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이 신한승, 우측은 송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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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승(辛漢承)(1928년 ~ 1987년)국가 무형 문화재 76호인 태껸의 초대 예능 보유자. 호는 송암(松菴).
2. 생애
본인 말에 의하면 서울 왕십리에 살던 신한승이 태껸을 처음 접한건 어렸을 때로 자신의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였다고 한다. 작은 할아버지는 부자로 무술 보는걸 좋아해 사랑방에 태껸꾼 외에도 씨름꾼, 활잡이 등 손님들이 으레 있었다고 한다. 허나 이 당시만 해도 신한승은 이들을 반건달 패거리쯤으로 여겨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계속 보다보니 가끔씩 흉내도 내보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통에 작은 할아버지 집에 지내게 되면서 몇개월 정도 배웠다고 한다. 정식으로 배운건 아니고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나이먹은 태껸꾼들이 오다가다 그 자세 아니라고 훈수 두는 정도였다고.그러다 해방이 되고 집에 돌아오면서부턴 태껸 대신 레슬링에 흥미를 가져 1956년 멜버른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에도 나갔으나 최종 선발전에서 탈락하고 이후 유도도 배웠다. 그러다 마흔 무렵 되었을때 전통무술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생겨나 어렸을 때 보았던 태껸을 어떻게든 배우고 알리고 싶어서 이 사람 저 사람 알아봤지만 어릴 때 자신이 봤던 태껸이 아니라 실망하던 중 송덕기의 존재를 알고 1970년 무렵 찾아가 3년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자신이 살던 충주로 내려가 당시 신민당 관사를 빌려 애들을 가르쳤는데, 상당수 애들이 동작이 어려워 흥미를 가지지 못하자 고심하던 차에 친구의 아버지인 구리개 태껸의 명인이라는 김홍식을 알게 되고 그에게도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1] 김홍식은 옛 방식 그대로 하면 애들이 너무 어려워할테니 기본기를 먼저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나중에 가르치는게 어떻냐는 조언을 했고, 신한승도 이를 받아들여 몇가지 기본기를 간추려 송덕기에게 선보였더니 송덕기도 허락했다고.
신한승은 이 외에도 다른 태껸의 흔적을 더 찾고 싶은 마음에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으며, 다른 전통 무술의 존재나 태껸과의 연관성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2] 수벽치기라는 무예를 찾아 다니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 수벽치기가 과거 문헌에 나오는 수박(희) 아닐까 하는 생각에 찾아다닌듯 싶다. 물론 그 수박은 아닌 것 같지만 하여튼 지금은 신한승의 제자 육태안의 수벽치기 단체가 계통을 잇고 있다. 결련택견협회 도기현 회장의 저서를 보면 선무도 설적운 스님과의 에피소드도 나와 있다.
택견 수제자로는 정경화, 박만엽이 있다. 1995년 정경화는 2대 택견보유자로 인정받았고, 1996년 박만엽은 전수조교로 인정되지만 이후 전수조교를 반납하고 충북도 무형문화재를 신청한다. 이후로도 둘 다 한국택견협회를 발족시키는 등 택견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한택견회 이용복 전 회장도 신한승에게 몇개월 배운 바 있다고 알려져있다.[3]
자녀는 아들만 3명이지만 신한승이 택견 정립에 몰두하느라 집안살림을 잘 돌보지 않아 세명 모두 택견을 전수하지 않았으며 조카인 신종근이 전수하였다.[4] 신종근은 2020년 국가무형문화재 택견의 전승교육사(전수조교)로 인정되었다.
