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9:03:58

방언(기독교)

심령기도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지역 또는 사회 계층에 따라 분화된 언어의 체계에 대한 내용은 방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묘사
2.1. 구약 이사야의 묘사2.2. 구약 요엘의 묘사2.3. 신약 사도행전의 묘사2.4. 신약 코린토서의 묘사
3. 방언과 성령 운동의 역사4. 신학적 해석5. 양태6. 폐해7. 중요한 건 사랑이다8. 신사도 운동과의 관련성

1. 개요

영어: glossolalia, gift of tongues
한자:

성령은사 중 하나이다.

2. 묘사

2.1. 구약 이사야의 묘사

7 유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린다. 제사장과 예언자가 독한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포도주 항아리에 빠졌다. 독한 술에 취하여 휘청거리니, 환상을 제대로 못 보며, 판결을 올바로 하지 못한다.
8 술상마다 토한 것이 가득하여, 더럽지 않은 곳이 없다.
9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10 저 자는 우리에게, 한 자 한 자, 한 절 한 절, 한 장 한 장("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가르치려고 한다."
11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씨와 다른 나라 말로 이 백성을 가르치실 것이다.
12 주님께서 전에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고달픈 사람들은 편히 쉬어라. 이 곳은 평안히 쉴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13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그래서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다치게 하시고, 덫에 걸려서 잡히게 하려 하신 것이다.
14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아, 예루살렘에 사는 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아,
이사야 28장(새번역)
כִּ֣י צַ֤ו לָצָו֙ צַ֣ו לָצָ֔ו קַ֥ו לָקָ֖ו קַ֣ו לָקָ֑ו זְעֵ֥יר שָׁ֖ם זְעֵ֥יר שָֽׁם
kî çav lâ-çâv çav lâ-çâv qav lâ-qâv qav lâ-qâv z‘êr shâm z‘êr shâm
For it is precept upon precept, line upon line, here a little, there a little.
교훈에다가 교훈, 줄에다가 줄, 여기 조금, 저기 조금이라고.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은 뜻을 알 수 없고 아무런 언어적 의미가 없는 말인데, 이러한 말이 나온 맥락은 대략 이렇다. 이사야 선지자가 술취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설교를 했는데, 술 취한 유대 지도자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조롱하며 따라하는 투로 이상한 발음의 말을 했다. 따라서 하느님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해줘도 듣지 않는 부패한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젠 그들이 조롱했던 말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함으로써 그들이 망하도록 하셨다.

J. J. M. Rogers는 '차브'가 '똥', '카브'가 '토'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석했다.[1] 좀 더 어감을 살린 해석은 아래와 같다.
선지자가 유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했는데, 술 취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이 "저자 좀 보게, 어쩌고 저쩌고 헛소리하는군"이었다.

바울로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에 대해 말할 때 이 부분을 인용하며,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ex. 부패한 유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이사야 본문에서 하느님이 사람들을 향하여 "차브 라차브, 차브 라차브, 카브 라카브, 카브 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이라고 말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떠나서,[2] 이사야의 이 본문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2. 구약 요엘의 묘사

26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다시는 내 백성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27 너희는 내가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있음을, 주 너희 하느님이 바로 나요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되리라. 다시는 내 백성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1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2 그 날, 나는 남녀 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주리라.
요엘 2, 3장(공동번역성서)

성령이 모든 이들에게 임하고,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고 표현하고 있다. 밑의 사도행전 2장의 방언하는 대목에서 이 부분을 인용한다.

2.3. 신약 사도행전의 묘사

신약 사도행전에 방언의 묘사가 정확하게 나온다.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5 그 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7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9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10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11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12 이렇게 모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웅성거렸는데
13 그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15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공동번역성서)

예수 승천 후 오순절에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면서 방언을 한다.

사도행전에서 묘사하는 방언은 '배운적 없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스어 프뤼기아 사투리, 그리스어 팜필리아 사투리, 이집트어, 아람어, 히브리어, 아랍어 등 자신들이 배운 적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주변에 있던 여러 지역 사람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하고 놀랐다.

