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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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조지아 전쟁 Советско-грузинская война[1] რუსეთ-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ომი[2] Soviet–Georgian War[3] | ||
러시아 내전의 일부 | ||
기간 | ||
1921년 2월 12일~ 3월 17일 | ||
원인 | ||
러시아의 조지아 점령 시도 | ||
장소 | ||
조지아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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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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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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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1만 1,400여명[4] | 4만 5,200명[5] | 2만 명 |
피해 규모 | ||
3,200명 전사 또는 포로 | 5,500명 전사 2,500명 포로 | 30명 전사 26명 포로 46명 실종 |
결과 | ||
볼셰비키의 승리 조지아 민주 공화국 멸망 그루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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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은 1921년 2~3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볼셰비키 세력이 조지아 민주공화국에 벌인 침공이다. 붉은 군대의 조지아 침공(Red Army invasion of Georgia)[6] 또는 조지아의 소비에트화(Советизация Грузии)[7]라고도 한다. 이 전쟁의 결과 조지아 민주공화국은 멸망하고 괴뢰정권인 조지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2. 배경
1917년 발발한 2월 혁명의 결과 조지아는 사실상(de facto) 독립했다. 1918년 4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을 결성했으나 1달만에 탈퇴하여 5월 26일 조지아 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아직 표트르 브란겔의 백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데다 폴란드와 치르던 전쟁이 급하던 볼셰비키는 일단 1920년 5월 7일 모스크바 조약에 조인하여 조지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조지아 민주공화국을 서구 세력의 발판쯤으로 생각하던 볼셰비키는 조지아의 분리독립을 용인할 생각이 절대 없었고, 브란겔 세력이 말라죽고 폴란드와의 전쟁이 서서히 종전 수순을 밟던 1921년 초 본격적인 조지아 점령에 착수했다.3. 전개
이미 1920년에 볼셰비키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조지아를 북쪽과 남쪽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현지 조지아인 볼셰비키의 '지원요청'에 '응답'하는 식으로 조지아를 침공했다. 이 조지아인 볼셰비키들은 1921년 2월 11일과 12일 사이 밤에 세르고 오르조니키제[8]의 지시에 따라 조지아 남동쪽 국경지대의 로리(Lori)와 슐라베리(Shulaveri)에 있는 조지아군 초소를 공격했다. 이들의 '봉기'에 응답하듯이 붉은 군대도 조지아로 진격했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아르메니아에 주둔한 붉은 군대 제11군으로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내리기도 전에 조지아인 볼셰비키의 봉기를 지원했다. 16일 11군은 조지아 남쪽 국경을 돌파하여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11군의 목표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였다. 또한 조지아와 러시아 사이의 다리얄(Daryal)과 마미소니(Mamisoni) 고개, 흑해 해안지대에서도 붉은 군대가 남진하였다.붉은 군대의 진격로 |
"트빌리시 하늘에 붉은 깃발이 휘날립니다. 소비에트 그루지야 만세!"
조지아군은 트빌리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진 므츠헤타(Mtskheta)에 집결하여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트빌리시의 점령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지아군은 므츠헤타도 곧 포기하고 말았다. 붉은 군대는 무질서한 저항을 억누르며 진격했고, 조지아군은 서쪽으로 퇴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해체되어갔다. 동부 조지아에서도 조지아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벌였다. 조지아 정부는 프랑스측의 개입을 기대했고, 프랑스도 28일에 붉은 군대 제9군 예하 31소총사단을 포격하여 지원했으나 병력을 상륙하진 않았다. 붉은 군대는 압하스인 민병대의 지원을 받아 3월 1일 가그라(Gagra), 3일 아할리아토니(Akhali Atoni), 4일 수후미, 9일 주그디디(Zugdidi), 10일 쿠타이시, 14일 포티(Poti)를 점령했다. 조지아 정부와 군대는 남서부 바투미로 이동했고, 일부 병력은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항전했다. 그런데 볼셰비키 하나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조지아에게 날벼락이 하나 더 닥친다. 튀르키예가 조지아를 침공한 것이다.튀르키예 대국민의회의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캬즘 카라베키르는 조지아 측에 아르다한과 아르트빈에서 퇴거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조지아 정부는 튀르키예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튀르키예는 이 지역들을 모두 접수했다. 튀르키예와 볼셰비키의 군대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양측간의 긴장은 높아져갔다. 이에 튀르키예와 볼셰비키는 협상을 벌여 10월 13일 카르스 조약을 체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9]
이로써 조지아의 멸망은 확정되었고, 조지아 민주공화국 정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4. 이후
조지아의 볼셰비키는 현지 주민들로부터 거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조지아에서 가장 폭넓은 인기를 누린 것은 멘셰비키였다. 조지아인들은 1924년 볼셰비키의 강제적 집산화에 반발하여 8월 봉기를 일으켰으나 1만 명이 처형되고 2만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처참한 진압을 당했다. 조지아의 볼셰비키가 주민들의 신임을 얻게 된것은 조지아 출신 이오시프 스탈린이 소련의 권좌를 독차지하면서부터였다.[1] 러시아어. "소비에트-조지아 전쟁".[2] 조지아어. "러시아-조지아 전쟁".[3] 영어. "소비에트-조지아 전쟁".[4] 보병 1만 1천, 엽병 400명.[5] 보병 4만, 기병 4,300명, 오세트인 의용군 900명.[6] 영어 위키백과의 표제어.[7]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표제어.[8] 아나스타스 미코얀,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소위 캅카스 트리오라 불리던 인물이다. 훗날 대숙청 도중에 의문사했다.[9] 정확히 말하면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그루지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간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때 소련은 건국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