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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4:52:55

스탄 콜리모어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이름 스탄 콜리모어
Stan Collymore
본명 스탠리 빅토르 콜리모어
Stanley Victor Collymore
출생 1971년 1월 22일 ([age(1971-01-22)]세)
잉글랜드 스태퍼드셔주 스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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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7cm / 체중 77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월솔 FC (1990~1992/ 유스)
울버햄튼 원더러스 (1988~1989/ 유스)
스태퍼드 레인저스 (1989~1991)
크리스탈 팰리스 FC (1991~1992)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 (1992~1993)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3~1995)
리버풀 FC (1995~1997)
아스톤 빌라 FC (1997~2000)
풀럼 FC (1999 / 임대)
레스터 시티 FC (2000)
브래드포드 시티 AFC (2000~2001)
레알 오비에도 (2001)
국가대표 3경기 (잉글랜드 / 1995~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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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스트라이커.

2. 클럽 경력

2.1. 유스 경력

콜리모어는 잉글랜드 스태퍼드셔주의 스톤에서 바르바토스 국적의 아버지와 잉글랜드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아스톤 빌라의 팬이었다. 카녹 필러스와 팬크릿지 주니어스에서 스트라이커로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정식 유스 계약을 월솔 FC,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와 차례로 맺었다. 이 후 내셔널리그의 스태퍼드 레인저스에서 첫 성인 계약을 체결했다.

2.2. 크리스탈 팰리스 FC

스태퍼드 레인저스에서 뛰는 동안, 프리미어 리그크리스탈 팰리스 FC 스카우트되어 1991년 1월 4일, 19세의 나이로 영입되었다. 4월 23일 리버풀 FC과의 경기에서 76분에 교체 투입되었다. 2년 동안 크리스탈 팰리스 소속이었지만, 이안 라이트와 마크 브라이트에게 밀려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고, 20경기 1득점에 그치며 1992년 11월 팀을 떠났다.

2.3.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콜리모어는 당시 강등권에서 경쟁 중이었던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로 15만 유로에 이적했다. 콜리모어는 30경기에서 15골을 기록하며 사우스엔드를 15위에 올려놓으며 잔류시켰다. 훗날 콜리모어는 "사우스엔드를 잔류시키는데에 기여한 것은 나의 최고의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회고했다.

2.4. 노팅엄 포레스트 FC

사우스엔드에서 콜리모어의 활약은 프리미어리그의 아스톤 빌라와 당시 강등되었던 노팅엄 포레스트 등 여러 구단의 관심을 끌었고, 1993년 7월 5일 프랑크 클락 감독은 225만 유로에 그를 영입했다. 93/94시즌 28경기에서 19골을 기록하며 대활약했고, 피터버러 유나이티드 FC와의 1994년 4월 30일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의 3대2 승리를 만들었다. 이 경기로 노팅엄 포레스트는 승격을 확정지었다.

노팅엄에서의 프리미어 리그 첫 경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과의 1994년 8월 22일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콜리모어는 26분에 동점골을 기록하며 1대1을 만들었다. 콜리모어는 22골을 기록하였고, 포레스트는 3위로 시즌을 마치며 UEFA 컵에 진출하였다.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원들과 불화를 빚었고, 팀원들이 콜리모어와 세레머니하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마크 휴즈의 대체자를 찾고 있었고, 콜리모어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콜리모어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앤디 콜과 함께 알렉스 퍼거슨 경의 타겟으로 1994년 내내 언론에서 보도되었다. 그러나 결국 앤디 콜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영입되면서 노팅엄에 잔류했고, 시즌이 끝남에 따라 리버풀 FC, 뉴캐슬 유나이티드, 에버튼 FC이 콜리모어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2.5. 리버풀 FC

로이 에반스 감독은 콜리모어를 850만 유로에 영입하며 잉글랜드 이적 신기록을 갱신하였다. 콜리모어는 초기에는 이안 러쉬와 투톱을 이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 파울러와 투톱을 이뤘다. 1996년 4월 3일 리그 1위의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안필드 홈경기에서 4대3 승리의 결승골을 추가시간에 기록하며 뉴캐슬의 리그 우승을 저지했다.[1] 같은 해 5월 11일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A 컵 결승에서 격돌했다. 선발로 출전했으나 득점에 실패했고 74분, 이안 러쉬와 교체되었다.[2] 결국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에릭 칸토나가 결승골을 득점하며 리버풀은 시즌을 무관으로 마쳤다.