현재 기독교에서 방언으로 생각하는 '알 수 없는 말'과 사도행전의 묘사는 차이가 있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이라고 빈정거린 사람도 있었지만, 다수가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즉 방언으로 하는 외국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방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2.4. 신약 코린토서의 묘사

2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4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6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중략)
9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중략)
18 나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보다도 이상한 언어를 더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상한 언어로 일만 마디의 말을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중략)
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40 다만 나는 여러분이 모든 일에 점잖게 또 질서 있게 처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공동번역)

초기 교회에서 이미 방언은 '알 수 없는 말'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자세한 설명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참조. 고린토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던 첫 번째 편지에서, 바울로는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받았음을 밝히고 방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고린토 교회의 방언 남용 문제는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고린토서 관련 내용은 이 문서의 폐해 문단에 자세히 나온다.

3. 방언과 성령 운동의 역사

교회사학자 배덕만 교수의 <오순절 운동과 현대 성령 운동>

다음 내용은 교회사학자 배덕만 교수의 위 교양 강의을 요약한 것이다.

방언의 역사가 곧 성령 운동의 역사이다.

방언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성령님께서 일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방언이 아닌 다른 형태로 일하신 것이다. 20세기 초 교인들에게 다시 방언의 은사가 임하며 오순절운동으로 대표되는 성령 운동이 일어났다. 성령 운동이 현재 개신교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성령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흔히 하는 말 중에 "한국 교회는 간판은 다 장로교회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 순복음교회이다."라는 말이 있다. 숫자로는 자신이 칼뱅 신학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신앙 생활을 들여다보면 성령, 방언, 신유, 은사 같은 이야기가 보편적이다.

1960년대 유럽, 미국 개신교는 위기에 직면했다. 교인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어 이러다가 교회가 없어지는 '세속의 시대'가 오는 것 아닌가 하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바로 이때 유럽, 미국과 달리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지역이 있었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였다. 이유를 찾아보니 대부분 성령 운동을 하는 그룹들이었다.

오랫동안 기독교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가 삼위일체론을 믿지만 성령 하나님은 사실상 이름만 남아있었다. 이 증거를 사도신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신경에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묘사 없이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고백만 나와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사도신경

기독교인이 더욱 성령에 관해 이야기하기 어렵게 된 일이 있었다. 2세기에 등장한 이단 몬타누스는 두 여자 선지자와 함께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성령에게 계시받았다며 예언하는 성령 운동을 하였다. 교회는 몬타누스파를 이단으로 판정했다. 이후 누군가 "내게 성령이 임하셨다."라고 말하면 "몬타누스가 하던 소리를 하네?"가 되어 성령 운동이 매우 위축되었다.

이것이 무려 1900년대까지 이어졌다. 18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방언이 나타나지 않았다.

1800여년 만에 방언이 부활한 순간은 1901년 1월 1일이다. '토페카 방언 사건'으로, 이날이 성령 운동의 시작일이다. 감리교 목사 '찰스 퍼햄(Charles Parham)'은 기도를 통해 자기 병이 낫는 것을 여러차례 경험했다. 때문에 베델의 집이라는 기도원을 세워 신유 운동을 하였다. 이 기도원에 베델 성경 학교를 만들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학생이 퍼햄에게 안수기도를 부탁했다. 안수기도를 받고 나서 이 여학생의 혀가 확 돌면서 중국어를 하였다. 그 시간에 여러 사람에게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3] 퍼햄은 이 일을 보고 학생들에게 성경에서 '성령 세례'에 관해 찾아오라는 과제를 냈다.

학생들은 "성경에서 성령 세례의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퍼햄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주목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때 미국은 전세계로 선교를 떠나는 열풍이 불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언어였다. 퍼햄은 성령님께서 이 시대에 외국어 방언을 주신 이유를 말세 때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선교사들이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도록 초자연적인 은사로 언어를 주셔서, 선교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퍼햄은 텍사스에 성경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에 흑인 목사인 '월리엄 조셉 시무어(William Joseph Seymour)'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은 공공장소에서 흑백 분리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퍼햄은 시무어에게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시무어가 거듭 부탁하자 퍼햄은 당신이 복도에 앉아서 수업을 들으면 교실 문을 열어주겠다고 이야기하였다. 시무어는 이곳에서 "말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데, 그 능력 받은 것의 증거가 방언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무어 목사는 후에 LA의 한 성결교회 목사가 되었다. 당시 성결교회에는 방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무어 목사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설교하자 교인들이 시무어 목사를 쫒아냈다. 한 교인이 시무어 목사를 자기 집에 머물게 했는데 시무어 목사의 기도로 그 교인 부인의 병이 나았다. 이 교인의 집에서 기도 모임이 생겼다. 기도 모임에서 기도를 하는 중에 사람들의 입에서 방언이 터졌다. 이 기도 모임에서 방언이 터졌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 계단이 무너질 정도가 되었다.

