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2-13 16:12:15

송병엽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박창식(朴昌植)
본관 신평 송씨[1]
출생 1914년 9월 3일[2]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3]
사망 1967년 1월 22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송병일은 그의 4촌 동생이다.

2. 생애

1914년 9월 3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에서 아버지 송원식(宋瑗植, 1882. 1. 25 ~ 1939. 2. 13)과 어머니 수원 최씨(水原 崔氏, 1883. 6. 17 ~ 1931. 11. 17) 최봉휴(崔鳳休)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5년 10월 중순 4촌 동생 송병일이 자신의 주산리 자택에서 주산리에 이미 존재하는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를 이용해 겉으로는 '도박의 방지, 공동경작' 등 '생활개선'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할 것을 제안하자, 이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10월 17일 송병일의 자택에서 김영기(金永基) 등 십수 명과 다시 회합하여 '주산농촌진흥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같은 해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임원회를 개최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36년 1월 말, 송병일을 비롯한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장성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3일에는 송병일, 이종태(李鍾泰)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송병일과 함께 했던 활동은 인근 삼서면 남계리에서 1934년부터 동일한 성격으로 결성되어 활동한 노동회(勞動會)라는 비밀결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소위 '장성독서회(長城讀書會) 사건'으로 칭하였다.

이후 그는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1937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같은 날 광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67년 1월 22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송병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 참판공파 25세 병(炳) 항렬. 족보명은 송병엽(宋炳燁).[2] 신평송씨족보에는 1912년 7월 2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신평 송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