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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하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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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عبد المجيد الحافظ لدين الله‎‎
아브드 알 마지드 알 하피즈 리 딘 알라
영어 Abd al Majid al-Ḥafiz li Dīn Allah

재위 1132년 1월 23일 ~ 1149년 10월 8일
생몰 1075 / 1076년 ~ 1149년 10월 8일

1. 개요2. 생애
2.1. 혼란기의 섭정2.2. 치세
2.2.1. 1차 친정 (1132 ~ 34년)2.2.2. 왕자의 난 (1134 ~ 35년)2.2.3. 바흐람 (1135 ~ 37년)2.2.4. 리드완 (1137 ~ 39년)2.2.5. 친정 (1139 ~ 49년)
2.2.5.1. 내정2.2.5.2. 외정2.2.5.3. 연이은 반란과 진압, 그리고 죽음
3. 평가4. 갤러리

1. 개요

최후의 위대한 파티마 칼리파.

파티마 왕조의 11대 칼리파. 알 아미르의 사촌으로, 그의 어린 아들 앗 타이브가 사라지자 알 아미르가 임종 시에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명분 하에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이스마일파는 니자리 외에도 하피지와 타이비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알 하피즈는 선대에 겨우 억눌렀지만 여전히 재기를 노리던 막강한 와지르의 출현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공신인 와지르 야니스를 독살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와지르로 봉했지만 그들끼리 대립하는 것도 모자라 반란까지 일으키며 왕권 강화에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바흐람과 수니파 무슬림 리드완이 1130년대 후반부를 통치하였는데, 후자는 시리아의 부리 왕조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몸소 반란을 진압한 알 하피즈는 와지르 없이 친정하였다. 비록 1145년부터 베르베르계 나즘 앗 딘 살림 이븐 마살이 사실상 와지르로서 정무를 총괄하지만 칼리파의 권위는 유지되었다. 그러던 1149년, 리드완이 재차 반란을 일으켰고 니자르의 아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봉기하였다. 알 하피즈는 책략과 무력으로 둘 모두를 진압하고 사망하였다. 후반부 파티마 왕조에서 그는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칼리파였다.

2. 생애

파일:파티마 이슬람.png
알 무스탄시르부터의 계보

1075년경 아스칼론에서 당시 칼리파이던 알 무스탄시르의 아들 아불 카심 무함마드의 아들로 태어나 압둘 마지드로 명명되었다. (후일 쿤야 압둘 마이문이 더해짐) 그의 유년기는 베일에 쌓여 있다. 강한 정신력과 온건한 성품을 지녔고, 물건 수집을 즐겼으며 연금술과 천문학에 심취했다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그러다 1130년 10월 7일, 사촌인 칼리파 알 아미르가 불과 생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들 아불 카심 앗 타이브를 후계자로 두고 다른 섭정을 임명하지 않은 채로 암살당하자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파티마 조는 다시 계승 분쟁에 휩쌓였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압둘 마지드는 선대의 대신들 중 군대에 영향력이 있던 히자르 알 물크 하자르마르드와 바르가쉬의 지지를 받아 섭정에 올랐고, 두 대신 간의 투쟁 끝에 하자르마르드가 와지르가 되었다. 동시에 아르메니아인 아불 파스 야니스가 최고 사령관이자 비서실장을 맡았다.