3. 송덕기와의 이론 대립
1985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택견 대회가 끝난 후, 회식 자리에서 당시 태껸의 경기에 불만을 가진 송덕기에게 태껸스럽게 하려면 활개짓을 더 잘해야 된다고 했다가, 송덕기에게 "태껸은 품만 잘 밟으면 돼!! 왜 없는 동작을 자꾸 만들려고 해!!!"라는 일갈을 받아 머쓱했다던 일화가 있다.송덕기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도 한데, 자신한테 태껸을 배운 제자가 자신이 단 한번도 배우거나 가르친 적도 없는 이론을 들고 나와 단순히 "이렇게 해야 멋있다." 수준을 넘어 아예 "이렇게 해야 태껸스럽다."라고 스승을 역으로 가르치려 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해당 일화가 사실이라면, 신한승은 사실상 "스승님이 가르치는 태껸보다 제 태껸이 더 태껸다워요."라고 일종의 하극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활개짓의 동작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말 그런 동작을 김홍식 등에게 참고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고집인지는 지금 와서는 알 수가 없다.[5]
또 신한승은 태껸 특유의 기합(?)을 "이크 에크" 라고 하였다. 때문에 신한승 계열의 택견인 대한택견회와 한국택견협회가 지금도 이런 기합을 넣는다. 그런데 송덕기는 "이크"라고만 하였고 도기현 회장은 저서에서 이에 대해 '맞다, 틀리다'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송덕기 자신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6]
4. 신한승식 택견 정립
신한승식 택견은 송덕기식 택견의 부드러운 몸짓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신한승이 송덕기로부터 진득하게 원형 그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전국을 떠돌면서 여러 무술가들을 만나고 태껸을 연구하면서, 태껸꾼 개인의 변형된 독자적 스타일이나 혹은 다른 지방의 무술 형태가 유입된 탓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무도가들은 사상의 차이에서 나오는 몸동작의 다름이라고 보기도 하고, 그냥 못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 등 여러 의견이 있다.문화재청 측에서 태껸이 기술이 적고 '형'이 없어서 문화재 지정이 난감하다고 하자 다른 무술의 기술들을 일부 도입하고 투로인 본때뵈기 12마당을 만들었다. 일단 신한승의 이러한 노력 덕에 태껸이 문화재 지정이 되었지만 당연히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선 태껸의 기술 수가 적다는 것 자체가 이미 틀린 말이다. 택견의 기술 수는 과연 적은가? 참조. 또 본때뵈기 12마당의 진행이 품을 아래로 밟는 굴신동작이 아니라 위로 몸을 움직이는 구조라서 기본적으로 굼실거리며 아래로 밟으며 기술이 나가는 송덕기의 태껸과는 전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 송덕기는 품을 밟으며 중심을 낮추는데 이 본때뵈기 마당에서 걸음을 나아갈 때는 오히려 중심을 높여버린다는 문제점이 있다.
결련택견을 '결연 택견' 이라고 해석하여 '결연하게 하는 태껸' 즉 싸움수까지 포함한 무술 태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고[7] 이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대한택견연맹에서는 이에 반발해 문화재 관리국에 질의를 보내 결연 택견은 오류가 확실하며 결련 택견은 마을에서 주거니받거니 하는 택견의 방식이라는 답변을 얻은 적이 있었다. 허나 송덕기가 과거 인터뷰에서 '호신술로 하던 택견을 결련택견이라 했다'라고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 관리국이 잘못 알고 있던 것 아닌가 싶다.
5. 평가
상기했듯 신한승 택견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있지만, 동영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송덕기의 택견과 다른 점들에 대한 건전한 토론과 비판이 있어야 택견계의 갈등도 줄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본때뵈기 열두 마당처럼 원형에 없던 요소를 추가한 것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 신한승이 그런 것을 숨겼던 것도 아니고, 송덕기가 보여준 거랑 다르면 무조건 '날조', 문헌에 안 나온 얘기를 하면 '거짓말'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통합을 운운하려면 그 정도 기본적인 존중은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활개짓 문제의 경우 도기현은 본인에게 한 말 다르고 나중에 공개적으로 한 말 다르다며 신한승을 사기꾼 비슷하게 몰아갔는데[8], 태권도 선수들의 상단 발차기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필요성에 따라 자신이 예전에 김홍식에게 들은 것을 적용해 보았다고 한다면, 앞뒤가 무조건 안 맞을 것도 없다.[9] 송덕기 택견에 대해서라면 직접 배웠으니 할 말이 있겠지만 신한승이 송덕기 외 귀동냥한 것에 대해서도, 한 예로 신한승이 어렸을 때 택견을 제대로 전수받았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태껸꾼들 하는 걸 좀 보고 흉내 내봤다는 얘기조차 못 미덥다는 식으로 증거가 없느니 하는건 지나친 감이 있다.
비판과 별개로 어쨌든 오늘날 태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10], 신한승이 열심히 뛰지 않았다면 태껸은 오늘날 서울에서만 간신히 목숨을 이어나가는 작은 유파에 불과하거나 심하면 택견의 역사성에 집착하는 태권도에 흡수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오늘날 '지방의 모 태권도장에서는 옛날 태권도인 태껸을 수련함으로 경기에 치우친 태권도에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어쩌고 하는 말을 떠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한승이 가산을 날려가면서까지 애쓴 결과 태껸은 무형문화재가 되었고, 그는 이 소식에 감격해 신문을 보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허나 하도 고생해서 그런지 대장암에 걸렸고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송덕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먼저 사망하고 말았다.[11] 이렇듯 신한승의 발로 뛴 역사는 어찌됐든 평가받아 마땅하며 현대 태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도 확실하다.
