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신태식(申台植) |
자 | 영옥(暎玉) |
본관 | 고령 신씨[1] |
생몰 | 1890년 3월 15일 ~ 1944년 12월 22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2] |
사망지 | 전라남도 장성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신태식은 1890년 3월 15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봉우(申鳳雨)와 어머니 전의 이씨 이봉선(李鳳宣)의 딸 사이의 2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저녁 신경식(申耕植)·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이 지방의 고유 풍속인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박승화(朴承化)의 집앞 냇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국담을 나눴다.
이때 고용석과 유상설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약소국가의 독립을 승인하고 있으며 조선도 독립을 승인받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즉석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는데 찬성하였다. 이에 정병모는 2백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 자신이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모현리 일대를 시위행진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가리 헌병주재소 일본 헌병들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주동자로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상우 등과 다시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며,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전날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분대를 불러들여 총검을 휘두르며 만행을 저질러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시위는 강제해산 되고,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결국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12월 2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태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