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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2 00:20:41

도기현

파일:external/www.mookas.com/dokihen_m.jpg
도기현都基鉉
1961년 ~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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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결련택견협회의 회장.

2. 상세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태권도, 쿵후, 검도 등을 수련했고 이후 연세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하였다. 대학 진학 후 태껸에 관심을 가지다가 우연히 미용실에서 송덕기에 대한 잡지 인터뷰 기사를 발견하고 찾아간 것이 태껸과의 인연의 시작이라고 한다.

태껸에 대해서 막연하게 신비한 무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찾아갔다가 전혀 신비스럽지 않은(...) 송덕기의 모습과 태껸에 실망도 했으나 오래도록 염원하던 태껸을 조금만 더 하자 조금만 더하자를 반복하다가 오늘날도 조금만 더 하고 있다(...)

어쨌든 택견계승회라는 단체도 결성하고 총무도 맡고 또 대학생의 신분이다보니 거의 날이면 날마다 송덕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현재 메이저 택견협회의 수장들 중 가장 송덕기의 증언과 기술을 많이 알고 있다. 신한승이 충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배우고 또 다른 전통무술을 찾아서 전국을 누빈 것과는 달리 측근에서 송덕기에게 배웠기 때문에 정통성 면에서 가장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거기서도 한복을 입고 태껸수련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한 무술 세미나가 열렸고 거기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당시 세미나 비용인 현찰 100달러라는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중 본인에게 오히려 태껸의 시범을 부탁하여 참가했다. 타 무술 고단자들의 시범에 잠시 주눅이 들기도 했으나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태껸에 대해 뭘 알겠어?'하며 시범을 보였고 그 뒤 관심을 받게 되었다. 독특한 굼실거림을 항상 유지하면서도 날카롭고 빠르게 나가는 아랫발질과 윗발질, 그리고 태질로의 연결은 다른 무술들이 보았을 때 정말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무술들은 하체를 굳건하게 하고 그 힘을 끌어올려 상체로 기술을 풀지만 태껸은 오히려 품밟기를 통해서 그런 하체를 공격하면서도 공방에 유용할 수 있으니 타 무술 고단자들이 보기에는 완전한 역발상의 무술이었던 것이다. 길거리 시범이었다면 구경꾼들이 보는 눈이 없어 오히려 이런 반응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시범 뒤 자신감이 붙어서 태껸 클럽도 결성하는 등 활발하게 태껸을 전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각성하고 자신이 지도하다가 모르는 점, 궁금한 점을 잔뜩 적어서 유학에서 돌아가자마자 송덕기에게 득달같이 달려갈 예정이었으나 이 와중에 송덕기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와해될 뻔한 택견계승회, 그리고 송덕기가 유명을 달리 하고 신한승이 개조한 태껸만이 마치 진짜 태껸이라고 남은 모습을 보고는 태껸인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결련택견계승회를 결성해 오늘날 결련택견협회까지 이르고 있다.

언론매체에는 진정한 송덕기의 수제자, 태껸의 진정한 적통자 등으로 나가고 있으나 그것은 기사일 뿐이고 막상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해 보면 본인도 모든 것을 다 배웠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한풀이라는 단체에서 태껸에 대한 책(태견)을 낸다고 하자 오히려 "내가 배우지 못한 스승님의 기술들이 있을 수 있으니 관심을 가져봐라."라고 당시 겨울방학 대학생 집중훈련시간에 말하기도 했다.[1] 다만 본인이 태껸의 가장 기본적인 몸짓이 되는 품밟기는 제대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한 때 주변의 다른 무술인들이 하도 "도기현은 송덕기가 다 늙었을 때 배워서 태껸을 잘못 배웠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서 광복 후 처음 송덕기에게 태껸을 배웠던 박철희, 김병수, 임창수를 만나 자신의 몸짓이 젊은 시절 송덕기의 몸짓과 같다는 증언을 얻었다.

송덕기에 대한 애착은 세 단체 수장 중에 으뜸이라고 할만하다. 송덕기의 사망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점을 발견하여 수정한 것도 그이며 또한 송덕기의 이장을 맡아서 한 것도 도기현이다. 또 매년 송덕기 추모행사를 하고 가장 메이저 대회이자 권위있는 대회를 추모대회로 할 정도. 2005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택견 수련터인 감투바위 수련터를 복원했다.

언론매체의 가감이 없는 무진이 진행했던 도기현과의 인터뷰.


[1] 다만 2002년 당시 책이 나왔을때만 그렇고 현재는 매우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