시무어 목사는 LA 아주사 거리(Azusa st.)에 있는 옛날 마굿간 건물을 빌렸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엄청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이 방언이 터지고, 신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주사교회는 흑인 목사인 시무어를 백인 목사들이 도왔다는 점에서 평등 운동에도 기여했다. 이것을 '아주사 부흥 운동'이라고 한다. 시무어 목사는 이런 일을 소식지로 써서 미국 전역의 성결교회로 발송했다. 전국에서 성결교회 목사들이 아주사로 왔다. 아주사에서 성령 운동을 보고 자기 교회로 돌아가서 방언에 대해 설교하자 그 교회 신자들에게서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다. 담임목사가 아주사만 갔다오면 성결교회가 방언 때문에 둘로 쪼개졌다. 그 결과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성결교회를 나와서 새로 오순절교회를 만들었다. 흑인과 백인 교회가 따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백인들이 만든 '하나님의성회' 영향을 받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만들어졌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전세계에서 아주사 거리로 사람들이 몰려와서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영향이 다시 전세계로 퍼졌다.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인 '서빙고 교회'를 세우는데 일조한 메리 럼지 선교사도 이 아주사 부흥운동에 참여했었다. 서빙고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언을 신앙의 중심으로 둔 교회였다.

당시 미국 지식인들은 오순절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방언하고, 박수치고, 울고, 소리지르고 하는 것을 배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부자들이 다니는 교회였던 성공회에서도 방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성공회 신부 데니스 베넷이 방언을 하자 성공회는 데니스 베넷을 외곽지역으로 쫒아내듯 발령하였다. 데니스 베넷의 교회가 성령 운동과 함께 부흥하며 엄청나게 커지자 미국 성공회 내에서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방언을 막으면 안된다'는 분위기가 퍼진다. 같은 시기 개신교 명문대인 예일, 가톨릭 명문대인 노틀담 대학에서도 교수와 학생들이 기도 중 방언이 터졌다. 그러면서 방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특정 교회에서 시작한 성령 운동이 잘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전체 교회로 퍼졌다.

이전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등에 다니던 사람이 방언을 하면 교회를 나와서 오순절교회로 옮겼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원래 교회에서 나가지 않았다. 방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강제로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장로교인이라고 말하면서 성령 운동을 하였다. 그러면서 성령 운동의 결과가 꼭 방언일 필요는 없고 신유도 있고 예언도 있으므로 성령 운동을 넓게 이해하자는 움직임이 생긴다.

퍼햄과 시무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오순절교회 또는 고전적 오순절운동이라고 하고, 기존 교회에 남아있으면서 성령 운동을 하는 것을 은사주의운동 또는 신오순절운동이라고 부른다.

20세기의 성령 운동은 성령께서 돌아가셨다가 20세기에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늘 우리와 계셨고 모든 사역을 다 성령께서 하셨다. 20세기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이 있어서 또다른 형태의 성령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전의 것은 성령 운동이 아니고 이것만 성령 운동인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 다른 영역의 성령 운동이다. 전에는 방언이 없어도 신앙 생활을 충분히 잘 했는데, 하나님의 섭리 아래 현재는 이런 형태의 성령 운동도 필요해서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복음이 잘 전해지지 않던 곳에서 오순절 성령 운동이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더 많이 기도하게 하고, 더 많이 전도하게 한 공헌을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방언하고, 신유하고, 예언하는 것만 성령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령께서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의 한계 없이 역사하신다. 목회하는 것, 찬양하는 것, 봉사하는 것이 다 성령의 은혜로 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시작한 성령 운동이 현재 힘이 있다고 해서 모든 성령 운동을 이것으로 환원시키거나, 이것이 진짜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성령 운동의 좋은 점이 교회가 생기있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고, 오히려 은사 받아 했다는 행동이 교회를 어렵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한다.

4. 신학적 해석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2절 (공동번역)

방언이 하느님에 대한 간구, 개인적으로 하느님과 교통하기 위한 수단임을 성경에서 긍정하고 있다. 다만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할만한 기도라고 보진 않는다.

한국 개신교 교단 중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비롯한 오순절교회는 방언이 성령께서 내게 임하신 표적이기 때문에 예배에서 방언 사용을 적극 권장한다. 이외 한국 개신교 주요 교단들은 예배에서 방언 사용을 권장한다, 권장하지 않는다 공식 입장을 내지 않고 각 교회에 맡기고 있다.