96/97 시즌에는 전반기 동안 리그 선두를 달렸지만, 1997년에 부진하면서 리그를 4위로 마쳤다. 득점 기록과는 별개로, 경기장 밖에서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조롱당했다.[3] 결국 로이 에반스의 신뢰를 잃은 콜리모어는 마이클 오언에 의해 대체되며 팀을 떠나게 된다.

2.6. 아스톤 빌라 FC

1997년 5월 16일 어린 시절 응원했었던 아스톤 빌라 FC에 1997년 5월 16일, 7백만 유로에 영입되었다. 8월 9일, 레스터 시티 FC와의 경기에서 데뷔했으나 팀은 1대0으로 패배했다. 8월 27일 토트넘 홋스퍼와의 경기에서 첫 득점을 올렸으나 팀은 3대2로 패배하였다. 10월 4일에는 볼튼 원더러스의 앤디 토드와 주먹다짐을 하며 3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아스톤 빌라에서 첫 시즌 부상과 폼 저하가 겹치며 6골 득점에 그쳤고, 드와이트 요크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하는데 실패하였다.

98/99 시즌에는 9경기 출장에 그쳤다. 1998년 11월 20일 리버풀 FC과의 경기에서 스티브 호크니스와 마이클 오언을 거친 태클로 부상시키며 퇴장되었다. 1999년 3월 21일 첼시 FC에게 3대0으로 패배한 경기를 끝으로 존 그레고리 감독은 그를 더 이상 기용하지 않았다.

2.7. 풀럼 FC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 FC로의 이적을 추진하였으나, 이적이 무산됨에 따라 풀럼 FC로 99/00시즌 초, 3개월 간 임대를 떠났다. 1백만 유로 영입 조항이 있었으나 인상을 남기는데 실패하며 완전 영입되지는 않았다.

2.8. 레스터 시티 FC

풀럼으로의 임대가 종료된 이후, 아스톤 빌라를 떠나기로 구단과 합의하였고, 1999년에는 유스팀과 함께 훈련하였다. 리그앙몽펠리에 HSC가 관심을 보였으나, 콜리모어가 입단 테스트를 거부하며 무산되었다. 브래드포드 시티 AFC 역시 영입을 시도했지만, 아스톤 빌라의 3백만 유로 요구을 충족하지 못했다. 2000년 2월 11일, 레스터 시티 FC에 합류하였다.

레스터 시티에서의 두 번째 경기에서 선덜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5대2 승리를 이끌었다. 4월 2일,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왼쪽 다리 골절로 17분만에 교체되었으며 99/00시즌에는 더 이상 출전하지 못했다.

00/01 시즌, 에밀 헤스키가 리버풀로 떠남에 따라 팀의 주전으로 발돋움 했다. 그러나 마틴 오닐 감독이 셀틱 FC로 떠났고, 새로 부임한 피터 테일러 감독이 아데 아킨비이를 영입함에 따라 주로 미드필드에서 교체로 출전하게 되었다. 2000년 9월 17일 스탠포드 브리지에서 첼시 FC를 상대로 득점하며 팀의 2대0 승리를 이끈 것이 마지막 득점이었다. 9월 24일 에버튼 FC와의 경기에서 폴 개스코인을 밟고 가격한 행위로 9월 28일 FA에게 징계를 받았다. 이틀 후, 콜리모어는 레스터 시티 FC에게 이적 요청을 제출했다. 이후 요청을 철회하였으나, 피터 테일러 감독은 콜리모어의 체력적 문제와 활동량을 문제 삼으며 이적 명단에 올렸다. 2000년 10월, 자유계약으로 레스터시티를 떠나기로 합의하였다.

2.9. 브래드포드 시티 AFC

2000년 10월 26일, 브래드포드 시티 AFC로 이적하였다. 데뷔전에서 웨스트 요크셔 더비 상대인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오버헤드킥 득점을 기록하면서 1대1 무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득점 이후의 도발적인 세레모니로 인해 리즈 팬들과 안전 요원 간의 충돌이 발생했고, 콜리모어 역시 FA에게 징계를 받게 되었다. 2001년에는 구단이 고주급자를 정리하면서 방출명단에 올랐다. 셀틱 FCVfB 슈투트가르트가 영입을 시도했으나 콜리모어는 레알 오비에도를 선택하였다.

2.10. 레알 오비에도

2001년 1월 31일, 레알 오비에도와 18개월 계약을 체결하였다. 2001년 2월 4일, 라스 팔마스에게 1대0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두 경기를 더 출전한 뒤인 2001년 3월 7일, 은퇴를 선언하였다.

3. 여담



[1] 우승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차지했다.[2] 이 경기는 이안 러쉬의 리버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3] 당시 스파이스 걸스라는 영국 걸그룹에 빗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