대한택견회와 결련택견협회가 각각 이용복이 독자적으로 정립한 택견의 우수성과 송덕기 원형 택견의 전승을 선전하며 각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신한승을 '공공의 적'(...) 비슷하게 취급하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폄하된 감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결련(결연)택견에 대한 설명은 신한승이 옳았음이 거의 밝혀졌음에도 양 단체는 여전히 신한승은 물론이고 송덕기까지 깎아내리면서
[1] 다만 명인이라고 하기엔, 김홍식 옹 본인부터가 '김명곤(1977)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은 휙휙 날라댕기는 고수들 보며 택견을 배우길 원했으나 확실한 스승을 못구했고, 그러다보니 동네 태껸꾼들 하는걸 어설프게 흉내내면 그들이 오다가다 훈수 한번씩 두는 식으로 배워 깊은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진지하게 배우려니 부모님이 그런건 건달들이나 하는거라고 배우지 말라고 야단이시고, 당시 일제 순사들도 택견꾼만 보이면 죄다 때려잡으려 했기 때문에 이후 유도로 빠졌다고.[2] 다만 탈춤과 태껸이 신라 화랑 무예를 모체로 나뉘어졌다는 식의 국뽕성 주장에는 문헌 기록도 없고 별로 닮은 것 같지도 않다며 동의하지 않았다.[3] 다만 정경화, 박만엽이 이끄는 한국택견협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용복은 본인이 직접 배우긴 커녕 "제자들만 3개월 정도 단기교습 보낸 뒤 본인이 사범임을 자처하면서 협회를 세웠다."고 한다. 물론 정경화와 이용복 사이가 좋지 않다는걸 감안해야 되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사이가 좋은게 더 이상할 것이다.[4] 예능 1박 2일 2021년 9월 12일 방송분에 택견과 관련해서 출연했다. 신한승이 자신에게 큰아버지라고 한다.[5] 도기현의 회상에 따르면, 1983년쯤 도기현이 신한승에게 '송덕기 스승님은 활갯짓을 어깨 위로 올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왜 그렇게 하느냐' 고 물었더니 '태권도 수련생 vs 택견 수련생' 겨루기를 시켜 볼 때마다 택견하는 아이들이 붙으면 태권도 수련생들을 곧잘 잡아 넘기지만 거리가 떨어지면 태권도 수련생의 돌려차기 등의 공격에 얼굴을 자주 맞아 이에 얼굴 방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전통을 떠나 자기 나름대로 실전 진화한 스타일일지도..? 다만 오늘날 MMA적 시각에서 보자면 활개짓도 가드의 효율성은 떨어지는 동작이긴 하다. 결론은 MMA에서 품밟기만 잘하면 현대식 택견?[6] 사실 '이크'보단 뱃심을 이용한 '잌(흐)'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하다. 기합의 용례에 대해서는 택견의 기합은? 참조.[7] 김홍식의 말에 의하면, 웃대와 아랫대가 감정이 격해져 진짜 죽기살기 격투로 싸울 때 '결연 태껸'을 했다고 한다. 놀이로 하는 넘어지면 지는 태껸은 '서기 태껸'이라 불렀다고. 다만 문밖의 사람이 도전해올 땐 웃대, 아랫대도 한편이 되어 겨뤘다고 한다.[8] 물론 이건 좀 과한 표현으로 도기현이 사기꾼이라고 몬 것은 아니고, 신한승 선생님의 택견에 대한 헌신과 업적은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왜 선생님이 자신이 보기엔 미스테리한 행동을 하셨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다.[9] 다만 도기현 말에 따르면, 신한승은 얼굴 방어 동작을 무턱대고 만든 것이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인 삼실총(三室塚)에 있는 역사(力士)의 활개짓 비슷한 동작을 참고하여 활개를 들어올리는 동작을 만들었다고 밝혔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김홍식한테 영향을 받은건지는 미지수다.[10] 물론 당시 신한승의 공헌과 별개로, 영상 기술 발달 등으로 실전 가능성은 거의 없어진 오늘날 들어선 무형문화재에 대한 중요도 자체가 좀 줄어든 감은 있다.[11] 송덕기 옹이 먼저 타계하고 2개월 후 사망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