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리스턴 Sonny Liston | |
<colbgcolor=#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 찰스 L. 리스턴 Charles L. Liston |
출생 | 1932년?[1] |
미국 아칸소주 샌드슬로 | |
사망 | 1970년 12월 30일 (추정) |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54전 50승(39KO) 4패(3KO) |
신장/리치 | 185cm / 213cm |
체급 | 헤비급 |
스탠스 | 오소독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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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마티 마셜(2), 클리블랜드 윌리엄스(2), 니뇨 발데스, 빌리 베스마노프, 하워드 킹(2), 로이 해리스, 조라 폴리, 에디 메이컨, 플로이드 패터슨(2), 빌리 조이너(2), 조지 존슨, 척 웨프너
3. 커리어
세인트프랜시스 카운티에서 소작농일을 하던 토비 리스턴과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스턴은 아버지의 25명의 자녀 중 24번째로 태어난 자식이었고, 어머니가 낳은 10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 1940년대 중반 어머니를 따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강도와 폭행사건을 수차례 저질렀다. 1950년 1급 강도와 절도 혐의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미주리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옥살이를 하는 동안 알로이스 스티븐스 신부의 도움을 받아 복싱에 입문하였고, 교도소 내에서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 1952년 가석방된 후 짧지만 인상적인 아마추어 경력을 쌓았는데, 특히 1953년 시카고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1952 헬싱키 올림픽 헤비급 챔피언인 에드 샌더스를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었다. 그해 9월 프로로 전향하여 세인트루이스에서 돈 스미스를 1라운드 TKO로 제압하며 데뷔전을 화려하게 치렀고, 1954년 6월 29일 프로 전적 6전 만에 헤비급 상위 랭커였던 조니 서머린을 상대로 8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는 등 프로 무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2]
1954년 9월 7일 마티 마셜에 의해 프로 경력 첫 패배를 기록했다.[3] 리스턴은 마셜의 비정통적인 링전략을 보고 웃음을 짓던 중 그가 날린 라이트에 턱이 부러졌지만, 8라운드 판정까지 버티며 스플릿 판정패를 당했다. 허나 리스턴은 7개월 후인 1955년 4월 21일 재대결에서 마셜을 4번이나 다운시킨 후 6라운드 TKO로 승리했고, 1956년 3월 6일 마셜과의 마지막 세 번째 대결은 손쉽게 10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이때까지 그의 전적은 14승 1패.
이후 1956년 12월에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세인트루이스 구빈원에서 9개월을 보냈고, 1958년 복귀하여 플로이드 패터슨이 차지한 헤비급 왕좌를 손에 넣기 위해 당대 헤비급 탑컨텐더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나갔다. 60년대 헤비급을 대표하던 하드펀처 클리블랜드 윌리엄스를 상대로 TKO승을 두 차례 거두었고, 66전의 백전노장이자 쿠바의 자존심이었던 니뇨 발데스와 51승(42KO) 3패 1무에 빛나는 조라 폴리를 모두 3라운드 만에 KO시켰으며, 패터슨과의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에서 13라운드까지 가는 혈전을 펼친 로이 해리스도 단 1라운드 만에 제압하였다.
리스턴과 패터슨의 대결이 성사되기까지 장장 4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패터슨의 매니저였던 커스 다마토가 리스턴이 마피아와 연루되어 있다는 이유로 경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년간의 압박 끝에 패터슨은 마침내 다마토의 뜻을 거스르고 리스턴과의 타이틀전에 합의했고, 경기는 1962년 9월 25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렸다. 리스턴은 1라운드 2분 6초 만에 KO승을 거두며 새로운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1963년 7월 22일 재경기에서 패터슨은 1차전 때보다 불과 4초를 더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1960년대 초, 무하마드 알리가 아직 캐시어스 클레이였던 시절 리스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클레이는 리스턴을 "크고 못생긴 곰"이라고 부르며 꾸준하게 그를 조롱하였고, 아예 리스턴의 집 앞에 곰덫을 놓기까지 할 정도였다. 1964년 2월 25일 마침내 성사된 두 선수의 대결에서 8:1의 비율로 리스턴의 압승을 점쳤던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챔피언은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의 도전자에게 크게 애를 먹었다. 6라운드 후, 어깨 부상을[4] 호소한 리스턴은 7라운드 벨에 응답하지 못하며 클레이에게 타이틀을 내주게 된다.
