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4년 9월 25일[1]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2] | |
사망 | 미상 |
본관 | 신평 송씨[3] |
묘소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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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송병엽은 그의 4촌 형이다.
2. 생애
1914년 9월 25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에서 아버지 송은식(宋恩植, 1881. 2. 16 ~ 1934. 9. 14)[4]과 어머니 제주 고씨 장흥백파 고제열(高濟烈)[5]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6]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부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 학우 박정두(朴鼎斗)·이종태(李鍾泰) 등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 등 신사상을 학습했다. 중동학교 4학년 재학 중에는 학교를 중퇴하고, 1934년 4월 일본 도쿄로 유학했다가 1935년 5월 귀국한 후 고향인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비합법적 조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중순 주산리 자택에서 농민들과 회합하여, 각자가 거주하는 마을에 존재하는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를 이용해 겉으로는 '도박의 방지, 공동경작' 등 '생활개선'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관변조직인 농촌진흥회를 활용하여 각 부락마다 임원을 선임하고 매월 음력 15일에 임원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그 이면에서 의식의 교양과 동지 규합을 통해 결사를 조직하겠다는 취지였다. 같은 달 17일 송병일의 자택에서 김영기(金永基) 등 십수 명과 다시 회합하여 '주산농촌진흥회'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이후 같은 해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임원회를 개최하면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그는 1936년 1월 말,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장성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송병일은 같은 해 6월 3일 이종태(李鍾泰)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송병일 등의 활동은 인근 삼서면 남계리에서 1934년부터 동일한 성격으로 결성되어 활동한 노동회(勞動會)라는 비밀결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소위 '장성독서회(長城讀書會) 사건'으로 칭하였다.
이후 그는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1937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같은 날 광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1940년 징역 1년 6개월로 은사감형(恩賜減刑)된 사실이 확인되며, 이외의 행적 및 사망 날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송병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