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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레티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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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레티 왕국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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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레티 왕국의 국장

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
3.1. 서부 조지아 왕국(1259~1330년)3.2. 1차 이메레티 왕국(1387~1401년)3.3. 2차 이메레티 왕국(1484~1810년)

1. 개요

조지아어: იმერეთის სამეფო
영어: Kingdom of Imereti

1259~1330년, 1387~1401년, 1484~1810년에 조지아 남서부 이메레티주에서 바그라티온 왕조의 일원에 의해 세워진 군주국. 수도는 쿠타이시(Kutaisi, ქუთაისი)다.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과 함께 조지아 왕국의 후신이었다.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고 내부에서도 극심한 왕권 다툼과 분열에 시달리다 1810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2. 역사

2.1. 서부 조지아 왕국

1230년대 몽골군의 침략에 굴복하여 일 칸국의 봉신이 되었던 조지아 왕국은 매년 5만 골드의 공물을 바치고 조지아군을 보조병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던 1259년, 다비트 6세는 과중한 공물 납부와 일 칸국의 지나친 간섭으로 민생이 파탄나고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기는 꼴을 보다못해 일 칸국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은 아르군노인에게 대군을 맡겨 그를 토벌하게 했다.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부 조지아로 후퇴해 쿠타이시를 요새화했다. 아르군노인은 동부 조지아를 장악한 뒤 서부 일대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험준한 산악 지대에 버티고 있는 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철수했다. 일각에서는 이메레티 일대를 중심지로 삼았기 때문에 다비트 6세를 이메레티 왕국의 건국자로 칭하지만, 조지아 왕을 자처했고 이메레티 외에도 여러 지역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학계는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은 동부 조지아 일대와 대비해 '서부 조지아 왕국'이라고 칭한다.

그 후 다비트 6세는 일 칸국의 위협에 맞서 경쟁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264/1265년 맘루크 왕조에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킵차크 칸국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일 칸국 내부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다. 1269년, 그는 바라카 칸과 함께 아바카 칸에 대항했던 테구데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하지만 테구데르의 군대가 조지아의 주권을 위협하자, 그는 아바카 칸의 장군 시라문 노얀의 편을 들어 데구데르를 격퇴했다. 그러나 아바카 칸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도와줬던 걸 용서하지 않고 1270년대에 그를 징벌하고자 원정군을 두 번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산악 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몽골군에 상당한 피해를 안겼고, 결국 몽골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282년 4월,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 있는 틈을 타 트라페준타로 쳐들어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누일 1세의 딸이자 요안니스 2세의 이복 여동생인 테오도라를 후원하여 제위를 찬탈하게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2세가 1285년 트라페준타로 돌아온 뒤 테오도라를 조지아로 축출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을 조지아의 속국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3년 서부 조지아를 몽골로부터 지켜낸 다비트 6세가 사망한 후 장남 콘스탄틴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남동생 미하일은 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서부 조지아 왕국의 북부인 라차, 레흐후미 및 아르그베티에서 할거했다. 몇몇 귀족들은 형제의 갈등을 조정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형제가 왕좌를 놓고 대립하는 사이, 밍그렐리아의 다디아니, 스바네티의 겔로바니, 구리아의 구리엘리, 압하지야의 셰르바시제 등 일부 지방관들은 명목상 그를 왕으로 섬길 뿐 사실상 독립했다.

1327년 콘스탄틴 1세가 사망한 후 미하일이 단독 군주가 되었으나 독립한 귀족들을 복속시키는 데 실패했고, 서부 조지아는 여러 공국과 왕의 직할지로 분열되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귀족들은 전시에 군대를 보내주거나 일정한 세금을 쿠타이시에 보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1329년 미하일이 사망한 후 어린 아이였던 바그라트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귀족들에게 넘어갔다. 1330년 동부 조지아 왕국의 기오르기 5세가 리키 산맥을 넘어 조지아 서부로 진군했다. 지속적인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지친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서부 조지아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기오르기 5세는 그를 해치는 대신 쇼라피니로 보내서 영주로 지내게 했다. 이리하여 서부 조지아 왕국은 건국 70여년 만에 동부 조지아 왕국에 복속되었다.