1965년 5월 25일 리스턴과 알리의 재경기는 권투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경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1라운드 중반에 리스턴이 레프트 잽을 던지자, 알리는 재빠른 오른손 카운터로 리스턴의 안면을 가격하여 전 챔피언을 쓰러뜨린 것이다. 일명 "팬텀 펀치"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으며, 리스턴이 마피아나 흑인 무슬림의 압력을 받고 경기를 고의로 졌다는 소문이 계속되고 있다.
알리와 두 차례에 걸친 경기 이후 명예가 실추한 리스턴은 1년 이상 선수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66년 복귀하여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잉게마르 요한슨이 스웨덴에서 주선한 4번의 경기에서 모투 승리하였다. 1969년 12월 6일 레오티스 마틴에게 KO로 패배하기 전까지 비교적 무명의 선수들을 상대하며 14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1970년 6월 29일 미래의 헤비급 타이틀 도전자인 척 웨프너와의 경기에서 9라운드 TKO로 승리했다. 웨프너를 이긴 후 리스턴은 캐나다 챔피언 조지 추발로와 맞붙을 예정이었지만, 둘의 경기는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4. 사망
1971년 1월 5일, 아내인 제럴딘에 의해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제럴딘은 침실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고 방 안으로 들어갔고, 리스턴이 침대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남펀을 발견했다. 제럴딘은 소니의 변호사와 의사에게는 전화했지만, 2~3시간이 지날 때까지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았다.클라크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의 데니스 카푸토 경사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경찰관 중 한 명이었다. 카푸토는 주방에 있던 풍선에서 헤로인 1/4온스를 발견했고, 리스턴의 바지 주머니에서 마리화나 1/2온스를 발견했지만, 주사기나 바늘은 찾을 수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리스턴이 헤로인 주사를 과도하게 맞는 데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약물 도구[5]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 의심을 품었다.
라스베이거스 경찰은 수사 결과, 범죄의 흔적은 없다고 결론짓고 리스턴의 사망원인을 헤로인 과다복용이라고 발표했다. 사망증명서에 기재된 사망 날짜는 1970년 12월 30일인데, 이는 경찰이 현관에 놓인 우유병과 신문의 수를 보고 추정한 것이다.
검시관 마크 허먼은 리스턴의 체내에서 헤로인 부산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그의 사망을 초래할 만큼의 양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한, 리스턴의 왼쪽 팔오금에 바늘 자국으로 인한 흉터가 발견되었다. 독성학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검사를 통해 결론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너무 부패되어 있었다. 리스턴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 울혈과 심부전으로 인한 자연사였는데, 실제로 리스턴은 12월 초에 흉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
생전에 리스턴과 친분이 있던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가 그의 시신을 운구했으며, 이외에도 무하마드 알리, 슈거 레이 로빈슨을 포함한 수많은 복싱계 고위 인사들도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5. 파이팅 스타일
역대 최강의 하드펀쳐들 중 한명이며, 링 위에서의 위협적인 존재감과 비정상적으로 긴 팔길이에서[6] 나오던 괴물같은 펀치력으로 당대 거의 모든 선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서 군림하던 선수였다.리스턴의 상상을 초월하는 펀치력의 비결은 그의 리치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과 차별화된 풋워크 덕분이기도 했다. 리스턴은 전진을 할 때 뒷발을 먼저 이동시켰는데, 이로 인해 갑작스런 방향 전환을 하기에는 무리였어도 셔플 스텝을 뛸 때마다 앞발이 지면에 고정되어 레프트 잽만 날려도 그 파워가 상당했다. 특히 리스턴은 헤비급 복싱 역사상 최고의 재버 중 하나로 평가받는 만큼 잽 활용도 또한 탁월하였다. 잽으로 상대의 가드를 내리고 크로스를 셋업하던 그의 기술은 현대 복싱에서도 아직까지 쓰이고 있을 정도.[7] 또한 레프트 잽을 롱가드처럼 길게 뻗어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였고, 덕분에 링커트를 하기가 한층 수월해졌다. 그러다 거리를 단숨에 좁혀 타격 각도를 잡을 수도 있었고, 전완근으로 상대가 가드를 내리지 못하게 막은 뒤 바디샷을 날리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펀치가 빗나갔을 때도 전완근을 사용했는데, 상대에게 체중을 실으며 헤드 무브먼트를 제한시키거나 시야를 가림으로써 카운터를 날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8]
6. 여담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줄넘기 묘기를 선보이는 등 여러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1964년 2월 16일 플로리다 마이애미 비치에서 비틀즈가 《에드 설리번 쇼》에 두 번째로 출연했을 때 관객석에 조 루이스와 함께 있었다. 설리번은 쇼를 진행하던 도중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앤디 워홀과 함께 브래니프 항공의 TV광고 영상에 출연한 적도 있다.