2.1. 혼란기의 섭정

파일:이슬람 카이로.jpg
수차례 군사 반란의 현장이 되었던 바얀 알 카스린의 현재 모습

섭정으로서 압둘 마지드는 후계자를 의미하는 '왈리 아흐드 알 무슬리민' 칭호를 사용하였고, 앗 타이브를 내세우는 대신 알 아미르에게 임신한 후궁이 있으며 그 아이를 후계자로 지목했기에 그 출생 시까지 국정을 책임질 것이라 공표하였다. 한편 하자르마르드는 일전의 바드르 알 자말리나 알 아흐달과 같이 술탄에 준하는 권신이 되길 원하였고, 와지르 서임식을 화려하게 치렀다. 그러나 동서 궁전 사이의 광장 (바얀 알 카스라인)에 집결한 군대는 알 아흐달의 살아남은 아들 쿠타이파트를 와지르로 지지하며 봉기하였고, 궁전을 공격하였다. 하자르마르드는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잘린 머리가 길거리에서 행진당함으로써 그의 야망은 3일 천하로 끝났다. 10월 21일, 쿠타이파트는 와지르 겸 아미르 알 주유쉬 (총사령관)에 올랐고 동전과 칙령은 압둘 마지드와 그의 이름으로 발해되었다. 하지만 압둘 마지드는 장군 리드완 빈 왈라크쉬의 감시 하에 궁전 보물고 중 하나에 연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약 1년이 지난 후 기대와 달리 임신했던 후궁이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감을 얻은 쿠타이파트는 왕조의 폐지를 선포하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이스마일파의 국교 지위마저 박탈하며 스스로 '알 문타자르' (예정된 자)이자 '알 마흐디' (구세주)인 이맘 아불 카심의 대리인을 자처하였다. 그가 떠받든 이맘 아불 카심의 정체에 대한 학계의 추측이 난무한데, 정황상 열두이맘파의 마흐디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변혁에 대해 파티마 조의 기득권 층은 당연히 반발하였고, 알 아미르의 근위대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쿠타이파트를 암살하고 압둘 마지드를 석방하였다. (1131년 12월 8일) 일종의 왕정복고인 이 사건은 향후 매년마다 이드 앗 나스르 (승리의 축제)로 기념되었고, 파티마 조의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한편 석방된 후에도 (이전 칼리파들과 달리) 선대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던 압둘 마지드는 여전히 섭정의 지위로 통치하였다.

2.2. 치세

그렇게 두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신께서는 이슬람 공동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이맘 없이 두지 않으신다는 이스마일파 교리에 입각한 주변의 권유에 따라 압둘 마지드는 칼리파 알 하피즈 리딘 알라[1]로 즉위하였다. (1132년 1월 23일) 이는 파티마 조의 역사상 처음으로 권력이 부자 세습되지 않은 경우였고, 따라서 정통성 부여를 위해 '빛을 가렸던 구름을 걷어낸' 중흥 군주로의 권리를 강조하였다. 알 하피즈 본인도 이러한 사태를 예감한 알 아미르로부터 비밀리에 지목을 받았고, 역시 미래를 내다본 알 무스탄시르도 자신의 부친을 왈리 아흐드 알 무슬리민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였다. 그외에 무함마드에서 사위 알리로의 직접적이지 않은 세습 또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논리로 활용되었다. 한편 알 하피즈의 계승은 파티마 조의 영토 내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수용되었다. 다만 예멘의 제후 아르와 앗 술라이히는 앗 타이브를 이맘으로 지지하며 이스마일파는 더욱 분열되었다.[2]

불안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알 하피즈는 과디르 쿰과 같은 쉬아 행사들을 파티마 조를 기념하기 위한 축제로 바꾸었다. 또한 처음부터 친정에 나서는 대신 와지르들을 임명해 국정을 맡겼고, 동시에 그들을 면밀히 주시하였다. 그의 첫 와지르는 알 아흐달의 맘루크 출신으로 알 아미르 대에 비서실장 (사힙 알 밥)을 지낸 아르메니아인 야니스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니스는 알 아미르 시절 근위대의 절반을 처형하고 야니시야라 불리는 사병을 조직하였다. 다만 그는 재상에 오른지 9개월만인 1132년 말엽 사망하였고, 알 하피즈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야니스 사후 알 하피즈는 새로운 와지르를 선임하지 않고 일종의 회계 부서인 디완 앗 타흐키크 (감사원)의 장관 유한나 이븐 아빌 라이스마저 해임하며 왕권 강화에 나섰다. 또한 외국계 대신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망이 있는 샤리프 (무함마드 후손)들을 등용하여 지지 세력 확보에 나섰다.

