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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4 16:15:43

숙명여자대학교/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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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상징 역대 총장 학부 대학원
캠퍼스 출신 인물 사건사고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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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총장3. 제1대 임숙재 총장4. 제13~16대 이경숙 총장5. 제17대 한영실 총장6. 제18대 황선혜 총장

1. 개요

숙명여자대학교의 역대 총장에 관한 내용입니다.

2. 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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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087>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rowcolor=#000,#fff> 임숙재 김두헌 김두종 김순식 윤태림
<rowcolor=#003087>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rowcolor=#000,#fff> 이인기 김경수 서명원 차낙훈 김옥렬
<rowcolor=#003087>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rowcolor=#000,#fff> 김옥렬 정규선 이경숙
<rowcolor=#003087>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rowcolor=#000,#fff> 이경숙 한영실 황선혜 강정애 장윤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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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대 임숙재 총장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십시오."

임숙재 총장이 학생들에게 항상 했다는 말.

임숙재는 1891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17살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2년 만에 신랑이 갑자기 죽어 19살 나이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죽은 신랑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던 어느날, 임숙재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거울 앞에 앉아 긴 댕기머리를 사정없이 잘라 버리고,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헤쳐나갈 방도를 곰곰히 생각했다. 친정으로 돌아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작정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낯설고 물설은 서울 생활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숙재는 이를 악물고 일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남의 집 빨래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부잣집 식모[1]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집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다행히 집 주인은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고, 임숙재를 인정해 주고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임숙재는 낮에는 식모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했는데, 최우수 학생이 되고 장학생이 되었을 정도로 성과를 올렸다.

1913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7년 도쿄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1년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2] 가사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1924년까지 숙명여고보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926년부터 1937년까지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3] 교유(敎諭)로 활동한 뒤,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敎授)가 되었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주최의 국민정신 선양 순회강연회 연사로 활동하는 한편, 1941년부터 1942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부인부 지도위원을 지냈다. 또한 1941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주최 시국대책 순회강연회 강사‧매일신보사 주최 부인시국대강연회 강사‧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부인대 지도윈원, 1942년 대일본부인회(大日本婦人會) 조선본부 이사,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이와 함께 「대동아전쟁 완수는 주부의 철저한 각오에서」‧「이기기 위하여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 등을 기고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고 선전하였다.(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1945년 해방과 함께 숙명여전은 숙명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임숙재 교수는 초대 학장이 되었다. 10년 동안 학장을 지내면서 숙명여자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1955년 드디어 숙명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3년 동안 총장을 지낸 후 1958년 9월에 정년퇴임하였다.

4. 제13~16대 이경숙 총장

경기여자고등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4] 무려 14년 반 동안 재임했으며, 임기 동안 수많은 건물을 세우고 숙명여대의 공간을 크게 확장하였다. 여대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기부금을 모았는데, 임기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사정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영어 몰입교육을 정책으로 수립하였는데, "'오렌지'가 아니라 어린쥐로 발음해야 한다"고 말해 조롱을 받았다. 후에 본인이 밝힌 바로는, 공청회 자리에서 학부모가 "'오렌지' 발음을 원어민과 가깝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어린쥐'라고 발음해준 것이 왜곡된 것이라고 하였다. #

5. 제17대 한영실 총장

재임 당시 경상대학 구조조정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구성원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후 재단 전입금 위장 문제 때문에 교육과학기술부에 의해 이용태 숙명학원 이사장이 취임승인 취소 처분을 받고, 한영실 총장도 긴급이사회에서 해임되는 등, 학내분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참고로 애칭(?)은 비타민 총장님. 이유? 정말 모르겠는가? #

6. 제18대 황선혜 총장

재임 당시 공과대학 신설을 주도하고, 임기 말에는 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PRIME) 사업 대형유형에 숙명여대가 선정되도록 하는 등 나름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만큼 학교의 재정적자를 심화시켰다는 비판 역시 함께 받았다. 또한 공대 신설을 위해 타 과의 입학정원을 갑자기 무리하게 축소하고 공대 자리를 위해 이전 과학관에 있던 몇몇 과를 강제 이주시키는 등 본인의 정책 추진을 위해 독단적인 행동을 많이 해 학생들과 교수들의 많은 지탄을 받았다. 또한 학생충원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원 남녀공학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학생들과 동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존재감이 거의 없어서인지 외부인들과 학교에 크게 관심없는 재학생들은 황 총장의 존재를 잘 모른다. 결국 이경숙 총장과 한영실 총장에 비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임기가 만료되었다.

[1] 임숙재 총장이 본래 '식모'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1950년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장난삼아 숙대를 '식모 숙대'라 부르기도 했다고.[2]오차노미즈여자대학[3]경북여자고등학교[4] 참고로 경기여자고등학교-숙명여자대학교 동문회의 별칭이 '경숙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