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21:37:01
1. 개요2. 스탠리 볼드윈 1차 내각3. 스탠리 볼드윈 2차 내각4. 3차 국민정부
스탠리 볼드윈을 총리로 한 내각을 다루는 문서.2. 스탠리 볼드윈 1차 내각
3. 스탠리 볼드윈 2차 내각
램지 맥도널드가 몰락한 이후 192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압승을 거둔다. 노동당은 20석까지 줄어들고 자유당은 100석 가까히 줄어들며 완전히 몰락한다. 이렇듯 자유당 내 보수파를 흡수하고 커진 보수당은 전 총리 스탠리 볼드윈을 다시 총리로 새우며 볼드윈은 9개월여만에 정권을 되찾는다.
4. 3차 국민정부
4.1. 반쪽뿐인 거국 내각
맥도널드 총리의 사임과 동시에 있었던 35년 서민원 선거로 추밀원 의장 스탠리 볼드윈의 3번째 임기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전의 2차 국민정부는 31년 선거의 압승에도 거국내각은 계획만큼 순항을 겪지 않았다. 우선 거국내각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보수당 중심의 내각이였고 대연정이라 볼 수 없었다. 물론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자유당과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국민노동당이 참여했으나 이들의 의석수는 보수당에 비해 한참이나 모잘랐다. 이런 상황에 독립자유당과 자유당은 합당하여 선명야당 노선을 전개하고 노동당도 약화된 당세를 재정비하였다. 35년 총선은 그 결과를 보여주듯 50석 안팍의 노동당이 154석까지 치고 올라왔다. 2차 국민정부 말부터 외교적 위기는 영국 정계에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히틀러의 집권과 연이은 숙청,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까지 전 세계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기미가 보였고 영국의 패권에도 심각한 위기로 작동했다. 이런 안보 위기를 등에 업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영국의 정치인들은 대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이 나라들을 제재하지 못했다. 이런 위기감에 스탠리 볼드윈은 불명예 사임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으나..그와중에 국내 대형 문제가 터지니 바로 에드워드 8세의 결혼 문제였다. 에드워드 8세는 이미 이혼 이력이 있던 심프슨 부인과 결혼을 희망하였고 영국 국왕은 성공회 교리르 따라야 하기에 부적격하다는 왕실의 주장이 많았고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의 국민들 역시 이 결혼에 반대했다. 보수당에서도 처칠을 비롯한 소수 리버럴을 제외하고는 이 결혼을 결사 반대했다. 볼드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길 자처하면서 에드위드 8세에게 결혼과 왕위 계승 중 하나만 선택하라 하였고 결국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고 그의 동생 조지 6세가 즉위한다. 이때 그는 칭병하여 사직하고 재무장관이자 공공보건 정책으로 인기가 높던 네빌 체임벌린을 다음 총리로 지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