2.2.1. 1차 친정 (1132 ~ 34년)

그 일환으로 샤리프 무타미드 앗 다울라에게 디완 앗 타흐키크를 맡겼고, 그 동생을 나킵 알 아슈라프 (샤리프들의 대표)로 봉하였다. 정치적인 조치와 함께 알 하피즈는 나일 델타 동부의 군사 반란을 진압하였고, 니자르의 처형 후 마그레브로 도주했던 그의 아들 알 후세인이 병력을 모아 이집트로 향하자 그 휘하 장교를 매수해 이집트에 당도하기 전에 알 후세인을 암살하였다. 내부를 다진 후에는 칼리파로써의 명분을 쌓기 위해 지하드에 나섰다. 1132년 파티마 군은 하이파 영주 위그 드 르 퓌세의 반란을 지원하였고 1141년에는 아슈켈론 주둔군이 출정하여 야파 ~ 카이사레아 일대를 습격하였다. 이에 예루살렘 국왕 풀크는 1141년 이벨린, 1142년 블랑슈가르드 등의 성채를 쌓아 야파-예루살렘 교통로의 안정을 꾀하였다.

2.2.2. 왕자의 난 (1134 ~ 35년)

1134년 알 하피즈는 왕세자 술레이만을 2년간 공석이던 와지르에 임명하여 계승 구도를 안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불과 두 달 후 그가 사망하며 이맘-칼리파의 무오류성에 대한 의심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후 아들들 중 하이다라가 후계자 겸 와지르로 선임되었는데, 이에 대해 다른 아들인 하산이 반발하였다. 하산은 바드르 알 자말리 ~ 쿠타이파트의 권력 기반이던 아르메니아계 주유쉬야 군단의 지지를 얻었다. 한편 알 하피즈와 하이다라는 수단 출신 흑인들로 구성된 라이하니야 군단의 지지를 받았다.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존재하여 하산과 주유쉬야는 순니 이슬람을 추종하며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을 공격하였다. 결국 6월 28일 주유쉬야가 라이하니야를 격파하였고, 하이다라는 궁전으로 도주하였다. 추격에 나선 하산은 궁전을 포위하였고, 놀란 알 하피즈는 하산의 주장대로 7월 19일 그를 후계자 겸 와지르로 봉하였다. 파티마조 사상 처음으로 강압에 의해 후계자가 책봉된 것이다.

실권자가 된 하산은 권력 기반으로 사병 조직인 시브얀 앗 자라드를 조직하여 그를 바탕으로 공포 정치를 행하였다. 알 하피즈는 상이집트의 흑인 주둔군을 불러들여 하산을 실각시키려 하였지만 그들이 격퇴되며 실패하였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유능했던 하산의 몰락을 부른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실정이었다. 하산은 1년도 안되는 기간에 1만 5천에 달하는 적들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폭정을 하였고, 특히 부를 노리고 상류층을 대상으로 삼았기에 그 어떤 계층으로부도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숙청의 칼날이 군대 지휘관들에까지 미치자, 1135년 3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산은 전례대로 칼리파 궁전으로 피신하였고, 알 하피즈는 그를 받아주긴 했으나 체포하였다. 이후 궁전 앞 광장에 집결한 병사들은 하산의 처형을 요구하며 불응할 시에 궁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였다. 알 하피즈는 가르비야 총독 바흐람 알 아르마니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2.2.3. 바흐람 (1135 ~ 37년)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기에 살리려 했던 알 하피즈는 결국 군대의 압박에 순응, 유대인 의사를 시켜 하산을 독살하였다. 광장의 병사들은 그들 중 대표가 궁전에 들어와 시신을 확인하고 수 차례 찔러 보고 돌아간 후에야 해산하였다. 사태가 마무리 된 후에야 카이로에 당도한 바흐람은 기독교도였음에도 와지르로 봉해져 사이프 알 이슬람, 즉 '이슬람의 검'이란 칭호를 받았다. 이맘-칼리파의 대리인으로써 이슬람 성직자들을 이끌며 종교 의례와 행사를 주도하는 역할도 있는 와지르 직에 기독교도가 임명된 것은 무슬림 군중의 반발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알 하피즈는 종교 행사에서는 바흐람이 불참하는 대신 수석 법관 (카디)가 와지르의 역할을 대신하고, (와지르에게 관레적으로 부여되던)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카디 알 쿠다트와 다이 앗 두아트 칭호를 수여하지 않은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까지 자신의 결정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무슬림 군중의 적대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바흐람은 기독교의 모든 교파들에 호의를 보여 교회에 대한 특권 부여 및 새로운 교회 건설을 허락하였고, 기독교도가 주류인 아르메니아 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따라서 당시 이집트 내의 아르메니아 인구는 3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바흐람의 동생 바사크는 상이집트의 쿠스 총독으로 부임하여 현지인들에게 폭정을 일삼았다. 외교에 있어서도 바흐람은 장기 왕조의 압박을 받던 십자군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였고, 1102년 라믈라 전투 당시 사로잡은 기독교도 포로 3백명을 석방하기도 하였다. 이에 무슬림들의 반감은 최고조에 이르었는데, 그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 1130년 말엽 당시 섭정이었으나 감금당했던 알 하피즈의 간수였던 리드완 이븐 왈라카쉬였다. 알 아미르의 치세에 주요 장군 중 하나가 된 리드완은 순니 무슬림이었고, 1135년 당시 사힙 알 밥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다.