한국 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천주교주교협의회의 가톨릭대사전 방언 항목을 요약한 글이다. # 가톨릭은 방언을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고, 경계한다. 과도하게 은사를 받기 위해, 또는 신비 체험을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그리고 조용하게 올바른 신심을 이어나가는 것을 중시한다. 개개인이 하는 방언을 모두 은사며 은총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방언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앙의 지표나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각 교구마다 성령쇄신모임에 담당 신부를 배정해 절대 일정선을 넘지 않도록 지도하도록 한다. 올바른 신심의 토대 없이, 단순히 신비로운 체험을 원하는 이유로 이러한 기도를 접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데, 이는 현대에 소위 말해지는 방언, '신령한 언어'가 천주교의 전통적인 영성이 아니라 20세기에 도입된 일종의 신비체험인 만큼 가톨릭 정통 교리를 벗어나 신비주의적 신앙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4] 일례로 90년대 말에 성령쇄신운동회를 통해 국내 천주교 내부에 가계치유가 신학적 비판 없이 확산되어 신자들 사이에 금전적 피해가 발생하고 심지어 사상자까지 나오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긍정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겠지만, 은사를 쫓아다니고 거기에 매달리는 기복적 사고를 갖거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내적 탐욕과 교만에 빠지거나 봉사자들끼리 상처를 주고 받아 물의를 빚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교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교회는 현대의 방언이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방언 기도나 성령기도회 같은 것이 없다. 정교회가 이처럼 강경하게 반대하는 근거는 만일 그것이 사도들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면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교부들과 성인들이 이에 대해 언급했을 텐데, 저런 식의 랄랄랄라 거리는 방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교부들과 성인들이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순절교파에서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세례성사견진성사로 이미 성령을 가득히 받으며 성령이 신자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고 보기에 강하게 부정한다.[5] 정교회에서도 방언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을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어 있기에 공적 계시는 끝이 났고, 성경과 성전을 통해 충분히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상 사도 시대 때 방언은 제 역할을 잃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본다.#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고대에 실제로 있었던 방언의 존재 자체는 인정을 하지만, 그것을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아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에베베거리는 소리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을 외국인과 대화할 때를 보면 종종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 하여 대화를 하거나, 혹은 서로가 자신의 모국어로 이야기 하고 서로가 서로의 모국어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통하는 기적이 있고, 교부들 중에도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주의에 의해 참의미를 잃어버린 방언의 진짜 모습이고 사도들이 처음에 성령을 받아서 행했던 기적의 원모습인 것이다.

신사도 운동 극단주의자들은 마지막 때에 성령이 만인에게 부어진다는 요엘의 예언이 현대에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이다. 첫째, 기독교 신학에서 말세는 예수 승천 이후부터 현재까지이지, 특정 누군가가 방언을 하거나 예언을 하는 시기가 아니다. 만약 말세지말 이렇게 나온다면 말 장난에 불과하다. 둘째, 요엘의 예언은 이미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되었다'라고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신사도 운동에 의해 새롭게 성취된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가감하는 것이다.

요엘의 히브리어 원문은 나중에, 그때에가 맞지만,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게 요엘의 예언의 성취다!'라고 말할 때에는 마지막 날, 말세에 로 번역하고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이 이해한 요엘 2장 28절의 그때에는 마지막 날이다. 그도 그럴 것이 2장 이후에 회복되는 이스라엘과 모여드는 성도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 신학계에서는 현대에 요엘의 예언이 재성취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다만 오순절 방언이 현재에도 유효한가, 즉 오순절에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에 임했던 그 은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려올 수 있는가라는 논의는 견해 대립이 있다.

5. 양태

대부분은 패턴화되었는데, 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루후으으후루꾸꾸…같은 느낌의 소리나 옛날 테이프 5배속급의 속도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상당히 빠르게 말이 나오기 때문에 발음이 불명확해져 몬데그린 현상이 심하다. 외국어(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같이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외국어는 아닌 경우도 있고, 묘하게 불경 암송을 듣는 듯한 기분도 든다. 특히 그 조음 원리가 너무 뻔히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사회자가 아예 대놓고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일부 종교 연구가들은 동일한 단어를 빠르게 반복하는 것, 특히 그 발음 속에 ㄹ 발음이나 ㅁ 발음 등이 많이 들어있는 경우는 종교를 막론하고 다양한 주술적 진언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빠르게 말하지도, 패턴화하지 않은 방언도 존재한다.

