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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22:54:33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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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12.31-1564.10.15)

해부학의 창시자이자 의사. 베살리우스 덕분에 그 당시까지 천하게 취급받던 외과의사의 지위가 내과의사만큼 향상되고, 그간의 질병관을 깨며 새로운 해부병리학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2. 생애

1514년 12월 3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1528년에 루벤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다 1532년에 왕실 약제사였던 아버지가 카를 5세의 시종(valet de chambre)이 되면서 파리에 대학을 다니기로 결정한다.

1533년~1536년까지는 파리 대학교 의학부를 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실비우스(Jacques Dubois, Jacobus Sylvius), 장 페르넬(Jean Fernel)밑에서 수학했다. 이 동안 동물 사체를 해부할 기회를 제법 가지게 되었고, 종종 성 이노센트 공동묘지(Saints Innocents Cemetery)[1]에서 사람의 뼈를 연구할 수 있었다.[2][3]

1536년에 고향 루벤으로 돌아간다.[4] 여기서 그는 요한 빈터 폰 안더나흐(Johann Winter von Andernach)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이듬해 졸업한다. 그의 논문은 라제스의 아홉 번째 책을 라틴어로 논문으로 냈다. 베살리우스는 과거 그의 교수들이 가르쳤던 해부학의 내용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고 베네치아에 잠시 있다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 외과의학 및 해부학 교수가 된다. 거기다가 볼로냐 혹은 피사 대학에도 방문해 강의를 하게 된다.

1539년에 파도바의 한 판사가 베살리우스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처형된 범죄자의 시체를 해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때 그는 세세한 해부도면을 제작해냈다.

1541년에 볼로냐에 있는 동안 베살리우스는 그동안 자신이 배워왔던 갈레노스의 해부가 사실은 사람을 해부해서 알아낸 것보다는 원숭이등과 같은 동물을 해부해서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짜맞춰낸 것이란 것을 발견했다. 물론 기존까지 보수적인 입장에 있던 이들은 베살리우스의 연구결과를 신용치 않았다. 이때부터 베살리우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저술할 책을 써내기 시작한다.

1543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일곱권으로 된 《De humani corporis fabrica》라는 책을 출간한다.[5] 그리고 몇 주 뒤에 학생들을 위한 요약판인 《Andrea Vesalii suorum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orum epitome》를 저술한다.이 저작으로 인해 카를 5세는 그를 황실 의사로 지명한다. 그러나 이 저작 때문에 그는 수많은 비난을 받게 되고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인 실비우스등의 비판을 받게 된다.[6][7] 그 이후에는 볼로냐, 피사등을 돌아다니며 공개 해부를 하며 돌아다닌다.

1555년 카를 5세 퇴임 후에는 펠리페 2세 때 역시 황실 의사로서 계속 활동하게 된다. 또한 평생 연금을 보장받고 궁중 백작(count palatine)으로 임명한다.

1564년 성지순례를 위한 여행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는다.[8][9] 그에 따라 베네치아, 키프로스에 들르고 예루살렘에도 가게 된다.[10] 그 후 10월 15일 이오니아 바다에 간 뒤 자킨토스 섬에 이른 뒤에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난다.[11]

3. 기타

베살리우스가 최초로 해부도를 남긴 사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몬디노(Mondino de Liuzzi, 1270~1326)가 1316년에 《해부학 Anathomia》을 남겼으며 베렌가리우스(Jacopo Berengario da Carpi, 1460–1530)가 10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하여 1521년에 인체해부도인 《몬디노의 해부학을 보충하는 주해, Commentary on Mondino》를 남겼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 죽고 나서 200년 지나서야 공개되긴 했지만 베살리우스보다 오히려 앞섰다. 물론 베렌가리우스의 경우는 해부학 지식의 부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 너무 늦게 발견되는 바람에 해부학 자체에 영향을 남긴 사람은 베살리우스를 최초로 보고 있다. 몬디노의 경우 갈레노스를 보충하는 정도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외에 중국에도 10세기에 연진인이 그린 해부도가 있으나 갈레노스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체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인정하지 않는다.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칠때 자신이 직접 해부를 행하며 보여줬는데 이게 당시 기준으로 꽤 참신하고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교수들이 강단 위에서 책만 줄줄 읽고, 실제 해부는 해체전문가[12]가 실행을 했다고 한다.
[1] 프랑스어로는 이노상(innocents, 공교롭게도 철자도 같다.)이라고 한다. 예수가 태어나던 때, 헤롯에게 죽은 죄없는 아이들을 의미한다.[2] 이 공동묘지는 이후 1780년에 파리 시민들의 건강 문제 때문에 폐쇄했고 1786년 없애버린다. 이 때문에 시 외곽에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Père Lachaise Cemetery),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 몽마르트르 묘지(Montmartre Cemetery)가 세워진다.[3] 당시 베살리우스는 대학에서의 수업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당시에 외과의술은 천하게 보았기 때문에 교수가 책을 읽으면, 외과의술과 이발을 동시에 담당하는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해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줬고 학생들은 그냥 멍청하게 지켜보았기 때문에 베살리우스가 이런 기행을 하게 된다.[4]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 대립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바람.[5] 그의 삽화는 대개 티치아노의 제자 요한 스테판 칼카르로 여겨진다.[6] 물론 이 과정에서 실비우스는 베살리우스를 비판하는데 엄청난 세월이 지나면서 인체도 같이 변했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등이 한창 비판 받던 때임과 동시에 아직 교조적인 분위기가 남아 그래도 비난은 많이 받았다. 실비우스는 나중에 직접 해부해 본 뒤에는 잘못을 인정한다.[7] 이때 파도바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그만 두고 안네 반 하메(Anne van Hamme)와 결혼을 한다.[8] 딸과 아내는 같이 가지고 않고 그 혼자만 가게 된다.[9] 당시 그가 인체를 해부한 것 때문에 종교재판의 압박 때문에 이것을 행하게 된다고 본다.[10]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팔로피우스의 죽음에 따라 베네치아에서 다시 파두아 대학 교수를 해달라는 요청도 받는다.[11] 자킨토스 섬 앞바다에서 배가 난파해서 익사했다는 기록도 있다.[12] 주로 이발사!!가 감당했다. 중세에 가위와 칼을 잘 다루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도 겸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