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티나 성모 The Sistine Madonna | |
작가 | 라파엘로 산치오 |
제작 시기 | 1512년 - 13년 |
크기 | 265 x 196 cm |
소장 |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Gemäldegalerie Alte Meister), 드레스덴 |
1. 개요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성모자상 중 하나이며, 독일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에는 모나 리자, 피렌체에는 비너스의 탄생이 있다면 드레스덴에는 이 작품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이다.2. 제작 배경
교황 율리오 2세의 의뢰로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토 4세를 기리며 고향 피아첸차의 산 시스토 수도원(Monastery of San Sisto)에 봉헌하기 위해 제단화로 그려졌다. 이 수도원은 식스토 4세, 율리오 2세의 델라 로베레 가문과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수도원의 이름은 식스토 2세에서 유래했는데 이 그림의 이름인 'Sistine'은 '식스토'의 영어식 표현이다.율리오 2세는 그림을 의뢰하며 식스토 2세와 성 바르바라를 모두 묘사해달라고 했다. 바르바라는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성찬을 받지 못한) 수호성인이며 탑을 상징으로 한다. 당시 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교회 개혁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기에 역사적이고 구성적인 이유(식스토 2세와 균형을 이루는 여성 성인, 지도자와 순교자)로 선택된 것 같다.
3. 그림의 여정과 영향력
'시스티나 성모'는 피아첸차에서 250년 동안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성당에 제단화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1754년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인 아우구스투스 3세가 110,000 - 120,000 프랑이라는 금액으로 성당에서 그림을 구매하여 작센 영토에 있는 드레스덴으로 옮겨온다. 아돌프 멘젤의 기록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3세는 그림이 도착했을 때 '위대한 라파엘로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다고 한다.[1] 그리고 그림은 거대한 명성을 쌓아나간다.1764년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저서에서 이 그림을 칭송한 것을 시작으로 독일인들이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독일 사람들은 18세기 후반에 '라파엘로의 꿈'이라는 자신들만의 전설을 만들었는데 라파엘로가 꿈에서 천상의 환상을 보고 나서 이 성모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설은 점점 퍼져나가 스탕달 증후군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나타났는데, 그 중 한 명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환자가 되었다.
괴테는 예술이 단순한 모방을 넘어 이념적, 초월적 영역에 도달해야 한다고 보았고 '시스티나의 성모'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특히 그는 이 그림이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숭고함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라파엘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서 신성을 그려냈다."
- 괴테
- 괴테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편지에서 '시스티나 성모'를 언급하며 라파엘로가 단순한 기법이 아닌 영감을 통해 신성을 표현했다고 했다.
"이 그림은 신비로운 음악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우주가 노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 바그너
-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림을 감상하고 난 젊은 시절에는 '고귀한 인간의 이상을 본다.'고 언급했으나, 후기에 철학적 입장이 변화하면서 [2] '라파엘로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창조했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서 기독교적 나약함을 본다.'고 했다.
1849년에 드레스덴 봉기가 있었는데 훗날 미하일 바쿠닌는 "혁명 정부에게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를 미술관에서 꺼내어 도시 입구의 바리케이드에 걸어두라고 조언했다. 프로이센 사람들은 너무 교양 있어서 '라파엘로에게 감히 발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회상했다. 다만 실제 그것이 실행된 것은 아니다.
'시스티나 성모'는 계속 드레스덴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에 3일 동안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이 일어났다. 운 좋게도 '시스티나 성모'는 폭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림은 작센 스위스의 터널에 보관되었다가 소련군이 발견하여 모스크바로 옮겨져 1946년부터 '푸시킨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전시되었을 때 그림을 감상하고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계시'라고 언급했다. 1955년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과 독일 국민들 사이의 우정을 강화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품을 독일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소련을 제외한 전 세계의 언론들은 '시스티나 성모'를 포함한 드레스덴 예술 컬렉션이 소련의 보관 과정에서 손상되었다고 보도했고, 소련은 자신들이 온습도가 조절되지 않는 터널에서 예술품을 구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훗날의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스티나 성모'는 다른 그림들과 함께 습도, 온도 등을 모니터링하는 다양한 장비가 있는 건조한 터널에 있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림의 발견과 구출 과정도 전설이 되었다.
이후 그림은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의 대표 작품 답게 홈페이지에서 파노라마 뷰를 보면 가장 깊숙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 작품의 구성
그림의 중앙에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구름 위에 서있다. 성모는 엄숙하면서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라파엘로의 빼어난 표현을 보여준다. 성모의 얼굴을 라파엘로의 연인 마르가리타로 추정된다.[3]좌측에는 식스토 2세가 교황의 관을 벗고 경외의 자세로 성모를 바라보며, 바르바라 성인은 우측에서 공경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다. 바르바라 성인의 뒤에는 성인의 상징인 탑도 그려져 있다. 성모의 옆에는 녹색의 커튼이 열린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 커튼은 그림이 본디 놓여져 있을 자리를 보면 의미가 다가온다.[4]
그림의 양측에는 창이 있어서 그림도 창의 하나로 보인다. 라파엘로는 창의 커튼이 걷히며 성모자가 강림하고 식스토 2세와 바르바라가 맞이하는 모습을 의도한 것이다. 창 아래에 아기 천사 두 명 또한 아래에서 신자들이 올려다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기 천사는 1803년에 처음으로 그림에서 분리되어 복제되기 시작했다. 도자기와 장신구에 장식 모티브로 쓰이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엠블럼, 자수, 침대 시트, 파자마에도 쓰이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무수한 곳에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엔제리너스 커피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에는 천사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구름이 있으며 성모 주위로도 신성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