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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지구전투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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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지구전투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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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일 1950년 6월 28일
해체일 1950년 7월 5일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대한민국 육군본부
종류 사령부
규모 군단
역할 한강 이남 방어
초대 사령관 예) 중장 김홍일(육사 7기)
해체 전 사령관
위치 서울특별시 금천구[1]
1. 개요2. 배경3. 국군 재편성4. 부대 배치
4.1. 김포지구4.2. 영등포 지구4.3. 노량진지구4.4. 강남지구4.5. 이천-용인지구
5. 시간경과
5.1. 6월 28일5.2. 6월 29일5.3. 6월 30일5.4. 7월 1일5.5. 7월 2일5.6. 7월 3일5.7. 7월 4일5.8. 7월 5일
6. 마무리 및 의의

[clearfix]

1. 개요

6.25 전쟁당시 서울함락 직후 한강이남으로 붕괴된 채 후퇴한 국군병력을 재편성 및 전선으로 복귀시켜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기 위해 편성된 조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군단급 부대이다. 1950년 6월 28일 설립되어 7월 6일 지금의 제1군단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2. 배경

전쟁 발발후 국군용사들은 적 탱크를 막기 위해 육탄까지 쓰면서 저항했지만 북한군의 엄청난 기갑전력과 통신 불능으로 인한 지휘체계의 붕괴, 정보부족으로 인한 오판등으로 인해 28일 10시 서울의 중심부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통제하는 연대급 이상의 부대가 독립기갑연대 밖에 없는 상태에서 육군 총참모장(현재는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시흥보병학교에 서부전선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립하고 중일전쟁때 유일하게 사단급이상의 부대를 지휘해본 김홍일 소장에게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장을 맡긴다. 참모장은 김종갑 대령. 사령부 인원은 영등포-수원길에서 후퇴하는 장병들을 뽑아서 구성했다.

3. 국군 재편성

6월 28일 오전 9시 한강대교 북단에 적 전차가 나타난 시점에 한강이남에 육본의 통제하에 있던 부대는 의정부에서 육본의 철수명령에 의해 영등포로 후퇴한 독립기갑연대(장, 유흥수 대령)과 미아리에서 철수한 16연대 1대대(-1), 8연대1,3대대, 전주에서 급히 올라온 15연대 1대대, 육본 헌병대, 그리고 4개중대로 재편된 공병대대밖에 없었다. 이들부대는 상하로만 연락이 가능했지, 횡으로는 협력이 불가능해서 조직적인 적의 도하차단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홍일 소장은 위의 부대들로 하여금 적의 탐색도하를 막게 하였고 그사이 미군 참전을 알리는 속보를 알리고 시흥보병학교와 수원 국민학교(육본 임시 주둔지. 7월 3일에는 평택으로 후퇴.)등지에 주먹밥을 쌓아올리고 후퇴한 국군에게 나눠주면서 휴식과 함께 재편성/재정비를 취하게 하여 사기와 전투력을 올렸다.

4. 부대 배치

4.1. 김포지구

4.2. 영등포 지구

4.3. 노량진지구

4.4. 강남지구

4.5. 이천-용인지구

5. 시간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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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렁부가 창설되다. 영등포에 독립기갑연대 제1장갑대대와 8연대 1, 3대대를 김포에는 기존의 김포지구사령부에 독립기갑연대 제3보병대대(경보병수색대대 기능)를 노량진 한강대교 철교 부근엔 공병대대를 동작동엔 15연대 1대대, 신사동에는 독립기갑연대 제2기마대대, 과천엔 16연대(-1), 광나루에는 육사생도대를 배치하였다. 제2기병대대는 한강이북 한남동, 이촌동 일대에 정찰임무 수행하고 복귀.

대전으로 긴급 이동한 공군본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T-6 1대(106번기, 건국기)가 한강선을 관찰하다가 노량진 상공에서 북한군 야크기에 의해 날개에 손상을 입고 격추될 뻔했으나 다행히 미공군의 F-80기가 이들을 물리쳤다. T-6기는 수원 비행장에 무사히 비상착륙했다. 북한군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날 서울시내에 숨은 국군장병, 경찰, 공무원, 반공인사 검거작전이 실시됐다. 체포된 모든 국군장교는 무조건 현장에서 즉결처형당했고 나머지는 인민재판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5.2.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이 한강선을 시찰했다. 29일 아침에 수원비행장에 착륙한 바탄에서 내린 맥아더 장군은 수원농업학교에 설치된 ASCOM(미 전방지휘소)에 들른 후 수원국민학교에 설치된 육군본부에 가 채병덕의 보고를 듣고 나서 직접 한강선에 갔으나 엄청난 포격으로 인하여 동양맥주공장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김홍일 장군의 방어작전계획을 듣고 감탄했으며, 그곳에서 그 유명한 한국군 중사의 결의를 듣고 나서 도쿄로 귀환했다. 그 직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연합군 점령 일본 통치 기구. 1950년 7월 7일 도쿄에서 창설된 6.25의 연합군(UN군) 사령부와 다름.)에서 본국과의 극비 텔레타이프 회의(타이퍼는 타자기. A와 B가 텔레타잎을 쓴다면 A에서 메세지를 타이프로 쓰면 무선으로 정보가 상대의 기계로 가서 영사기로 상영되고 똑같은 방법으로 대답.)를 통해 일본의 안전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주일미군의 파병을 허가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또한 이날 낮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까지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어 그를 해임했고 후임으로는 그날 미국에서 귀환한 채병덕 총장의 후배인 정일권 소장을 임명하였다. 이 명령은 30일 0시 효력을 발하였다.