얼떨결에 기도회나 부흥회에 끌려간 비개신교인이 제대로 겁먹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인 1순위. 그래도 기왕 교회에 갔으니 경건하게 기도나 해야 겠다 마음 먹는 순간 사방에서 속칭 '외계어' 같은 방언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온다면 언뜻 생각하기엔 황당함이나 우스꽝스럽다거나 할 것도 같지만, 막상 기도 시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줄줄 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기괴함이나 공포감이 드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주변에 알던 사람이 이러거나, 앞에서 기타나 드럼의 쿵쿵거리는 소리까지 합쳐지면 섬뜩한 느낌이 더해진다. 특히 순복음 교단처럼 방언을 강조해서 주일 예배 때도 방언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교회라면.

방언을 내뱉는 상태에 들어가면 시간감각이 사라져, 10분 정도 기도한 것 같지만 알고보니 1시간이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극도의 흥분이나 격양 상태가 되면 주위를 인지하는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기독교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토속종교 등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당(샤먼)의 트랜스 상태와 거의 동일하다. 다른 여러 종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행이나 명상, 심지어는 약물을 통해 종교적 무아지경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로 볼 수 있는 것.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환시나 환청 등의 환각도 대동소이하다. 불교 승려, 무슬림, 힌두교도에게서도 방언과 비슷한 현상이 있기 때문에,(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방언이 기독교와 관련되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6] 실제로 관련 학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런 트랜스 상태를 기독교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종교체험 또는 종교적 신비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이는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자가 어떻게 오직 한 종교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냈겠느냐'는 주장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7]

야매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면 교회에서 정해주는 기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사용된다. 기도제목은 몇 개 안 떨어지는데 기도시간은 1시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령영성교회 서모세 목사 방언집회


천주교 성령기도회 영상

바로 위 영상에도 있지만 간혹 성령이 임하셔서 하는 말이라며 어떤 예언이나 정보 등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러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8] 냉정히 말해서 무당이 신들려서 내뱉는 소리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특히 다른 영혼이 말을 해 준다는 경우에는 이단이라고 취급해도 좋다.

방언으로 예언하는 은사일 수 있지 않느냐라는 주장도 가능하지만, 사도 바울이 지적했듯 방언은 자신의 덕을 세우는 은사이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과는 다르다고 구분한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예언을 위해서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기적 검증에 깐깐한 천주교의 경우, 천주교에서 흠숭(하느님)하거나 공경하는 존재(천사들과 성인들)의 이름을 대고 나오는 계시들을 사적 계시로 간주하고, 설사 교황청에서 인정한 것이라도, 못 믿겠으면 안 믿어도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하물며 아예 인정받지 못한 것이라면, 한술 더 떠서 하느님이나 성인들, 천사들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와 소통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6. 폐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6장 5~6절

은사의 특성상 심지어 초기 기독교에도 폐해가 있었다. 기독교 내에서 방언으로 인한 폐해는 방언 그 자체보다는 방언으로 인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실제로 방언에 대해서 성경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언급이 "방언하는 거 잘된 일이긴 한데 으스대고 다니진 마라"였음을 보면 명백하다.

우선 가짜 방언을 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신앙심과 관련이 되었다.[9] 물론 방언과 신앙심은 관계가 없지만, 다들 방언하는 분위기라서 방언을 못하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보일까 봐 방언을 하지 못하는데도 방언을 하는 양 따라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난 방언을 받을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하고 자랑하기 위하여 하는 사람도 있다.[10]

이러한 문제는 위에서도 밝혔다시피 초기 기독교에도 있었던 심각한 문제였으며, 특히 코린토스 지방에 있던 교회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코린토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로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몇가지 방언 사용의 원리와 원칙을 정해주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5(공동번역)
만일 온 교회가 모여서 저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있을 때 보통 교인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보통 교인이 그 자리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마침내 자기 마음에 품은 비밀이 폭로될 것입니다. 그러면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3~28(공동번역)'''

이러한 바울로의 편지에서 드러난 바울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2. 공중 예배시 초신자들을 포함한 예배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함으로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지 못한 신자들을 배려해야 한다.
3.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한 바울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있는 곳에서는 되도록이면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나팔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이 됩니다.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6~12(공동번역)

즉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본 것이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는 원칙에서 방언 사용을 절제할 것을 권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로는 방언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 적이 없다.[11] 오히려 자신이 방언을 할 줄 안다고 말했다. 다만 방언이 성령이 임재하신 표징으로 해석될지라도 이에 지나치게 집착해 신앙생활을 왜곡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요는 비단 방언 뿐만 아니라 소위 '은사'로 분류되는 모든 행위들이 그렇다.