1135년 5월 바흐람은 리드완을 아슈켈론 총독으로 봉하여 중앙 정치에서 배제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후자는 아슈켈론을 거점으로 아르메니아 이민을 막아 카이로 무슬림 여론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1136년 11월 바흐람은 리드완을 불러들여 자신의 과거 임지인 가르비야로 전임시켰다. 이 역시 역풍으로 이어져 리드완은 과거에 바흐람이 마련해 둔 독자적인 세력 거점을 가지게 되었고, 카이로의 관료들과 소통하며 모스크의 연단에서 바흐람에 대한 지하드를 설파하였다. 마침내 1137년 초엽 리드완은 현지 베두인들로 군대를 편성해 카이로로 진군하였고, 바흐람 휘하 무슬림 병사들 역시 전자 편으로 이탈하였다. 2월 3일 바흐람은 2천의 아르메니아 병력과 카이로를 떠나 쿠스로 도주하였다. 그후 카이로에서는 반아르메니아 폭동이 벌어졌고, 와지르 궁전 역시 약탈되었다. 한편 쿠스에 당도한 바흐람은 동생 바사크가 주민들에게 살해당하고 시신이 훼손된 것을 보았다.

바흐람은 보복으로 도시를 약탈하였으나 칼리파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방화하려는 병사들을 만류하였다. 이후 바흐람은 남쪽의 기독교 왕국인 누비아와 연대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따라서 파티마 조의 남쪽 경계인 아스완으로 향하였으나 총독이 성문을 걸어 잠그자 소하그 인근 아크밈으로 철수하였다. 궁지에 몰린 바흐람에게 알 하피즈는 편지를 보내어 관대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하였다. 첫째 안은 쿠스 & 아크밈 & 아시유트 총독이 되는 대신 소수의 추종자만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었고, 둘째 안은 본인과 그 친척들에 대한 아만 (안전 보장)과 함께 아크밈 인근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바흐람은 후자를 선택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알 하피즈에게 독실한 순니 무슬림이었던 리드완은 쉬아 칼리파제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흐람에 비하면 훨씬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교가 이단보다 나은 경우..

2.2.4. 리드완 (1137 ~ 39년)

파일:이슬람 대학 돔.jpg
1138년 알 하피즈가 증축에 나선 알 아즈하르 사원의 안뜰. 기둥 위의 아치와 예배당 정문의 돔을 추가하였다

리드완은 1070년경 카이로를 장악하고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를 드린 나시르 앗 다울라를 따르겠다고 공언하였다. 1137년 2월 5일에 취임한 그는 앗 사이드 알 아잘 알 아프달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 영주) 대신 알 말리크 알 아프달 (가장 뛰어난 군주) 칭호를 취하며 야심을 드러내었다. 강경파 무슬림을 자처한 리드완은 기독교 박해에 나서 기독교도 관료들을 무슬림으로 대체하였고, 재산을 압수했으며 일부는 처형되었다. 또한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에게는 특정 의복을 입고 모스크 앞을 지나갈 때에는 말에서 내리거나 아예 말 대신 당나귀나 노새를 타게 하는 등 각종 규제가 내려졌고 지즈야가 인상되었다. 바흐람의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해고되어 농민으로 정착하거나 이집트를 떠나 고향을 돌아가게 조치되었다. 동시에 리드완은 (카이로보다 순니 세력이 큰) 알렉산드리아에 시리아 양식의 샤피이파 마드라사를 설립하였다.

