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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10:46:06

안나 파블로바

<colbgcolor=#000><colcolor=#fff> 안나 파블로바
Anna Pavl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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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안나 파블로브나 파블로바
Анна Павловна Павлова
Anna Pavlovna Pavlova
출생 1881년 2월 12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31년 1월 23일 (향년 49세)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
국적
[[러시아|]][[틀:국기|]][[틀:국기|]]
직업 발레리나
배우자 빅터 댄드레 (1914년 결혼)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어린시절3.2. 신체적 결함의 극복3.3. 발레 뤼스 활동 및 발레단 창단3.4. 마지막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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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의 발레리나.

2. 상세

세계 발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 중 한 명으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러시아 황실발레단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여제로서 20세기 초 전 세계를 투어하며 발레의 대중화에 평생을 바친 안나 파블로바는 오늘날 유럽북미 무용 발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생전에 춤췄던 '빈사의 백조'처럼 그렇게 화려하게 날개를 펴다 처연히 짧은 인생을 마감한 안나 파블로바는 19세기, 20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향력 있는 발레리나로 유명하다.

3. 생애

3.1.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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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안나

1881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파블로바는 세탁 일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비록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는데, 8살 때 어머니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처음 보고 발레의 매력에 빠져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린 딸의 꿈을 이루어주고자 어머니는 황실발레학교로 데려갔으나 처음에는 너무 어린데다 비쩍 말랐다는 이유로 입학이 거절되었다. 그러나 한눈에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프랑스 출신의 러시아 발레계의 거장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에게 발탁되어 10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다. 마르고 가녀린 몸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 ‘빗자루’, 혹은 ‘작은 미개인’ 등의 별명으로 불렸던 파블로바는 곧 가진 천부적인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3.2. 신체적 결함의 극복

엄격하고 힘있는 러시아 발레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파블로바는 결코 모범적인 발레리나는 아니었다. 춤출 때 무릎을 곧게 펴지도 않고 턴 아웃 자세나 팔을 펴는 자세도 바르지 않았으며 회전도 부정확했다. 게다가 마른 몸에 유독 여린 발목은 항상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연습벌레로서 남다른 승부욕까지 갖춘 안나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여타 러시아 발레리나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 연습 때마다 높은 점프와 수차례의 턴을 시도했는데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시도로 인해 종종 아찔한 순간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다 못한 스승 파벨 게르트(Pavel Gerdt)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하기에 이른다. “아크로바틱한 동작은 다른 무용수들이 하게 내버려 두어라. 너보다 훨씬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을 절대로 흉내 내지 말아라. 너는 너의 우아함과 여림이 가장 풍부한 자산임을 깨닫고 겨우 아크로바틱한 트릭으로 칭찬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너 자신이 가진 그러한 특별한 재능을 끌어내는 춤을 추어야 한다.”

결국 파블로바는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극복하고 우아하고 시적인 표현력과 보는 이들을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시키는 능력으로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게 되었다. 특히 지젤과 같이 섬세한 감정 표현이 요구되는 역에서 특별히 빛났다. '라 바야데르'의 니키아역을 처음 맡았을 때는 강인한 체력에 화려한 춤이 돋보이는 인도 무희역을 약한 발목과 여린 체구를 가진 안나가 잘해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무희의 춤과 마지막에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는 아련한 표현력에서 그 역은 파블로바에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파블로바는 자신만이 가진 섬세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연기로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렇듯 발레가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파블로바는 1899년 황립 발레단(오늘날의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지 7년 만에 발레리나로서는 최고봉인 프리마 발레리나의 위치에 오르며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이름을 날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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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의 백조 옷을 입은 안나 파블로바

안나 파블로바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바로 미하일 포킨이 파블로바를 위해 안무한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이다. 1905년 창작된 이 짧은 솔로 작품은 생상스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 맞추어 안무한 작품으로, 가녀리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파블로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길고 여린 팔을 흐느적거리며 죽어가는 백조를 표현하는 것을 볼 때면 정말 한 마리의 백조가 눈 앞에서 처절하게 날개 짓을 하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빈사의 백조'는 파블로바의 대표작이자 하나의 상징처럼 되었다.