한편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기도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한국에서 일반적인 공예배 시간에 주어지는 기도시간에 방언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요는 우리가 흔히 ‘합심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하고 각자 부르짖는 것은 모여있을 뿐이지 사실상 각자의 개인기도라는 것이다. 한국 외에선 이런 식으로 부르짖는 기도가 그리 흔치 않으며, 특히 유대인들의 기도는 각자가 순서대로 하는 형태가 많다. 그런 상태에서 모두가 기도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방언을 하면 당연히 덕이 될 리가 없다. 한국 교회에서도 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나와서 하는 대표기도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므로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개인적인 기도라고 해도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지고 있는 걸 보면 처음 온 사람 입장에서 당황하는 일이 발생할 수는 있으며, 여기에 거짓 방언이나 가짜 성령의 연출로 막 쓰러지거나[12] 광기를 보이거나 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분별과 절제를 마음에 두되 받은 방언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도 아는 분별력과 균햔감각이 중요하다.

7. 중요한 건 사랑이다

은사를 기록한 고전12장에서는 우리가 흔히 은사로 부르는 현상들을 서술하고,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밝히며 이윽고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며 고전13장으로 넘어간다. 그렇다. 크리스천이라면 히브리서 11장인 믿음 장과 더불어 애송하는 사랑 장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개역개정)

은사주의 운동에서 자주 오용, 오인용되는 구절이 12장 마지막 절이다. 하지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받았던 간에 사랑이 없으면 말짱 헛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밝히는 그 장이다.

방언을 하던, 예언을 하던 사랑이 없이는 무익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있어야만 방언도 예언도 완전해지고, 교회 공동체는 각각의 모양으로 각 사람이 직분과 은사를 행하지만 이를 묶어 든든히 세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선언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다. 방언이 무엇인지, 방언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논쟁 이전에 바울은 분쟁이 없고 서로 북돋아주는, 사랑을 하는 그리스도 교회가 되길 간구하며 고린도 서신을 부쳤다. 즉 사랑을 부어주시길 사모하고, 너희가 그렇게 고민하고 논쟁이 있는 은사도 사랑을 따라, 사랑 안에서 하라는 현대에도 매우 간절한 가르침이다.

문맥상 자연스럽게 놓치기 쉬운 건 사랑은 은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은사는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확장과 내부공사를 위한 삽, 괭이와 같은 도구에 해당한다. 방언, 예언, 가르침, 베품, 기도 등 각자에게 구함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나누어 주신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열렬하게 사모해도 특정한 은사는 받지 못할 수도 있고,[13] 사람을 기적적으로 고치거나 치료하는 치유의 은사는 특정상황에 특정 인물을 돕기 위해 잠시 주어졌다가 그 사역이 끝나면 거두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은 이런 도구인 은사를 어떻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용하는지를 나타낸다. 바울이 사랑을 ‘가장 좋은 길’ 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체들 간의 적극적으로 하는 사랑이건 자신을 박해하는 원수를 선대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방식의 사랑이건 이는 모든 크리스찬이 행해야 할 필수사항이기 때문에 은사의 범주엔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론 인간의 힘으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위에서부터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건 분명하며 이런 면은 은사와 흡사하다. 하지만 사랑은 열렬히 구하는 한편으로 설령 자신에게 신령한 힘이 부여되지 않은 것 같다 해도 주어진 현재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한다.[14] 말하자면 부어주시지 않았으니 못 해요~ 같은 태도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내려받지 않으면 아예 실행 자체가 불가능하고, 받지 않은 게 반드시 잘못인 것도 아닌 은사와의 분명한 차별점이다.