2.2. 1차 이메레티 왕국

1387년, 바그라트 1세의 아들이며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조지아의 지방 최고행정관)을 맡고 있던 알렉산드레 1세티무르의 침략으로 동부 조지아가 초토화되면서 중앙 정부의 위상이 추락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조지아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는 조지아 국왕 바그라트 5세의 아들 기오르기 7세의 수중에 남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야, 압하지야, 스바네티 공작은 알렉산드레 1세의 합류 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알렉산드레 1세는 이메레티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나 재위 2년만인 1389년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1세는 이메레티의 더 많은 요새를 공략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 아르센을 1390년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1392년 밍그렐리아 공작 바메크 1세 단티아니와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전사했다. 바그라트 5세는 이 때를 틈타 아들 기오르기 7세에게 이메레티를 공략하고 조지아 왕국과 재결합하게 했다. 기오르기 1세의 콘스탄틴 2세와 알렉산드레 1세의 아들 디미트리오스는 북 코카서스로 도망쳐 발카르 제도에 숨었다.

1396년 콘스탄틴 2세는 기오르기 7세가 팀무르의 침략에 시달리느라 이메레티 방면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이메레티에 돌아와서 왕국을 재건했다. 이후 5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나, 1401년 밍그렐리아의 통치자 마미아 2세와 찰라간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전사했다. 그 후 이메레티는 조지아 왕 기오르기 7세에게 복속되었고, 디미트리오스는 남부 카르틀리의 솜히티 지역으로 유배되어 1415년까지 그곳에 억류되었다가 조지아 왕 알렉산드레 1세에 의해 풀려나 이메레티의 에리스타비를 맡았으나 실권은 없었다.

2.3. 2차 이메레티 왕국

2.3.1. 건국 과정

알렉산드레 1세바그라티온 왕조가 조지아 전역을 통제하려면 아들들을 중용해야겠다고 판단하고, 대귀족들을 숙청한 뒤 장남 바크탕 4세를 카헤티, 차남 디미트리오스를 이메레티, 그리고 3남 기오르기 8세를 카르틀리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아들들은 무제한적인 왕권을 마음껏 사용하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더 나아가 경쟁자를 제치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흘러가자, 그는 자기가 살아있을 때 왕위 승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1442년 장남 바크탕 4세에게 양위한 뒤 아타나시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원 서약을 하고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벨리 수도원에 들어갔다.

바크탕 4세는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을 왕중왕이라고 칭하면서 동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디미트리오스와 기오르기 8세가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귀족들도 각자의 주군을 추종했기 때문에 통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1446년 12월 바크탕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메레티의 권력자 디미트리오스와 카르틀리의 권력자 기오르기 8세가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그 결과 기오르기 8세가 승리하여 조지아 왕이 되었지만, 디미트리오스는 이메레티에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러다가 1452년 또는 1453년에 이메레티에서 권세를 누리던 디미트리오스가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조지아의 유일한 군주가 된 기오르기 8세는 디미트리오스의 아들 콘스탄틴 2세를 자기 보호 하에 두었으며, 1455년 바그라트 6세를 이메레티 통치자로 세웠다.

1462년, 이메레티의 통치자 바그라트 6세는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기오르기 8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했다. 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반란이 발발하자, 기오르기 8세는 즉각 토벌에 나섰다. 1463년, 리키 산맥을 넘어 이메레티로 진군한 기오르기 8세는 공식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쿠바르쿠바레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쿠바르쿠바레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에 도착했지만, 전장에서 멀리 진을 치고 전황을 관망했다. 양군은 치코리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바그라트 6세는 여세를 몰아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1465년, 기오르기 8세가 삼츠헤를 정벌하려 했다가 파라바니 호수 인근 전투에서 사로잡혀 아할치헤로 이송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사이, 바그라트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바그라트 6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기오르기 8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석방된 그는 삼츠헤군의 도움을 받으며 카르틀리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틀리 귀족들은 그가 바그라트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걸 우려해 따르지 않았다. 결국 카르틀리에서 패배한 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카헤티로 이동하여 다비트를 내쫓고 1466년 카헤티 왕을 칭했다. 이리하여 조지아는 양분되었고,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는 이 때를 틈타 조지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477년, 바그라트 6세가 사망한 뒤 차남 알렉산드레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카르틀리와 북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콘스탄틴 2세가 수도 트빌리시를 위협하자, 조지아 서부의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 구리아의 카하베르 2세, 압하지야와 스바네티아의 공작들이 거부하면서,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케브수레티와 투체티의 산악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트빌리시를 재빨리 점령하고 중앙 조지아 전역의 많은 요새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렇게 수도를 잃은 알렉산드레 2세는 고리로 후퇴했지만 1479년 그곳마저 공략당하자 쿠타이시로 피신했다. 그러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는 콘스탄틴 2세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 2세가 이메레티를 침공하도록 도왔다. 이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이메레티 귀족들은 알렉산드레 2세에게 등을 돌렸고, 콘스탄틴 2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쿠타이시를 공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랏차와 레흐쿠미 산악 지대로로 피신했고, 콘스탄틴 2세는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의 충성을 받아낸 뒤 쿠타이시에 수비대를 남겨둔 후 삼츠헤를 정버하러 떠났다. 그 사이 산악 주민들과 동맹을 맺은 그는 콘스탄틴 2세의 군대를 상대로 수년간 유격전을 전개했다.