외교적으로 그는 같은 순니 계열인 부리 왕조의 바알벡 영주 샴스 앗 다울라 무함마드와 십자군에 대한 공동 전선에 나섰다. 이에 맞서 1138년 알 하피즈는 알 아즈하르 모스크에 대한 대대적인 증축에 나서 중정의 둥근 아치와 석고 장식, 중앙 예배당 입구의 돔 등을 더하였다. 같은해 리드완은 알렉산드리아 마드라사의 교장 이븐 아우프, 열두이맘파의 이븐 아비 카밀, 이스마일파 법학자이자 수석 다이 이스마일 이븐 살마 등과 함께 알 하피즈의 폐위를 논하였다. 뒤이어 그는 칼리파의 수하들을 체포해 처형하였다. 분노한 알 하피즈는 수도원에 유배된 바흐람을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리드완은 5월 31일 이둘 피트르 (라마단 종식) 때에 군주의 격식에 맞는 예복을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위세를 과시하였다. 결국 6월 8일, 궁전의 황금 문에서 알 하피즈와 리드완은 각자 문루의 위와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격한 논쟁을 벌였다.

분노한 리드완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궁전을 포위하고는 왕자들 중 하나를 데려와 그를 추대할 것이라 협박하였다. 하지만 근위대가 궁전을 굳게 수비하고 수석 다이 이븐 살라마가 이맘만이 후계자를 정할 수 있다며 반발하며 시간을 벌었다. 그러자 알 하피즈의 근위대가 반격에 나서 찬탈을 꾀하던 왕자와 그 추종자들을 죽였고, 6월 12일에는 밤을 틈타 20인의 근위대가 '알 하피즈 야 만수르' (알 하피즈, 승자여!)를 외치며 주와일라 성문을 통해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칼리파를 지지하는 군중과 병사들이 그들과 합류하여 봉기하였고, 리드완은 동생 및 조카와 라이하니야 부대 중 여전히 충성하는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포위를 뚫고 앗 나스르 성문을 통해 도시를 탈출하였다. 와지르 궁전은 다시 군중에게 약탈당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리드완은 베두인들과 함께 아슈켈론을 거쳐 부리 왕조에 망명하였다. 그중 살카드의 왕공 쿠무쉬타킨은 튀르크 기병대를 빌려주었다.

1139년 튀르크 기병대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온 리드완은 베두인들을 규합하여 카이로로 진군하였으나 8월 28일 성문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격퇴되었다. 한달 후 알 하피즈는 친히 하피지야와 아미리야 부대 및 근위대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재차 승리하였다. 패배한 리드완은 상이집트로 도주했다가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약속을 지킨 알 하피즈는 그를 궁전으로 압송하여 바흐람이 머무는 방 옆에 유폐시켰다. 한편 통치력을 회복한 알 하피즈는 재차 바흐람을 와지르로 선임하려 했지만 후자는 거부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바흐람은 칼리파의 최측근으로 남아있다가 1140년 11월에 사망하였고, 알 하피즈는 (기독교식 장례였음에도) 친히 운구 행렬에 참가하였다.

2.2.5. 친정 (1139 ~ 49년)