조지 포먼이 리스턴의 스파링 파트너였었다.
리스턴의 시신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파라다이스 메모리얼 가든'에 안장되었고, 묘비명은 이름과 연도 밑에 A Man이라고 간단히 쓰여졌다.
6.1. 생년월일?
1950년 리스턴은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나이를 22세라고 밝혔다. 하지만 1953년 법적인 이유로 출생증명서를 신청했을 때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1932년 5월 8일이라고 말했고, 1960년 미국 상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했을 때는 자신이 1933년에 태어났다고 말했다. 스포츠 기자 제리 아이젠버그에게는 자신의 생년월일이 새겨진 나무가 있었지만, 그 나무가 잘려 나갔다고 말하기도.리스턴의 어머니는 아들이 1932년 1월 8일에 태어났으며 리스턴이 태어난 날짜가 가족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성경이 어딘가에서 분실되었다고 말했다. 때때로 1월 18일이라고도 말했는데, 전기작가 닉 토셰스는 다른 형제의 출생일이 1월 8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그 날짜를 소니의 것과 혼동했으리라 추측했다. 어떨 때는 1929년과 193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말했다가, 1927년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복싱전문기자 스프링스 톨레도는 그녀가 그의 출생년도를 다른 형제의 출생년도인 1927년과 혼동했다고 생각했다. 또 어떨 때는 리스턴의 생일이 7월 22일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930년 미국의 인구조사 기록이 2002년에 공개되었을 때(인구조사 기록에서 개인 식별 정보에 대한 접근은 72년 동안 제한됨.) 리스턴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10년 후, 1940년 인구조사 기록이 공개되었을 때 리스턴 가족의 명단에 찰스 L. 리스턴의 이름이 있긴 했지만 나이가 10세로 기재되어 있었다.
스프링스 톨레도는 인구조사 정보와 리스턴의 어머니의 진술을 바탕으로 리스턴이 1930년 7월 22일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 아칸소주에서는 1965년까지 출생신고가 의무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니 리스턴의 공식 출생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2] 이 경기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리스턴의 첫 번째 경기였다.[3] 마셜은 저니맨 취급을 받던 선수였으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스타일을 구사하였다.[4] 미국의 전기작가 데이빗 렘닉은 그의 책 'King of the World: Muhammad Ali and the Rise of an American Hero'를 통해 리스턴의 코너맨으로부터 어깨 부상은 전부 헛소리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5] 주사제를 만들 때 쓰는 숟가락이나 팔에 감을 지혈대 등.[6] 신장 206cm의 타이슨 퓨리와 비교해봐도 키는 리스턴이 20cm 가량 더 작지만 리치는 겨우 3c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7] 대표적으로 디온테이 와일더가 해당 크로스 셋업을 자주 사용하여 KO 하이라이트를 여럿 생산하기도 하였다.[8] 이 역시 다른 선수들이 펀치가 빗나가면 클린치로 상황을 무마하려던 것과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