1483년, 콘스탄틴 2세는 삼츠헤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트빌리시로 철수했다. 여기에 1484년 콘스탄틴 2세의 핵심 지지자로서 이메레티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밍그렐리아의 바메크 2세가 사망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이 때를 틈타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쿠타이시 탈환 작전을 개시해 쿠타이시를 손쉽게 탈환하고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략에는 실패했다. 한편, 콘스탄틴 2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후 1485년 이메레티를 재침공했다. 그러나 치코리 전투에서 그와 로르트키피나제 가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게다가 1486년 카라 코윤루의 술탄 야쿠브가 카르틀리로 쳐들어오자,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1487년, 밍그렐리아 공작 라파리트 2세 다디아니는 콘스탄틴 2세에게 이메레티로 원정하라고 권고했다. 콘스탄틴 2세는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장정들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알렉산드레 2세는 쿠타이시를 포기하고 산악 요새에서 농성했다. 적군이 요새를 포위하자, 그는 아들을 거기에 남기고 이메레티 북부의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2세는 요새를 함락시킨 뒤 이메레티의 지배를 굳히려 했다. 1488년 야쿠브가 또다시 쳐들어왔지만, 콘스탄틴 2세는 알렉산드레 2세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이메레티를 장악할 걸 우려해 귀환을 거부하고 2명의 장군을 보내 자신을 대신해 야쿠브를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야쿠브는 그들을 무찌르고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콘스탄틴 2세는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철수해야 했다.

1489년, 알렉산드레 2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리파리트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랏차, 레흐쿠미 및 스바네티 산악 부족 연합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서 이메레티의 여러 전략적 요새를 공략하고 쿠타이시를 탈환했다. 이에 진노한 콘스탄틴 2세는 왕실 평의회를 소집한 뒤 카헤티, 이메레티, 삼츠헤 재정복을 위한 원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평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콘스탄틴 2세의 권력이 증가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조지아 왕국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의했다.

파일:중근세 조지아 지도.png
1489년 조지아 왕국 헤체 당시 조지아 세력도.

콘스탄틴 2세는 평의회의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2세 및 카헤티의 알렉산드레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 협약이 1491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면서, 조지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메레티 왕국, 카헤티 왕국, 카르틀리 왕국의 3왕국과 5개의 공국으로 나뉘었다.

2.3.2. 알렉산드레 2세

10여 년간 내전을 치른 끝에 이메레티 왕으로 인정받은 알렉산드레 2세는 권력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강력한 귀족들과 맞서야 했다. 귀족 몇명은 처형되었고, 다른 이들은 땅과 귀족 칭호를 몰수당했으며, 왕실에 충성하는 다른 귀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흑해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인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와 구리아의 기오르기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다음의 합의안을 맺기로 했다.
1. 왕실은 두 공국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2. 밍그렐리아와 구리아의 공작들은 쿠타이시에 세금을 납부해야 할 의무를 면제받는다.
3. 밍그렐리아의 공작은 공작위에 오를 때부터 내무부 장관을 맡는다.
4. 구리아의 공작은 공작위에 오를 때부터 왕실군 사령관을 맡는다.
5. 밍그렐리아와 구리아는 왕실을 돕기 위해 병력을 공급해야 한다.
6. 왕은 두 공국의 땅에서 사냥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7. 왕은 왕자의 승계를 확정할 법적 권리를 보유한다.

한편, 그는 체르바치제와 스바네티아의 공작 가문을 예속화했고 압하지야 역시 자신의 주권을 강요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르바치제, 스바네티아, 압하지야는 쉽사리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게다가 밍그렐리아, 구리아와 맺은 협약으로 인해 이메레티 왕국의 단합력은 매우 떨어졌다. 물론 그도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1495년 장남 바그라트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콘스탄틴 2세와 새로운 평화협정을 맺어 반항을 일삼는 귀족을 토벌할 때 카르틀리 왕국의 도움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고, 나중에는 왕국의 실권을 여러 공국이 나눠가지고 왕은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1500년, 그와 콘스탄틴 2세, 자켈리의 카이호스로프 1세는 사파비 제국과 함께 반 오스만 제국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던 1505년, 콘스탄틴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다비트 10세가 카르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카르틀리를 공략하기로 하고, 1509년 군대를 이끌고 리키 산맥을 넘어 고리 시를 공략했다. 하지만 다비트 10세는 그와 맞서 싸우기를 거부했다. 왕실 평의회에서 침략자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그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난다."라고 응답했다. 그 덕분에, 그는 순조롭게 공세를 벌여 카르틀리의 북서 지역 전체를 공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갈수록 심해지는 와중에 동맹을 맺었던 카르틀리를 적으로 돌린 행위는 자충수였다. 1509년, 오스만 제국은 그가 카르틀리 원정을 떠나느라 본국을 비운 틈을 타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오스만군 총사령관 셀림 1세는 1509년 12월 이메레티에 진입하여 왕국을 황페화시키고 쿠타이시를 점령했으며, 조지아 서부의 종교 중심지인 젤라티를 파괴했다. 그는 급히 군대를 철수시키고 다비트 10세가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는 걸 용인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에 붙잡혀 아나톨리아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지 못했다. 1510년 3월,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중병으로 쓰러졌고, 1510년 4월 1일에 사망했다.

