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92년[1] 12월 25일 |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모현리 (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2] 391번지) | |
사망 | 1981년 4월 14일 (향년 88세) |
전라남도 장성군 | |
본관 | 고령 신씨[3] |
자 | 성도(聖禱) |
호 | 후송(後松) |
가족 | 배우자 이경자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34호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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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92년 12월 25일 전라도 장성도호부 북이면 모현리(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391번지)에서 아버지 송비(松비) 신석휴(申錫休, 1854.1.4. ~ 1933.)[4]와 어머니 제주 고씨(1853.10.27. ~ ?)[5]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저녁 신경식(申耕植, 1876.7.6. ~ ?)[6]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신국호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상우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4월 14일에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사망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4년 11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