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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愛新覺羅 奕譞 애신각라 혁현 | |
시호 | 화석순현친왕(和碩醇賢親王) |
별호 | 자(字) 박암(樸菴) 아호(雅號) 구사당주인(九思堂主人)·퇴잠주인(退潛主人) |
지위 | 다라순군왕(多羅醇郡王) ⇒ 화석순친왕(和碩醇親王) / 칠왕야(七王爺) |
생몰년도 | 1840년 10월 16일 ~ 1891년 1월 1일(50세) |
부친 | 청 선종 도광제 |
모친 | 장순황귀비 오아씨 |
자녀 | 광서제,순친왕 재풍 등 7남 3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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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 황제 도광제의 서자이며, 청나라 제9대 황제 함풍제의 이복 동생이고 11대 황제 광서제의 친아버지,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친할아버지이다.2. 생애
도광제의 아들이자 함풍제와 공친왕의 이복동생, 광서제의 아버지, 선통제의 할아버지이다. 생모는 장순황귀비 오아씨. 현(賢)이라는 시호를 붙여 순현친왕(醇賢親王)이라고도 한다.도광제가 사망할 때엔 아직 어려서 대권구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함풍제가 사망할 때엔 20대의 나이로 서태후와 공친왕이 기상정변으로 숙순 등 보정대신들을 제거할 때 보군통령으로 임명되어 북경의 치안과 군권을 확보하며 보정대신들의 체포를 주도했다. 이때의 선택으로 혁현은 서태후의 마음을 얻게 된다. 서태후는 여동생을 혁현에게 시집보내 황실과 겹사돈 관계를 형성하여 조카 재첨을 얻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요절하자 자신에게는 조카인 4살짜리 어린아이인 재첨을 양자로 뺏어와 광서제로 즉위시킨다. 이게 종법상으로도, 인정상으로도 자신의 외아들이 죽었으니 동생의 외아들을 뺏어오는[1] 무례한 행동이어서 말이 좀 많았는데, 혁현은 이를 통보받고 형수 겸 처형인 서태후의 권력욕을 체감하며 몹시 통곡하다 실신을 할 정도였다. 그 후 하나뿐인 아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혁현은 서태후의 예스맨이 된다. 동태후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자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앞장서서 처형에게 섭정 노릇을 계속해달라 부탁하여 서태후가 마지못한 척 권력을 유지했을 정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전멸하며 혁흔이 총리아문과 군기처 직책에서 물러나자 서태후의 충실한(?) 예스맨으로서 혁흔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사후 순친왕 작위는 재풍(載灃)이 이어받는다.
3. 가족 관계
그는 청나라 제11대 황제 광서제와 황족 순친왕(醇親王) 재풍의 아버지이며 청나라 제10대 황제 동치제에게는 이복 숙부이자 이모부가 되고 청나라 제12대 황제이자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 푸이의 친할아버지이기도 하다.둘째아들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는 그의 처조카딸이자 차자부이다.
3.1. 부인
- 대복진 엽혁나랍씨(大福晉 葉赫那拉氏 1842~1896): 이름 완정(婉貞) / 서태후의 여동생
- 측복진 안찰씨(顔扎氏 1857~1881): 내복(來福)의 딸
수녀 출신으로 서태후의 명령으로 혁현에게 시집왔으며 3년만에 병사했다. 사후 측복진에 추봉되었다.
- 측복진 연가씨(年佳氏)
- 측복진 유가씨(劉佳氏 1863~1926): 이름 취연(翠姸) / 5품전위 덕경(德慶)의 딸
- 측복진 이가씨(李佳氏 ?~1929): 덕순(德純)의 딸
3.2. 자녀들
- 서1녀(1861~1866): 대복진 엽혁나랍씨 生 / 측복진 안찰씨 소생이라고도 함 / 찰살극박다륵갈태친왕 과이심 박이제길특 나이소(那爾蘇 ?~1891 =승격림심의 손자)와 약혼 / 요절
- 적1남 재한(載瀚 1865~1866): 대복진 협혁나랍씨 生 / 요절
- 적2남 덕종 광서제 재첨(德宗景皇帝 載湉 1871~1908): 대복진 엽혁나랍씨 生
- 적3남(1875~1875): 대복진 엽혁나랍씨 生 / 요절
- 적4남 재황(載洸 1880~1884): 대복진 엽혁나랍씨 生 / 요절
- 서6남 다라서군왕 재순(多羅瑞郡王 載洵 1885~1949): 측복진 유가씨 生 / 다라서민군왕 혁지(多羅瑞敏郡王 奕誌 1827~1850)에게 출계
- 서2녀(1885~1887): 측복진 유가씨 生 / 요절
- 서7자 다라종군왕 재도(多羅鐘郡王 載濤 1887~1970): 측복진 유가씨 生 / 다라종단군왕 혁합(多羅鐘端郡王 奕詥 1843~1869)에게 출계
- 서3녀 군군(郡君1887~1914): 측복진 이가씨 生 / 부찰 송춘(富察 松椿)에게 출가
[1] 혁현의 첫 아들은 요절했고, 재첨을 양자로 뺏긴 뒤 낳은 3, 4남도 요절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잘 키워낸 5남이 바로 재풍. 오히려 이렇게 입양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 서태후에게 아주 적당한 양자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서태후의 라이벌 공친왕의 둘째아들 재형(載瀅)이었다.(...) 재형은 3살 위의 형 재징(載澂)이 무탈하게 잘 컸기 때문에 공친왕가를 계승할 종법상의 후계구도에 여유가 있었고 마침 1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즉위하면 딱 친정을 시작할 나이였다. 그런데도 서태후가 굳이 자신의 어린 조카를 데려온 속내가 무엇이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