2.3.3. 바그라트 3세

알렉산드레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바그라트 3세는 1512년 동생 바크탕의 반란에 직면했지만 목히시 전투에서 격파했고, 카르틀리 왕국의 군주 다비트 10세의 중재로 동생과 화해했다. 1512년, 오스만 제국은 삼츠헤 공국과 동맹을 맺고 이메레티 왕국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다. 삼츠헤 공작 므제차부크 자켈리는 그해 여름에 오스만군의 지원에 힘입어 이메레티로 진격해 이메레티 수도 쿠타이시를 손쉽게 함락했고, 그는 메스케타아 산으로 피신했다. 오스만군은 쿠타이시를 약탈하고 이웃 마을들을 파괴했으며, 조지아의 이전 군주들이 안장되었던 젤라티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군대를 소집해 반격을 꾀했고, 그해 겨울 제카리 고개에서 자신을 추격해온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이후 오스만군은 보급이 끊길 위험에 처하자 남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킵카스 부족인 지기아인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고 압하지야와 밍그렐리아 항구에 대한 해상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지기아 해적들은 많은 조지아인을 붙잡아서 투르크 시장에 노예로 팔았다. 이후 그는 전쟁을 중단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게라티 수도원을 재건하고 파넬리제에게 수도원을 맡겼으며 게라티 주변 영지를 넘겼다. 파넬리제는 그 대가로 왕에게 자신의 영지를 사냥용으로 개방했다.

1512년 밍그렐리아 리파리트 2세가 사망하자 아들 마미아 3세 다디아니가 새 공작으로 즉위하는 걸 수용하고 아버지 대에 협의한 대로 그가 내무장관에 취임하는 것 역시 받아들였다. 구리아 공작 마미아 1세 역시 이 시기에 공작이 되었고 왕실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이후 압하지야 종교 지도자 회의를 소집해 노예 무역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으며, 절도와 살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성문화했다. 그리고 이슬람교가 왕국 내부에서 신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지아 정교회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1520년, 구리아 공작 마미라 1세와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5세와 동맹을 맺고 카르틀리 왕국을 침공했다. 이에 카르틀리 측이 평화 협상을 요구하자, 그는 국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조정하고 공동 방휘 협정을 맺기로 했다. 1525년 카헤티 왕국의 레온과 카르틀리의 기오르기 9세와 함께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3국의 영원한 우호를 서약했다. 그러나 1526년 3월 그가 딸 타마르를 카르틀리 왕자 루아르사브 1세와 결혼시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루아르사브 1세를 카르틀리 왕위에 올리기로 마음먹고, 1527년 카르틀리를 기습 침공해 기오르기 9세를 폐위시키고 루아르사브 1세를 왕위에 올렸다. 그 대가로 소라미와 보르조미 시를 포함해 프로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합병했다. 이에 카르틀리 왕국 주민의 이메레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그는 1530년대에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자 카르틀리 왕국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정복한 영토를 루아르사브 1세에게 반환했다.

1533년 1월, 그는 밍그렐리아의 마미아 3세와 구리아의 마미아 1세의 도움을 받으며 지기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해 1월 30일 가그라 앞바다에서 벌어진 첫번째 해전에서 연합군은 해적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다음날 샨디아 이날 이파 등 압하지야 귀족들이 배신한 여파로 해적들에게 크게 패했다. 밍그렐리아 공작 마미아 3세는 전사했고, 구리아 공작 마미아 1세는 지기아 해적에게 생포되었다. 이에 총대주교 말라키아 1세를 보내 마미아 3세의 유해와 마미아 1세의 반환을 협상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성사시켰다. 1534년,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오스만 일부 부대가 삼츠헤로 이동해 그곳의 내란을 종식시키고 쿠바르쿠바레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1535년 군대를 모으고 밍그렐리아, 구리아와 손을 잡고 삼츠헤를 침공했다.