파일:알 하피즈 이슬람.jpg

114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행된 알 하피즈의 디나르 금화
2.2.5.1. 내정
리드완이 제압되고 바흐람이 일선 복귀를 사양한 후 남은 10여년의 치세 동안 알 하피즈는 와지르를 세우지 않았다. 지긋지긋 할만 하다.. 대신 행정 장관 격인 카팁을 임명하여 내정을 주도하게 하였다. 카팁은 민간 관료로써 군대에 대한 영향력이 배제되었고 종종 비무슬림들도 임명되었기에 칼리파의 신임에 절대 의존하였다. 이로써 반세기 이상 이어지던 와지르들의 '술탄화'는 일단락되었다. 첫번째 카팁은 이집트 기독교도인 아부 자카리였다. 바흐람에 의해 나지르 필 다와윈 (부서들의 총괄자)으로 임명되었던 그는 리드완에 의해 해임되어 추방당했던 상태였다. 알 하피즈는 그에게 본래 직위로 회복시킴과 함께 사니아 알 칼리파 (칼리파의 제자) 칭호를 하사하였다. 재무감으로써 아부 자카리는 세금을 착실히 거두었지만, 동시에 여유분을 사적으로 착복하였다. 그러던 1145년 횡령이 드러나자 알 하피즈에 의해 자신은 물론 동생 및 부친과 함께 처형당하였다.[3]

기독교도였던 아부 자카리의 전횡에 대한 무슬림 여론에 의하여 그의 후임자들은 둘 연속으로 리드완 정권 출신의 카디 (법관)들이었다. 그 선두이자 두번째 카팁인 아불 카람 앗 틴니시는 '알 무와팍크' (성공적인) 칭호를 받아 2년간 재직하였다. 1147년 9월, 세번째 카티비 된 무함마드 이븐 알 후세인 앗 타라불루시는 '알 무르타다' (선택받은) 칭호를 받았다. 기존 카팁들보다 많은 권력이 주어진 앗 타라불루시는 법원장도 맡았고, 금요 예배 시에 칼리파와 대동할 수 있었다.[4] 한편 1145년부터 알 하피즈는 내정 전반에 있어 베르베르인 살림 이븐 마살을 등용하며 사실상 재상과 같은 권력을 주었다. 와지르 대신 나지르 필 우무르 (업무 총괄자)와 나지르 필 마살리흐 (공익의 총괄자) 칭호를 받은 살림은 알 하피즈의 치세 말기에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군림하였고, 결국 알 하피즈의 사후 정식으로 와지르 칭호를 받으며 11년만에 제왕적인 와지르 체제를 부활시킨다.
2.2.5.2. 외정
외교에 있어 알 하피즈는 전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 노선을 유지하였다. 1140년 그는 아덴을 통치하는 번국인 주라이 왕조[5]의 알리 빈 사바 빈 압둘 수우드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예멘의 다이'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다만 사절단이 도착했을 당시 알리가 사망한 상태였기에 뒤를 이은 동생 무함마드가 책봉되었다. 십자군 국가들과도 1141년 늦봄에 일단의 십자군이 아슈켈론에 나타났다가 수비대에게 격퇴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1142년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로제르 2세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친선을 맺었다. 노르만 인들이 파티마 조의 옛 수도 알 마디야를 장악한 후, 종종 이집트 상선들이 나포되는 일이 있었음에도 친선을 제안받자 로제르 2세는 이를 흔쾌히 수용하고 1143년에는 양국 간의 무역 협정이 맺어졌다. 알 하피즈와 로제르 2세의 동행은 후자가 사망하는 1154년까지 유지되었고, 2차 십자군에 시칠리아 왕국이 불참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역사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파티마 조는 비록 옛 거점인 북아프리카에 개입할 힘은 잃었지만 이교도들과의 타협으로 일대의 정치, 경제적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는 이집트 상인들의 이익으로 이어져 비록 국력은 쇠퇴했음에도 파티마 조는 멸망 시까지 막대한 경제력 만큼은 유지할 수 있었다. 알 하피즈의 관용 하에 노르만 인들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홍해, 인도양 무역에까지 관여하였다. 다만 이러한 관용과 번영은 유럽인들의 야심을 자극하여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등 외침의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권과의 외교도 이어져 1144년 재차 예멘에 사절을 보냈고, 1147년 9월에는 다마스쿠스의 섭정 우누르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장기 왕조의 군주 누르 앗 딘에 대한 공동 전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2.2.5.3. 연이은 반란과 진압, 그리고 죽음
알 하피즈가 70대에 접어듦과 함께 한때 안정되었던 이집트는 다시 반란의 온상이 되었다. 1145년 알 하피즈의 아직 살아있는 숙부 중 한명인 아불 후세인이 사힙 알 밥 (비서실장) 쿠마르타쉬에게 자신의 칼리파 즉위를 돕는다면 와지르에 봉하겠다며 포섭하려 하였다. 다행히 쿠마르타쉬가 알 하피즈에게 고발하여 음모는 적발되었고, 후자는 아불 후세인을 감금하였다. 1146년에는 장군 바크티야르가 상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서부 사막의 루와타 베르베르 군대에게 패하였다. 다시 1148년 5월에는 9년째 궁전에 유폐되어 있던 리드완이 약 18m 길이의 땅굴을 통해 탈출하였다. 나일 강을 건너 기제로 향한 그는 베두인, 루와타 베르베르인 등을 규합하여 카이로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븐 툴룬 모스크에서 칼리파 군을 격파한 리드완은 패잔병을 추격하며 시내로 향하였고, 알 하피즈는 늘 그래왔듯 궁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였다.