사람들은 은사, 특히 신비해 보이는 방언이나 치유 등에 시선을 뺏기는 성향이 있다. 또한 그런 능력을 행하는 자들을 영적 수준이 깊고 신앙이 뛰어난 사람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능력을 받았다 싶으면 본인도 거기에 취해서 하나님 영광 돌리기보다 자기 앞에 신도들을 줄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거듭 말하듯이 이는 아무리 귀하다 해도 도구에 불과하며, 은사의 통로가 된 사람의 영적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필요하다면 지나가던 당나귀나 돌도 말을 하게 할 수 있는 게 주님인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은사를 소유했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나로 심판받는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게 마태복음 7:23으로, 주의 이름으로 온갖 능력을 행한 자들이 항변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구원조차 받지 못했던 불법을 행한 자로 불리며 쫓겨난다. 유명한 예를 들어보면 유다가 있다. 예수께서 안수해서 능력을 주고 둘씩 짝지어 보내며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파하라 보냈을 때 제자들은 모두 파송된 대로 일을 행하였고, 최후의 만찬 때에도 묘사되듯이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로부터도 가짜라고 의심받지 않았다. 이는 즉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을 행해서 귀신을 쫓아냈고, 사람을 고쳤으며, 배운대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했기에 실제로 유다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으로 사람들을 전도한 유다는 정작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었다. 심지어 회심하지도 않고 자기 위치를 이용해 돈을 도적질하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은 떠나지 않았는데, 이는 능력이 유다 개인의 경건으로 말미암지 않고 다만 복음 전파를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능력으로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경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반면 은사를 받았던 안 받았건 사랑을 행한 이들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8. 신사도 운동과의 관련성

하지만 사람들은 특이한 거 좋아한다는 게 문제로 신사도 운동과 같은 현상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뜨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이 현상에 정말 집중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쓰러짐 현상이라든가 울부짖음이라든가, 치아가 금으로 변한다든가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면 십중팔구는 이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것이다. 문제는 각 교단에서는 비성경적인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알파코스와 G12, 경배와 찬양의 형태로 이런 것들이 교회 내부에 엄청나게 침투해 들어오는데도 막지를 않는다. 방언도 이 과정에서 딸려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1] #[2] 똑같이 조롱조의 아무 의미 없는 말로 되갚아준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데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 것인지 여부[3]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확인하니 실제 외국어는 아니었다.[4] 극단적인, 그리고 조금 다른 예이긴 하지만 신비체험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기 시작하면 나주 성모동산, 베이사이드와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5] 이 관점은 천주교도 동의한다. 성사의 사효성에 의하여 세례성사견진성사 등의 성사 때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고 보기 때문이다.[6] 당장 기존 교단들로 부터 '저들은 그리스도로 부터 떨어져나간 이단이다'라고 지목받은 교회들에서도 얼마든지 방언이 일어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이단들이 방언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7] 이런 주장이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황스럽고 반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인지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절대자를 그리스도인들이 '야훼'라고 부르고 있는 것 뿐이므로, 여러 종교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물론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도 야훼를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낸 존재는 예수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니 '그리스도교'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고...[8] 구약에서 믿을 만한 예언자의 예언에서는 야훼의 엄중한 말, '주님의 말씀이다(Thus saith the LORD)' 등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한다. 이것은 요한묵시록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시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맞다는 보안장치를 확실히 해 놓는다.[9] 현대에서는 그 외의 가장 큰 요인으로, 방언이 단지 아무렇게나 주절대고 말하는 걸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성령집회에서 방언 받으라 해서 따라하다가 집회 도우미가 방언을 받았다고 하니까 진짜 그런 줄로 아는 경우도 많다. 나는 평범하게 기도하는데 발음이 안 좋아서 방언취급받기도 한다.[10] 어느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방언을 할 줄 몰랐는데, 전임 목사의 방언에 깊은 인상을 받은 신자들의 압력 때문에 헬라어 성경을 마치 방언인 척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11]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39)[12] 물론 부흥사를 읽어보면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때 쓰러지는 정도를 넘어 날려가거나 하는 일도 발생하기 때문에 쓰러짐=반드시 가짜 라고 도식화할 수는 없지만, 현대 한국 교회에서 실질적으로는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한 목적의 인위적인 퍼포먼스거나 영향을 주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세력인 경우가 매우 많으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13] 존 파이퍼는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은 가르침과 목회와 학자로서의 은사는 받았지만 동료 크리스찬과는 달리 자신에겐 방언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럼에도 기대하라는 말씀에 따라 늘그막인 현재도 기도하고 사모하며 구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14] 가령 자신을 부당하게 대한 사람을 만났다면 이에 대한 반감이 초자연적으로 부어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덮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고 축복해야 한다. 부부간 갈등과 오해,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