1535년 8월 12일, 그의 군대는 무르자케티 전투에서 쿠바르쿠바레 5세와 맞붙었다. 쿠바르쿠바레 5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삼츠헤는 이메레티에 병합되었다. 쿠바르쿠바레 5세의 어린 아들 카이호스로는 이스탄불로 피신했다. 그는 새로 얻은 영토 중 자바케티를 카르틀리의 루아르사브 1세에게 제안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한편 구리아의 마미아 3세는 그로부터 아자라와 차네티를 받았지만, 밍그렐리아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1536년 7월 4일, 에르주룸의 군주 메흐메드 칸은 오스만 제국의 지령에 따라 삼츠헤를 침공하여 아르트빈과 나르만을 포함한 타오-클라제티의 여러 조지아 도시를 공략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 이슬람교를 강요하고 이메레티를 병합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몇년 간 이메레티 왕국에 습격대를 잇따라 보내 교회와 마을을 약탈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고자 사파비 제국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를 찾아가 병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봉신이 되겠다고 제안했지만, 샤한샤는 찰디란 전투 이래로 오스만 제국의 연이은 침공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병력을 그쪽으로 보낼 여유가 없었기에 거절했다. 1543년, 오스만 제국의 장군 무사 파샤는 60명의 귀족과 22,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삼츠헤로 이동하여 아직까지 이메레티 왕국을 따르던 도시들을 제압한 뒤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위협했다. 그는 제물과 열쇠를 무사 파샤에게 보냈고, 무사 파샤는 수비대와 대포를 삼츠헤의 도시인 올투에 남겨둔 뒤 철수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협정을 깨고 공세를 개시해 올투를 되찾고 오스만 제국의 대포를 손에 넣었다. 이후 구리아 병력과 합세한 그는 오스만군을 추격해 카라하크 전투에서 적군을 크게 물리치고 무사 파샤를 죽였다.

1545년 여름, 오스만 제국은 에르주룸과 디아르바키르의 총독이 이끄는 대군을 동원해 이메레티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그는 동맹국들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밍그렐리아 공국의 레온 1세는 일전에 삼츠헤를 정복할 때 성심껏 도와줬는데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거부했다. 그래도 카르틀리 왕국의 루아르사브 1세, 구리아의 마미아 3세는 즉각 도우러 와줬고, 연합군은 소호이스타 마을 인근에서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삼츠헤 출신의 조지아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배신하는 바람에 참패했고, 삼츠헤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스만 제국은 카이호스로프를 삼츠헤의 통치자로 세웠다. 그는 삼츠헤를 되찾기 위해 1546년과 1553년에 잇따라 공격했으나 모조리 패배했다. 이에 서방인들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를 청했으나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다. 이후 삼츠헤는 차츰 이슬람화되다가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서부 조지아의 완전한 통일을 달성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강력한 귀족들을 처단하기로 했다. 1546년, 그는 밍그렐리아의 공작 레온 1세 다디아니를 호니로 초대해 사냥을 함께 하다가 돌연 체포했다. 레온 1세는 젤라티 수도원의 종탑에 연금되었다. 그는 즉시 밍그렐리아를 합병하기로 하고 구리아 공작 로스톰에게 밍그렐리아를 함께 치고 싶으니 자신과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스톰은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초대를 거절하고 밍그렐리아 공작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삼츠헤의 군주 카이호스로프는 왕실 고문 중 한 명인 호필란드레 츠크헤이드제에게 뇌물을 주어 레온 1세 다디아니를 석방시켜서 삼츠헤로 이송시켰다. 그 후 레온 1세는 로스톰의 도움으로 밍그렐리아의 수도인 주그디디에 도착하여 밍그렐리아의 권력을 되찾았다.

자신을 감금한 것에 원한을 품은 레온 1세는 이메레티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을 자처했다. 1549년, 오스만 제국은 구리아 공국의 지배하에 있는 차네티와 아자라를 침공했다. 로스톰은 그와 레온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그는 동생 바크탕의 지휘하에 500명의 분견대를 보냈다. 이때 그는 동생에게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사이의 군사 동맹을 막으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다. 바크탕은 이에 따라 밍그렐리아인들에게 후퇴하도록 설득했고, 구리아는 이로 인해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바투미와 고니오를 빼앗겼다. 그 후 오스만군은 다라몽 남작 가브리엘 드 루에츠[1]의 지휘하에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가 바니 일대의 25개 요새를 파괴하고 쿠타이시를 위협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선언했고, 오스만 제국은 막대한 공물을 받고 물러났다.

