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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10:50:15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colbgcolor=#000><colcolor=#fff>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Sergei Diaghilev
파일:Dyagilev_SP.jpg
본명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Дя́гилев[1]
Sergei Pavlovich Diaghilev
출생 1872년 3월 31일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
사망 1929년 8월 19일 (향년 57세)
이탈리아 왕국 베네치아
국적
[[러시아|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프로듀서, 사업가
서명 파일:Sergei_Diaghilev_signature.svg

1. 개요2. 상세3. 기타4. 발레 뤼스의 예술가
4.1. 음악가4.2. 무용수4.3. 디자이너,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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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발레 프로듀서이자 무대미술가.

20세기 초 발레 뤼스라는 발레단으로 유럽을 평정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곡을 의뢰해 엄선된 발레 작품을 선보였고 러시아 출신 전설적인 무용수들이 알려지게 된다.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를 창단하여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런던, 파리, 뉴욕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2. 상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훗날 음악으로 꿈을 바꾸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였다.[2] 1898년 잡지 『예술세계』를 발행했는데 훗날 이 잡지는 러시아판 아르누보 운동을 상징하는 잡지가 되었다.[3] '예술세계'의 성공 덕분에 19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마린스키 극장의 특별고문이 됐으나 낙하산이라는 비난 속에 1년만에 사직해야 했다.

1908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러시아 음악가 살리아핀과 함께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발레를 전문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를 소개하기 위해 모스크바 최고의 무용수 35명을 이끌고 첫 공연을 했는데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는 파리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일회성으로 끝날 수 있었던 팀을 발레단 '발레 뤼스'로 정식 창단했다.
파일:ballets-russes-1400x650.jpg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

이후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기용해 <세헤라자데>, <불새> 등의 작품을 런던, 파리 등 다양한 곳에서 발표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해외에 머물렀다. 새로운 소비에트 정권은 그를 부르주아 퇴폐의 특히 교활한 예로 비난했다. 이 영향으로 소련 미술 사학자들은 60년 넘게 예술에서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1929년 57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발레 뤼스도 사라졌다.

3. 기타

4. 발레 뤼스의 예술가

출처: The Great Composers Their lives and times

4.1. 음악가

4.2. 무용수

4.3. 디자이너, 미술가



[1] 러시아어에서 я는 사실 ya에 해당하는 모음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자면 '댜길레프'가 올바르다.[2] 그를 가르쳤던 스승인 러시아 5인조의 거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재능이 없다며 음악세계로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아길레프는 음악가가 되는 대신 연출가로 큰 성공을 거뒀고 훗날 스승의 작품인 <세헤라자데> 등을 파리로 가지고 가 환호를 받았다.[3] 1904년 러일전쟁이 터져 후원이 중단될 때까지 예술세계를 발행했다.[4] 심지어 미성년자도 있었다.[나중에] 여자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