된다. 즉, 고해성사를 인정하는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도 진정한 마음이 아닌 입으로만 나불대는 회개는 엄격하게 죄악으로 금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자기의 죄를 절실히 뉘우치고, 거기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모독한 것까지 슬퍼하는 회개(상등통회) 만으로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래서 대죄[12](중죄)를 지은 사람이 고해성사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에 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면 그 사람이 절실하게 완전한 회개를 했을지는 그 사람과 하느님밖에 모르기 때문.

자신의 죄악이 대죄라면 완전한 마음으로 회개한 후라도 고해성사는 나중에라도 필수적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이 모르고 지은 죄, 그리고 대죄보다는 가벼운 일상에서의 여러 잘못들인 소죄는 고해성사로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고해성사 없이 하나하나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미사에서 고백기도를 같이 바치고, 영성체를 해도 용서받긴 한다. 물론 보속은 알아서 열심히 기도와 선행으로 해야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통회로는 그 후의 삶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성사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 변화될 수 있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톨릭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하등통회보다는 상등통회로 회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개신교 교회들 중에 간혹 지나치게 지옥에 대해 강조하며 성도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지옥가지 않기 위해 회개하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믿음이 반드시 더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등통회만 주구장창 하게 되면 심신이 금방 지치게 되나, 상등통회는 많이 해도 심신에 부담이 별로 가지 않기 때문에, 회개를 강조는 하되 하등통회보다는 상등통회를 유도하는 설교가 더욱 바람직하고, 하등통회를 하게 되더라도 상등통회로 마무리 하는 것이 좋다. 하등통회는 상등통회가 잘 안 되는 사람이 회개하도록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고, 상등통회는 깊은 하느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회개라고 보면 된다.

2.3. 잘못된 회개

'비겁한 회개'라고도 한다. 구원파 같은 이단에서는 신도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부려먹기 위해 회개를 왜곡하여 극단적인 교리를 만들기도 하는데,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신약성경의 한 줄, 사도 바울로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논파된다.[13] 이 말은 그리스어 원문엔 현재 미완료 시제로 나와 있다. 신약성경의 핵심 인물인 사도 바울로가 자기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도 바울로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할 신도는 없을 것이다.

회개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회개만 하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 생각하며 말로만 회개를 하고, 막상 실제로는 악랄하며 양심을 저버린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를 빌미로 양심의 가책을 모두 내려놓고 태연하게 악행을 반복하거나, 피해자를 모욕하는 짓을 저지른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회개했으니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이자 스스로 심판자, 즉 신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대표적으로 고문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이근안이나,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사건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근안은 2012년에 목사안수가 취소되었으며,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사건 같은 것은 교단에서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전도연송강호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영화)>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잘못된 회개로 인해 초래되는 비극을 잘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 중에서 특히 개신교에서 잘못된 회개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회개를 강조하며 주기적으로 고해성사를 하게 만드는 천주교는 신부가 고해성사를 들어주며 어떤 방식으로 회개해야할지 길잡이가 되어주지만 개신교에서는 자율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따라 회개를 하며 교회에서는 신도 개인의 죄에 대한 회개보다 구원론에 집중을 하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은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해석된 잘못된 회개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에서도 이런 입만으로 하는 회개는 죄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회개는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회개한 죄를 다시 저지르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한자어의 뜻부터가 뉘우칠 회, 고칠 개다. 즉,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죄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까지가 회개인 것이다.[14]

당장 성경 내의 인물들의 회개하는 모습을 보면 겉옷을 찢고 흙더미에서 뒹굴거나 잿가루를 뒤집어 쓰고 몇 십일을 금식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이 쉴 새 없이 나온다. 그리고 진실된 회개를 한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보자. 세리 삭개오(자캐오)는 예수를 만나 회개한 후 세금을 부당하게 걷어서 모은 재물을 피해자들에게 4배로 변상했다. 사도 바울로는 바리사이인 출신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이지만 이에 대해 회개하고 나서는 본인이 사형당할 때 까지 기독교인들의 편에 서서 전도했다.

쉽게 요약하여 설명하자면, 올바른 회개라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15]을 신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만 단순히 "예수님 죄송해요." 하고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진신으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태도는 기본중의 기본이며, 타인에게 저지른 잘못인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도 함께 용서를 구하는 것과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한데, 현대 개신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회개기도만 하고 나용서 받았네 하고 뻔뻔하게 나가며, 회개만 하면 그만이겠지 하며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여,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올바른 회개에 대해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4. 회개로 미래에 지을 죄를 미리 사함 받을 수 있는가?

구원파 등에서는 회개를 할 경우 미래의 죄를 미리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2장 12절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1장 9절

요한의 첫째 편지는 수신자가 회개하여 죄사함 받은 경험이 이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쓰여졌는데, 요한1서 1장 9절은 그러한 사람들을 상대로 회개하여 죄사함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회개로 미래의 죄까지 사함 받았다면, 요한이 이미 회개한 성도들을 상대로 이러한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장 12절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0장 14절

회개로 미래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드는데, 문맥을 볼 때 이러한 구절들은 여러번 계속 드려야 했던 구약의 제사와는 달리,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제사는 한번만 드려도 효과가 계속 유효해서 여러번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구절들로, 미래의 죄를 사함받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3. 관련 문서



[1] 이 네 가지는(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4대 교리이다.[2] 부연하자면 물로써 베풀어지는 세례성사는 죄의 용서의 가시적이고 확실한 표지가 되지만,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가시적인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이라도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회개한 이들에게 '비가시적인 세례'를 통해 하느님만이 아시는 구원의 길을 베풀어 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즉 세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란 표현도 틀리진 않지만, 가톨릭 교리상 정확히 표현하면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는 이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세례를 거치게 된다에 가깝다.[3] 예를 들어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해도 마음 속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교만을 품었다면 그것은 죄이다.[4] 마르 3,29; 루카 12,10 참조.[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편 1절)[6]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장 4절)[7]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성령모독죄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하여 성령의 인격체로서의 존재감이 적고, 아무한테나 성령이 임하지 않았으며, 종교의식에서 무언가를 잘못 행한 사람이 즉사하는 일이 빈번했을 수 있다.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곰에게 찢겨 죽은 사건 역시,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엘리사를 깔보게 되면 어느 순간 성령모독죄까지 짓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 죄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질 우려가 있기에,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으니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엄격한 율법과 빈번한 엄중한 심판이 필요했던 것이다.[8]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1장 7절)[9] 성경은 모르고 저지른 죄도 죄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레위기 5장 17절)
[1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로마서 7장 7-8절)[11] 賞給, 여기서는 회개와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서 얻게 될 영광과 행복을 의미한다.[12] 보통 죄를 분명히 알고있으면서, 악한 자유의지로 지으며, 십계명을 거스르는 죄들.(살인, 도둑질, 지나친 탐욕, 강도질, 간음이나 혼전성관계 및 동성애, 수음, 냉담 및 주일미사를 소홀히 하고 참여안함, 신성모독이나 이단과 배교 등등)[13]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묻거든, 죄인이라 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임을 벼슬삼지 말라는 의미도 내포한다.[14] 앞서 서술되어있는데로 개신교의 회개는 반강제적인 천주교와 달리 개인의 양심에 의존하고 있는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양심이 있을리가 없다.[15] 종교적이든, 윤리적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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