1555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는 아마샤 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은 이 조약에서 트란스캅카스 일대를 분할하기로 했다. 이메레티 왕국은 이 협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놓였고, 막대한 공물을 부과받았다. 그는 아마샤 조약을 훼방놓기 위해 카르틀리와 사파비 왕조의 영향권에 있는 수아미를 공격해봤지만 격퇴당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조용히 지내다 1565년에 사망하고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3.4. 기오르기 2세

바그라트 3세 사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2세는 과거 바그라트 3세의 초대를 받고 갔다가 체포되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밍그렐리아 공국의 레온 1세의 도발 행위에 시달렸다. 레온 1세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된 뒤 오스만군이 이메레티를 침략하는 걸 도왔다. 반면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는 여전히 이메레티 왕국을 따랐다. 양자간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다가 1566년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와 밍그렐리아의 레온 1세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양측은 곧 화해했고,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는 레온 1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구리아 공작은 얼마 안가 아내와 이혼했고, 양국의 감정은 악화되었다.

1568년 레온 1세는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를 폐위하고 사촌인 호스로프를 왕으로 세우려고 침공했지만, 1568년 이아네티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2세와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가 밍그렐리아로 쳐들어갔고, 레온 1세는 이스탄불로 망명했다. 오스만 술탄 셀림 2세는 레온을 지원해주기로 결의하고 1568년 에르주룸과 트라페준타에서 차출한 9척의 오스만 군함과 수천 군인을 레온에게 맡겨 구리아로 상륙하게 했다.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는 오스만 군에 굴복하고 레온과 함께 밍그렐리아에서 이메레티 왕국군을 축출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아네티 전투 때 레온 1세를 도왔던 공작 자바흐 칠라제를 연회장에 초대한 뒤 암살했다. 이에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와 밍그렐리아 공작 레온 1세가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가 왕실군을 격파하고 칠라제 가문의 영토를 공유했다.

1572년, 레온 1세가 사냥 도중 사고로 사망하고 기오르기 3세 다디아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동생 마미아가 자신에게도 영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전의 기미가 감돌았다. 그는 이 기회에 밍그렐리아 공국을 약화시키기로 마음먹고, 기오르기 3세에게 동생 마미아가 칠라제의 영지를 받게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아들 바그라트를 기오르기 3세의 누이와 결혼시켰다. 이에 이메레티와 밍그렐리아가 동맹을 맺고 자신을 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는 마미아를 지원하여 밍그렐리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1573년, 구리아 공작은 밍그렐리아를 전격 침공해 밍그렐리아 수도 주그디디를 점령하고 기오르기 3세를 압햐지야로 내쫓은 뒤 마미아를 밍그렐리아 공작에 앉혔다.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칠라제 영역의 몫이 밍그렐리아 공국의 소유로 돌아가는 걸 허용했다. 1578년 압하지야로 피신한 기오르기 3세는 이메레티 왕의 시누이인 타마르 체르바키제와 결혼하여 아자라의 호파 항구를 이메레티 왕국에 제공했다. 이후 왕은 마미아를 밍그렐리아 공작위에서 축출하고 기오르기 3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한편 이 시기에 바그라트 왕자가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된 기오르기 3세의 누이는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구리아 공국, 밍그렐리아 공국, 그리고 이메레티 왕국은 3자 결혼 동맹으로 연결되었다.

1580년경, 밍그렐리아 공작 기오르기 2세의 삼촌이자 사드자바코 백작인 바툴리아 다디아니가 공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공작을 도와 반란을 토벌하고 바툴리아를 오조르게티에 가두었다. 그러나 바툴리아를 처형하라는 왕명을 밍그렐리아 공작이 거부하자, 그는 요원을 보내 바툴리아를 암살했다. 이에 분노한 밍그렐리아 공작은 이메레티 왕국을 적대했다. 이렇듯 이메레티 왕국 내부 상황이 혼란스럽자, 투르크 상인들은 이 때를 틈타 이메레티 왕국으로 꾸준히 침입해 주민들을 잡아들여서 노예로 팔았다. 선왕 바그라트 3세는 조지아 주민이 노예로 팔리는 걸 엄격히 금지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사문화되어 버렸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캅카스 일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1578년 9월 1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트빌리시를 파괴하고 카르틀리 왕국의 다비트 11세를 폐위한 뒤 이메레티 왕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이에 맞서 이메레티와 카르틀리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한 리키 산맥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오스만군이 산길을 따라 진입할 때 기습 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때 오스만군에 종군하고 있던 많은 조지아 귀족들이 이메레티군에 살해당했다. 그는 투르크군으로부터 탈취한 수많은 보물과 함께 쿠타이시로 돌아가승리를 자축했다. 그해 11월 1일 무스타파 파샤가 재차 공세를 가하자, 그는 리키 산맥에서 또다시 격파했다. 오스만군은 연이은 패배에 큰 충격을 받고 이메레티 공국 공략 계획을 취소했다.

