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2-05 22:42:25

송도순(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윤명(允明)
본관 은진 송씨[1]
출생 1858년[2](철종 9) 9월 17일
충청도 회덕현 내남면 송촌리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3]
사망 1910년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현종이조판서를 지낸 송준길10대 종손이다.

2. 생애

송도순은 1857년 9월 17일 충청도 회덕현 내남면 송촌리(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서 아버지 송종렴(宋鍾濂, 1840. 6. 10 ~ 1889)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재열(申在烈)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7촌 지간으로 동춘당 송준길의 9대 종손인 족숙(族叔) 송종호(宋鍾浩)에 입양되었다.

16세 되던 1873년 음서휘릉 참봉(종9품)에 제수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 1874년(고종 11) 증광시 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였다. 이때 동춘당 송준길의 봉사손(奉祀孫)이라는 이유로 고종으로부터 사악(賜樂)받았고, 같은 시험에 병과 9위로 급제한 송시열의 후손인 송세헌(宋世憲)과 함께 특별히 3년 간의 휴가를 부여받아 학문을 더욱 깊이 닦을 수 있었다.

그 뒤 1877년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정7품)·세자시강원 겸사서(兼司書:정6품), 1878년에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부사과(副司果:종6품)을 역임하는 한편, 홍문관 관원을 뽑기 위한 1차 후보자 명단인 본관록(本館錄)에 신기선 등과 함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관원을 뽑기 위한 2차 후보자 명단인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이 올라간 뒤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종5품)에 제수되었고, 이어 세자시강원 겸문학(兼文學:정5품),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 병조 정랑(兵曹正郞:정5품), 부사직(副司直:종5품), 세자시강원 겸필선(兼弼善:정4품), 홍문관 교리(校理:정5품), 남학 교수(南學敎授:종6품), 을 역임했다.

1882년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1883년 홍문관 응교(應敎:정4품), 부응교(副應敎:종4품) 등을 거쳐 1886년에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정3품), 부호군(副護軍:종4품), 사과(司果:정6품) 등을 지내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로 품계가 오르고 영흥도호부사(永興都護府使:종3품)와 경주부윤(慶州府尹:종2품)에 제수되었다. 1887년에는 청주목사(淸州牧使:정3품)를 거쳐 1888년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종3품), 영광군수(靈光郡守:종4품) 등을 지냈다.

1892년(고종 29)에는 형조 참의(刑曹參議:정3품)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정3품)에 오르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우부승지(右副承旨:정3품)가 되었다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종2품)에 제수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로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호군(護軍:정4품),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종2품),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정3품),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종2품),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종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등을 역임했다.

1893년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과 예조 참판(禮曹參判:종2품),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정3품), 한성부 우윤(右尹:종2품)·좌윤(左尹:종2품) 등에 올랐으며, 1894년 2월에는 사헌부 대사헌(종2품)과 승정원 도승지(정3품), 내의원 부제조(副提調:정3품)에 제수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칙임관 4등이 되었으며, 1895년 4월 왕태자궁 첨사(王太子宮詹事)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7월 상소를 올려 병으로 사직하여 낙향했다가, 그해 9월 충청남도 공주군 현내면 장대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대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문석봉의 의진에 가담하여 군향(軍餉)을 역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문석봉이 체포되어 의진이 와해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897년에는 왕태자궁 시강원 첨사(王太子宮侍講院詹事),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등을 지냈으며, 1899년에는 정2품으로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901년 8월에는 태의원 경(太醫院卿), 장례원 경(掌禮院卿)을 역임했고, 1907년에는 정2품으로 궁내부특진관을 겸직하면서 칙임관2등을 서훈받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송도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동춘당문정공파 23세 순(淳) 항렬. 아버지 송종렴(宋鍾濂)과 양아버지 송종호(宋鍾浩)는 22세 종(鍾) 항렬.[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5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국조방목에는 185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른다.[3] 출생지인 송촌동 192번지에는 현재 회덕동춘선생고택이 자리해 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8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