노련한 칼리파는 리드완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의 요구대로 반군의 봉급으로 쓰일 돈까지 보내주었다. 동시에 알 하피즈는 근위대 중에서 흑인 병사 10명을 선발하여 리드완 암살을 맡겼다. 그들은 아크마르 모스크 주변에 있던 리드완을 향해 10년 전의 구호인 '알 하피즈, 야 만수르'를 외치며 돌격하였다. 난데없는 소동에 놀란 그가 말 위에 오르자 위치를 파악한 그들은 리드완과 그 동생을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로써 17년에 걸친 리드완과 알 하피즈의 악연이 종식되었다. 한편 1149년에도 니자르의 다른 아들이 루와타 뿐만 아니라 (파티마 조의 개국 세력인) 쿠파마 베르베르 인들까지 모아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하였고, 반격을 위해 파견된 토벌군 마저 격퇴하였다. 이에 알 하피즈는 전과 비슷하게 루와타 족장들을 재물과 나일 델타의 영지를 대가로 매수하여 그를 죽이게 하였고, 곧 카이로로 수급이 도착하였다.

같은해, 이번에는 경쟁 군사 집단인 주유쉬야와 라이하니야 병사들이 카이로 거리 한복판에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사람들이 시내로 들어가길 겁내는 상황이 이어진 끝에 패싸움은 주유쉬야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라이하니야는 기제로 축출되었다. 5년째 이어진 반란 외에 재해 역시 큰 피해를 야기하였다. 1139년 나일 강의 범람이 기록적으로 낮았고, 그로부터 시작된 기근과 역병은 1142년 이집트 전역을 휩쓸었다. 그러던 1148년, 나일 강의 범람이 이번에는 너무 높아 강물이 카이로 성문까지 차오르기도 하였다.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국정을 게을리 하지 않던 알 하피즈는 1149년 10월 10일, 극심한 복통을 앓고 사망하였다. 계승 위기를 의식한 듯 알 하피즈는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지만, 그 중 둘이 살해당하는 등의 비극으로 다들 요절하여 사망 시에는 16살의 막내 아들 아부 만수르 이스마일만이 남았다. 그는 칼리파 앗 자히르로 즉위하였다.

3. 평가

4. 갤러리

파일:아즈하르 모스크 이슬람.jpg
알 하피즈의 돔 내부. 석고 장식이 돋보인다
파일:이슬람 알 아즈하르.jpg
1138년 알 하피즈가 증축한 중정 일대
파일:이슬람 아즈하르.jpg
알 아즈하르 전체

[1] 하나님 종교의 수호자[2] 술라이히 조와 대립하던 함단 조와 주바이르 조와 같은 기타 예멘 왕조들은 그대로 알 하피즈에 복속하였다[3] 무슬림 사가들은 아부 자카리를 그의 칭호인 알 악크람 (가장 고귀한 자)에서 비꼬아 알 아크람 (코가 베인 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4] 그외에 터번 (하나크)의 끝을 궁내 환관들과 같이 할 수 있었다 한다.[5] 1138년 아르와 앗 술라이히가 사망한 후 예멘의 패권을 장악, 파티마 왕조 외에서의 하피지 이스마일파 맹주로 등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