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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4 16:22:56

알렉산드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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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통합 조지아 왕국 7대 군주
2차 이메레티 왕국 초대 군주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 알렉산드레 2세
파일:알렉산드레 2세.jpg
제호 한국어 알렉산드레 2세
조지아어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라틴어 Alexander II
가족 바그라트 6세(아버지)
타마르(아내)
바그라트 3세(장남)
다비트(차남)
바크탕(삼남)
기오르기(사남)
디미트리오스(오남)
티나틴(딸)
생몰 년도 미상 ~ 1510년 4월 1일
재위 기간 1478년(조지아 왕국)
1484년 ~ 1510년(이메레티 왕국)
서명
파일:알렉산드레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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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7대 군주, 2차 이메레티 왕국 초대 군주.

2. 생애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6대 군주 바그라트 6세의 아들이다. 1478년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카르틀리와 북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틴 2세가 수도 트빌리시를 위협하자, 조지아 서부의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 구리아의 카하베르 2세, 압하지야와 스바네티아의 공작들이 거부하면서,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케브수레티와 투체티의 산악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트빌리시를 재빨리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 전역의 많은 요새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렇게 수도를 잃은 그는 고리로 후퇴했지만 1479년 그곳마저 공략당하자 쿠타이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는 콘스탄틴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 2세가 이메레티를 침공하도록 도왔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메레티 귀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콘스탄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쿠타이시를 공략했다.

그는 랏차와 레흐쿠미 산악 지대로로 피신했고, 콘스탄틴 2세는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의 충성을 받아낸 뒤 쿠타이시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삼츠헤를 정버하러 떠났다. 그 사이 산악 주민들과 동맹을 맺은 그는 콘스탄틴 2세의 군대를 상대로 수년간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3년경 이 지역 유지의 딸인 타마르와 결혼했다. 같은 해 콘스탄틴 2세가 삼츠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여기에 1484년 콘스탄틴 2세의 핵심 지지자로서 이메레티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1484년, 그는 산악 민병대의 도움으로 쿠타이시를 탈환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즉위 후 이메레티 각지를 장악했지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략에는 실패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1485년 이메레티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치코리 전투에서 그와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게다가 1486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야쿠브가 카르틀리로 쳐들어오자,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 공작 라파리트 2세 다디아니는 그를 계속 적대했다.

1487년, 라파리트 2세는 콘스탄틴 2세에게 이메레티로 원정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장정들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산악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2세는 요새를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의 지배를 굳히려 했다. 1488년 야쿠브가 또다시 쳐들어왔지만, 콘스탄틴 2세는 알렉산드레 2세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이메레티를 장악할 걸 우려해 귀환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해 야쿠브를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야쿠브는 그들을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철수해야 했다.

1489년, 그는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랏차, 레흐쿠미 및 스바네티 산악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메레티의 여러 전략적 요새를 공략하고 쿠타이시를 탈환했다. 이에 진노한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한 뒤 카헤티, 이메레티, 삼츠헤 재정복을 위한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콘스탄틴 2세의 권력이 증가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지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콘스탄틴 2세는 평의회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 및 카헤티의 알렉산드레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약이 1491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서, 조지아는 3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이리하여 이메레티 국왕으로서 입지를 굳힌 그는 권력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강력한 귀족들과 맞서야 했다. 귀족 몇명은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땅과 귀족 칭호를 몰수당했으며, 왕실에 충성하는 다른 귀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흑해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인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와 구리아의 기오르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다음의 합의안을 맺기로 했다.
1. 왕실은 두 공국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2. 밍그렐리아와 구리아의 공작들은 쿠타이시에 세금을 납부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는다.
3. 밍그렐리아의 공작은 공작위에 오를 때부터 내무부 장관을 맡는다.
4. 구리아의 공작은 공작위에 오를 때부터 왕실군 사령관을 맡는다.
5. 밍그렐리아와 구리아는 왕실을 돕기 위해 병력을 공급해야 한다.
6. 왕은 두 공국의 땅에서 사냥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7. 왕은 왕자의 승계를 확정할 법적 권리를 보유한다.

한편, 그는 체르바치제와 스바네티아의 공작 가문을 예속화했고 압하지야 역시 자신의 주권을 강요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르바치제, 스바네티아, 압하지야는 쉽사리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게다가 밍그렐리아, 구리아와 맺은 협약으로 인해 이메레티 왕국의 단합력은 매우 떨어졌다. 물론 그도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1495년 장남 바그라트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콘스탄틴 2세와 새로운 평화협정을 맺어 반항을 일삼는 귀족을 토벌할 때 카르틀리 왕국의 도움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고, 나중에는 왕국의 실권을 여러 공국이 나눠가지고 왕은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1500년, 그와 콘스탄틴 2세, 자켈리의 카이호스로프 1세는 사파비 제국과 함께 반 오스만 제국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던 1505년, 콘스탄틴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다비트 10세가 카르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카르틀리를 공략하기로 하고, 1509년 군대를 이끌고 리키 산맥을 넘어 고리 시를 공략했다. 하지만 다비트 10세는 그와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왕실 평의회에서 침략자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그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난다."라고 응답했다. 그 덕분에, 그는 순조롭게 공세를 벌여 카르틀리의 북서 지역 전체를 공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갈수록 심해지는 와중에 동맹을 맺었던 카르틀리를 적으로 돌린 행위는 자충수였다. 1509년, 오스만 제국은 그가 카르틀리 원정을 떠나느라 본국을 비운 틈을 타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오스만군 총사령관 셀림 1세는 1509년 12월 이메레티에 진입하여 왕국을 황페화시키고 쿠타이시를 점령했으며, 조지아 서부의 종교 중심지인 젤라티를 파괴했다. 그는 급히 군대를 철수시키고 다비트 10세가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걸 용인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에 붙잡혀 아나톨리아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지 못했다.

1510년 3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쓰러졌고, 1510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그는 이해 초에 죽은 아내 타마르와 함께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타마르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바그라트 3세는 그의 뒤를 이어 이메레티 왕이 되었고, 차남 다비트는 1505년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삼남 바크탕은 바그라트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형괴 화해했다. 사남 기오르기 왕자는 안나라는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만 알려졌으며, 오남 디미트리오스는 1511년에 사망했다. 딸 티나틴은 촐로카슈빌리 공작 스피리돈 베나슈빌리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