1581년, 술탄 무라트 3세는 무스타파 파샤를 코카 시난 파샤로 교체했다. 시난 파샤는 삼츠헤의 군주이자 오스만 제국의 봉신인 마누차르 2세의 중재하에 그와 협상했다. 시난 파샤로부터 카르틀리 왕권을 넘겨줄 테니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라는 권유를 받은 그는 이에 혹해 받아들였다. 그는 밍그렐리아 및 구리아 동맹군을 이끌고 카르틀리 북부를 침공했고, 시난 파샤는 카르틀리의 시몬 1세와 직접 대결하기로 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이메레티와 오스만 연합군은 트빌리시에 입성했다. 시난 파샤는 그의 아들인 마미아를 '유수프 벡'이라는 이름으로 티빌리스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자 이메레티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게 했다.

그러나 1582년 시몬 1세가 사파비 제국의 지원하에 반격을 가해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오스만 연합군을 무크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카르틀리 왕국의 독립을 보장해야 했다. 1582년, 밍그렐리아 공작 기오르기 3세 다디아니가 사망하고 형제 마미아 다디아니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마미아는 구리아의 기오르기 2세를 공격해 이스탄불로 망명하게 만든 후 기오르기 2세의 형제 또는 아들인 바크탕을 구리아의 군주이자 밍그렐리아의 가신으로 삼았다. 그는 밍그렐리아가 강성해지는 걸 걱정했지만, 딱히 막을 방도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기오르기 2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이름과 출신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알렉산드레 왕자를 낳았고, 두번째 아내인 루수단 체르바치제와의 사이에서 바그라트 왕자와 레반을 낳았고, 세번째 아내인 타마르 디아사미제와의 사이에서 로스톰과 마미아, 알렉산드레를 낳았다. 장남 알렉산드레와 차남 바그라트가 그보다 먼저 죽었기에, 1583년경 레반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동생 콘스탄틴과 조카 로스톰이 왕위를 노릴 걸 우려해 그들을 유폐시켰다. 2년 후인 1585년 사망했고, 레반이 왕위에 올랐다.

2.3.5. 레반, 로스톰, 바그라트 4세

기오르기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반은 기오르기 2세의 동생 콘스탄틴의 반란에 직면했다. 콘스탄틴은 한때 스칸다, 카츠키, 아르게티를 포함한 리오니 강 동쪽 영토를 장악하고 왕을 자처했다. 레반은 반란 진압을 위해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마미아 4세 다디아니의 딸 마레흐와 결혼하고 지원을 받았다. 그 결과 1587년경 삼촌을 물리치고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아르게티의 영주로 삼았다. 그러나 1588년, 카르틀리 왕국의 군주 시몬 1세가 일전에 기오르기 2세가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자신을 쳐서 하마터면 축출될 뻔했던 일에 복수하고자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왔다. 그는 이에 맞섰으나 고판토 전투에서 참패하고 레흐쿠미 지방으로 도피했다.

시몬 1세는 오스만 제국군이 카르틀리 왕국으로 쳐들어오는 걸 막고자 철수했지만, 마미아 4세는 레반 대신 콘스탄틴의 아들 로스톰을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1589년 일전에 마미아 4세에 의해 구리아 공작에서 축출된 기오르기 2세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고 쿠타이시로 쳐들어와서 마미아 4세를 죽이고 로스톰을 몰아낸 뒤 바그라트 4세를 왕위에 앉혔다. 얼마 후, 시몬 1세가 재차 이메레티를 침공해 바그라트 4세를 몰아내고 쿠타이시를 장악한 뒤 수비대를 배치하고 떠났다. 로스톰은 밍그렐리아로 달아나 새 밍그렐리아 공작 마누차르 다디아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누차르 다디아니는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쿠타이시로 진군해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그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몬 1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쿠타이시로 쳐들어갔고, 그는 산악 지대로 달아나 오디시에 숨었다. 시몬 1세는 스칸다, 크바라, 카츠키, 스베리 등 여러 요새를 장악하고 수비대를 배치한 뒤, 로스톰이 달아난 오디시로 진군해 그를 붙잡았다. 1590년, 마누차르 다디아니는 옵슈크비티 전투에서 시몬 1세를 격파했다. 시몬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카르틀리로 철수했고, 마누차르는 쿠타이시를 탈환하고 로스톰을 왕위에 복귀시켰다. 이후 로스톰은 시몬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포로와 인질을 교환했다. 한편, 레반은 여전히 왕위에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로스톰에 항전했으나, 1590년 끝내 패배하고 사로잡힌 뒤 밍그렐리아의 슈케티 요새로 이송된 후 옥사했다. 이리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된 로스톰은 1605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2.3.6. 기오르기 3세, 알렉산드레 3세

