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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6:24:44

아시카가 요시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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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7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쓰[1]
足利義勝
파일:아시카가 요시카츠.jpg
생몰년도 1434년 3월 19일 ~ 1443년 8월 16일
재임기간 제7대 정이대장군
1442년 12월 8일 ~ 1443년 8월 16일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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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로마치 막부의 제7대 쇼군. 제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의 장남이다.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어린 나이에 쇼군에 등극했다. 하지만 요절해버리면서 빛이 바랜 케이스. 아명은 센야차마루(千也茶丸).

2. 생애

태어나자마자 만도코로(政所) 집사(執事)인 이세 사다쿠니(伊勢貞国)의 저택에서 양육되었다.

1441년(카키츠 嘉吉 원년)에 카키츠의 난(嘉吉の乱)이 일어나서 아버지 요시노리가 아카마츠 미츠스케(赤松満祐)에게 암살되었다. 이 때문에 거처를 무로마치전(室町殿)으로 옮겼다. 다음 해인 1442년(카키츠 2년),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모치유키(細川持之) 등에게 추대되어 9세로 쇼군직에 올라, 제7대 쇼군이 되었다. 요시카츠는 어려서 정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치유키가 실권을 장악했다. 모치유키 사후는 하타케야마 모치쿠니(畠山持国) ·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와 생모인 히노 시게코(日野重子) 등이 실권을 쥐었고, 카키츠의 난을 일으킨 미츠스케의 토벌과 카키츠 덕정 잇키(嘉吉の徳政一揆) 등을 평정했다.

1443년(카키츠 3년) 6월 19일에는, 요시노리에의 조의(弔意)를 전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와 회견했다.[2] 같은 해 7월 21일에 죽었다. 향년 10세(만 9세). 재임은 불과 8개월이었다. 사인은 낙마암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이질에 의한 병사가 유력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임 쇼군에는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동생으로 8살인 미토라(三寅)[3]가 선출되었다.

요시카츠에 이어 요시마사라는 어린 쇼군이 이어지자, 조정과 유력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막정에 관여하는 것이 계속되면서 쇼군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3. 여담



[1] 외래어 표기법. 다만 요시카츠 쪽이 더 범용적이다 보니 문서명을 이렇게 잡았다.[2] 『야스토미키(康富記)』[3]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義政)의 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