3.3. 발레 뤼스 활동 및 발레단 창단

같은 시대를 살았던 현대무용의 개척자 이사도라 덩컨과 달리 파블로바는 새롭고 혁신적인 춤을 선보이기보다 고전 발레의 아름다움을 세계 모든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예술적 신념으로 삼았다. 특히 1907년 처음으로 러시아를 떠나 접하게 된 유럽 무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유럽 관객들의 열렬한 갈채와 환호 속에 파블로바는 황실발레단이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춤추는 것보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 본인에게는 더 많은 영감을 주는 매혹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1909년 러시아 출신의 전설적인 발레 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창단한 발레 뤼스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투어를 떠나기 시작한다.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우수한 무용수들, 안무가들로 구성되어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투어하며 20세기 유럽 발레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발레 뤼스는 '봄의 제전', '불새', '목신의 오후' 등 현재에도 무용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수많은 작품을 초연했다. 바슬라프 니진스키, 조지 발란신, 미하일 포킨 등 세계 발레계를 이끌었던 수 많은 무용수들, 안무가들이 이 단체를 거쳐 갔는데, 안나 파블로바는 니진스키와 더불어 발레 뤼스에서 활동한 가장 위대한 발레스타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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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뤼스에서 활동하던 당시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으로 내세운 홍보 포스터

그러나 발레 뤼스와의 활동에 만족하지 못했던 파블로바는 1911년 직접 발레단을 창단해 러시아의 젊은 무용수들을 포함, 유럽의 재능 있는 무용수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지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등 고전 발레의 명작들을 주로 공연했는데 유럽, 미국,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까지 투어 했다. 특히 공연을 하던 시절은 한참 제1차 세계 대전이 있던 때로, 전쟁 중이던 유럽 전역을 투어하며 파블로바는 전쟁으로 다친 사람들의 마음을 무용으로 달래주려 애썼다. 15년간 발레단이 투어 한 나라와 횟수를 모으면 50만 마일 4천 회에 이른다고 하는데, 1910년~ 1920년대 항공 여행이 없던 시절 이룬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매일 쉬지 않고 공연을 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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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애완 백조와 함께

특히 파블로바는 영국과 미국의 발레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발레단을 창단하면서 근거지를 아예 런던으로 옮긴 파블로바는 아이비하우스(Ivy House)라 불리는 작은 호수가 딸린 집에서 백조를 비롯한 여러 애완동물들과 함께 살며 공연이 없을 때면 그곳에서 젊은 발레 학도들을 양성했다. 영국 로열 발레단의 안무가였던 프레더릭 애슈턴(Frederick Ashton)이나 발레리나 알리샤 마르코바(Alicia Markova) 등 수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파블로바의 공연을 보고 무용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처음에는 러시아 황실발레단 출신으로 환상의 호흡을 맞추었던 미하일 모르드킨(Mikhail Mordkin)과 함께, 나중에는 자신의 컴퍼니를 이끌고 10여년간 정기적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함으로써 미국 발레계의 발전과 대중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3.4.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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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Golders Green Crematorium에 안치되어 있다.

자신의 생일을 3주 앞둔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폐렴으로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는데 죽음 역시 발레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유럽 투어를 마치고 잠시 런던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후 네덜란드 헤이그 공연을 위해 열차를 타고 가던 파블로바는 열차 사고를 당하게 되고,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다음 열차를 기다리느라 잠시 밖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대기하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추위로 인한 감기와 무리한 일정 탓에 폐렴과 늑막염이 온 파블로바에게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며, 앞으로 춤을 추지 말 것을 권고했는데 “춤을 추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수술을 거부하고 일정을 강행했다. 그리고 파블로바는 결국 1931년 1월 23일, 헤이그의 한 호텔방에서 상징과도 같았던 백색의 빈사의 백조 옷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죽은 직후 '빈사의 백조'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극장에서는 빈사의 백조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춤추었을 무대를 따라 스포트라이트만이 음악에 맞추어 무대 위를 홀로 비추었고, 음악이 멎자 관객들은 모두 기립하여 안나를 기렸다고 한다.

4.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