5.3. 6월 30일

이날 미 공군 폭격기한강철교에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경인상행선은 일부 침목이 날아갔을 뿐, 완전히 절단되지 않았다.

북한군이 이날 아침 반포리에 도하를 시도하였다. 독립기갑연대 제2기마대대는 이를 막아내어 적을 수장시켰다. 이날 점심 적은 남산에 배치된 포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도하를 다시 시도했다. 엄청난 포격에 말들은 놀라 우왕자왕했고 결국 제 2기마대대는 과천의 2사단 사령부로 후퇴하였다. 이날 정오에는 역삼리에 위치한 국군 3연대가 반격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5.4. 7월 1일

이날 북한군은 서부전선 전체에 걸쳐서 총공세를 시작했다. 김포비행장을 재점령한 북한 6사단은 오류동을 향한 총공격에 나섰고 서울의 북한 3사단은 여의도 북단에 교두보를 세웠으며 이촌동의 적은 동작동 강변에 교두보를 강화, 15연대를 공격했고 신사리의 적은 말죽거리 북방의 제5연대를 공격하였다.

5.5. 7월 2일

마침내 한강방어선이 돌파되었다. 오전 6시 북한군은 전날 미공군이 기상악화로 한강철교 폭격을 중단한 사이 어긋난 부분을 긴급보수해서 탱크 4대를 도하시켰다. 각 부대에는 동요가 일어났고 결국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모든 부대에게 시흥(지금의 서울 금천구 일대)으로의 후퇴를 명령했다. 사령부는 이날 오후 수원으로 퇴각했다. 독립기갑연대는 타 부대가 후퇴하는 사이 전선에서 시간을 끌면서 지연전을 펼치기로 결정되었다.

5.6. 7월 3일

이날 8시 적은 탱크를 앞세우고 경부국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수원이남은 후퇴하는 군경과 피난민, 물자와 차량으로 막혔다. 시흥에서 그리고 안양에서 독립기갑연대와 제2사단 5연대가 2시간동안 적을 막았으나 결국 뚫렸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평택으로 후퇴하였다. 이날 24시 수원은 함락되었다. 미 스미스부대는 북오산에서 진지를 팠다.

5.7. 7월 4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이날 충북 음성군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이날 미군 제24사단의 스미스부대는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으나 패하였다. 미군의 2.36인치 M-9로켓포를 맞고도 파괴되지 않은 북한군 탱크는 후방의 미군 포병대를 유린하였고 엄청난 수의 북한군이 돌격하여 수백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남긴 채 미군은 평택으로 후퇴했다.

5.8. 7월 5일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명에 의하여 제1군단으로 전환된다. 예하부대는 육군 제 1, 2, 수도사단 그리고 독립기갑연대. 이날 대한민국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는 평택에서 대전 충남도청으로 이전했다. 이날 평택에서 마지막 피난열차가 떠났다. 평택 북방에서 미 24사단 34연대는 북한군에게 패했다.

6. 마무리 및 의의

김홍일 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덕에 국군은 북한군을 6일이나 막아내 미군 참전의 시간을 벌었고 국군에게 탱크없는 북한군은 인간표적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줘 사기를 올렸고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에서 재편성할[5] 시간을 만들어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성공했고 국제연합이 한국의 저항의지를 확인해서 참전할 명분을 줘 김일성의 한반도 공산화란 야욕을 막았다.

[1] 이 문서에서의 시흥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이 아닌, 금천구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관악구, 광명시, 안양시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2] 이 사람은 전쟁 발발전 남산학교장에 임명된 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 대위 지휘참모과정(구.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파견교육을 받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급히 김포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북한군이 김포로 몰려오자 탈출하여 부산으로 튀었다가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군사분야에 정통한 한국인 정보통이 필요했던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계인주를 적격으로 점찍어서 그의 신병을 인수해 가버리는 바람에 천운으로 사형집행을 면할 수 있었다. 그후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미군에게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등 도움을 주며 미군 수뇌부 측의 신뢰를 얻었고, 미군이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의 팔미도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도 이미 저지른 군무이탈죄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으로부터는 불명예 제대당했으나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조력자로 일했고, 미군 극동군사령부가 운용했던 켈로부대의 부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국군에서도 인정했는지 1951년 11월에 그를 사면해줬고 육군 장교직으로 복권도 시켜줬으나 계인주는 국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미군 극동군사령부에서 일하다가 1953년에 예편했다.[3] 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가 부산으로 튀자 그를 대신하여 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몰려드는 북한군의 상황에 절망하여 임명 하루만에 자살하였다.[4] 서부전선에서 사단급 이상의 부대 중 유일하게 부대 건제를 유지한 부대다. 1사단을 제외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된 다른 사단들을 보면 모두 "혼성"이 붙어있는데, 이는 병력 원소속과는 상관 없이 낙오병이 모이는대로 당장 필요한 부대에 대충 찢어다 보내서 편성시킨 부대였기 때문이다. 의정부 축선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타 사단과는 달리 1사단은 파주-봉일천 일대에서 성공적인 방어전투를 치렀기에 한강 도하 과정에서 병력이 흩어졌음에도 빠르게 재집결 및 재편성이 가능했고, 덕분에 유일하게 제11, 12, 13연대의 원 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5] 거짓말은 아닌 게 6월 28일 대전에 위치한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과 보건사회부장관, 서울시장 이기붕, 충남도지사 밖에 없는 참담한 구성이었는데 한강선에서 시간을 벌고 피난민을 호위해서 정부 구성원들이 모일 시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