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도 宋旻道|Song Min-do | |
<colbgcolor=#283593><colcolor=#fff> 출생 | 1923년[1] 4월 3일 |
경기도 수원시 | |
사망 | 2023년 2월 28일 (향년 99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학력 | 삼화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 |
데뷔 |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가수 1기 |
가족 | 남동생 송민영 (1927~2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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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첫 데뷔는 1947년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되기 1년 전이었다.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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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
1923년 경기도 수원시 출생으로 감리회의 목회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평안남도 삼화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유치원에서 보모로 근무했으며, 이후 중화민국 연길시로 이주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으며, 1947년에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가수로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데뷔곡 발표 당시에는 송민숙 이라는 예명을 쓰게 되었는데, 이름이 남자 같아서 이라고 한다.
데뷔곡이었던 '고향초'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인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6.25 전쟁 중에는 국군 위문공연을 다녔다. 종전 후, '나 하나의 사랑', 그리고 가수 안다성과 함께 발표한 '청실홍실'[3]이 아주 많은 인기를 얻게 되어 195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카츄사의 노래', '여옥의 노래', '하늘의 황금 마차' 등의 곡을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장남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4]하게 되어 사이공에 식당을 차리며 거주하였고, 1971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미국에 거주했다.[5]
송민도 '나 하나의 사랑' |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
2.1. 사망
미국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사망하기 3~4일 전 건강이 위중하게 악화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 뒤 2023년 2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99세[6]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한편 '가요무대' 제작진은 2023년 4월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앞두고 '송민도 100세 특집'을 논의 중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으로 인해 추모 무대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3. 기타
- 한 때 '백진주'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 2014년에는 남이섬 노래박물관 앞에 대표곡 '나 하나의 사랑' 노래비도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작곡가 손석우를 비롯해 가수 금사향·안다성·한명숙·한상일 등이 참석했고, 본인은 미국에 머물고 있어 함께하지 못했다.
4. 대표곡
- 1948년 고향초
- 1955년 나 하나의 사랑
- 1956년 여옥의 노래
- 1956년 청실홍실 (송민도, 안다성[8])
- 1957년 청춘 목장
- 1957년 하늘의 황금 마차
- 1958년 나의 탱고
- 1958년 축배의 노래 - 동료 가수 남일해와의 듀엣곡이다.
- 1958년 행복의 일요일
- 1960년 카츄사의 노래
[1] 네이버 인물정보에는 1925년생으로 나왔으며, 가요무대에서 1923년생임을 밝혔다.[2] KBS경음악단의 악단장 1975년 이민 이후 목사로 활동했다.[3] 대한민국 최초의 드라마 주제가로 유명하다.[4] 해병 청룡부대 소속이었다고 하는데 베트공의 습격을 받은 뒤 연락이 두절되어 어머니인 송민도가 가수 생활을 청산하고 직접 베트남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다행히 무사하였으나 그 일을 계기로 송민도는 아들 걱정에 베트남에 3년 이상 눌러앉게 된다.[5] 2006년 가요무대 1000회 기념 방송에 출연해 근황을 알린 적이 있긴 하다.[6] 100세 생일을 한 달 정도 앞둔 상황이었다.[7] 그 이후로 생존 중인 한국 가수 중 최고령 타이틀은 1927년생 명국환이 이었다가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났고 현재는 손목인의 아내 오정심이 최고령 가수다.[8] 공교롭게도 같은 해(2023년)에 사망했으며, 2023년 1월 11일에 92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