로스톰 사후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3세는 1615년 아바스 1세에 의해 축출된 카르틀리 왕국의 루아사르브 2세와 카헤티 왕국테이무라즈 1세를 받아들였다. 1618년 장남 알렉산드레 3세를 구리아 공작 마미아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2년 후 알렉산드레 3세는 아내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해 강제 이혼하여 친정으로 보냈다. 이에 구리아 공작 마미아와 밍그렐리아 공국의 군주 레반은 이메레티 왕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1623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맞붙었다. 그러나 고르트리 전투에서 밍그렐리아-압하지야 연합군에게 참패했다. 레반은 많은 귀족을 사로잡고 부유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밍그렐리아의 세력이 갈수록 강성해지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테이무라즈 1세와 맞서던 카헤티 귀족 기오르기 사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1626년 사카제가 테이무라즈 1세에게 패배하자, 그는 방침을 바꿔 테이무라즈 1세와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레 3세와 테이무라즈의 딸 다레잔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재위 말기, 그는 다시 한 번 레반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아들 알렉산드레 3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풀려났으나 몇년 만인 1639년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레 3세는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 2세를 적대했다. 레반 2세는 이메레티 왕국 백성들을 납치해서 오스만 제국으로 팔아넘기기 일쑤였고, 기오르기 3세를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한 번은 포로로 잡아서 그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든 레반 2세를 물리치려 애썼지만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1647년 동생 마무카에게 군대를 맡겨 레반 2세를 치게 했으나 오히려 패했고, 마무카는 사로잡힌 뒤 실명형에 처해진 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654년 살해당했다. 한편, 그의 장인인 테이무라즈 1세는 1648년 사파비 왕조의 침략을 피해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에 장인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듯 이메레티 왕국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자, 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1651년 사절단을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보냈다. 그는 사절 앞에서 자신을 러시아의 신민으로 표명하며 충성 서약을 맺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당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북방전쟁을 치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메레티 왕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1658년 레반 2세가 사망하자, 그는 레반 2세가 후계자로 지목한 바메크 1세 대신해 리파리트 3세를 공작에 앉히는 데 성공하고 밍그렐리아를 봉신으로 삼았다. 1660년 구리아 공작 카이호스로프가 사망하자, 역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구리엘리 대신에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으로 삼고 역시 봉신으로 삼았다. 이렇게 이레메티 왕국의 권위를 회복하는 듯했으나, 얼마 후인 1660년 3월 1일 또는 4일에 사망했다. 그 후 이메레티 왕국은 60여년 간 대혼란에 휩싸였다.

2.3.7. 대혼란

알렉산드레 3세 사후 왕위에 오른 바그라트 5세는 아버지의 후처이자 자신의 계모인 네스탄 다레잔의 조카딸인 케테반과 결혼했다. 그러나 1661년, 네스탄 다레잔은 남편을 꼬드겨서 자신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케테반에게 반감을 품고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다른 신부를 맞이하라"라고 권고했다. 그가 거절하자, 네스탄은 그를 폐위시키고 실명형에 처했다. 네스탄 다레잔은 연인인 바크탕 츠추나슈빌리를 새 왕으로 추대한 뒤 그와 결혼하고 여왕을 자처했다. 귀족들은 세력이 한미한 귀족은 바크탕의 즉위에 반발하여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바메크 3세 다디아니와 오스만 제국의 아슬란 파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슬란 파사는 쿠타이시를 점령하여 두 사람을 몰아냈다.

바메크 3세는 왕을 칭하려 했지만 아슬란 파샤의 압력을 받자 왕위를 바그라트 5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나 실명 상태였던 그가 왕노릇을 제대로 할 리 없었고, 바메크 3세가 실권을 잡았다. 얼마 후 카르틀리 왕 바크탕 5세가 같은 바그라티온 왕실이 다스리는 국가인 이메레티의 혼란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들어왔다. 바크탕 5세는 바메크 3세와 협의한 끝에 이메레티 서쪽은 바메크 3세가 관장하고 동쪽은 자신이 관장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쿠타이시 시만 주어졌다.

바메크 3세 다디아니는 바크탕 5세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딸과 바크탕 5세의 아들 아르칠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바메크 3세는 곧 마음을 바꾸고 결혼을 취소했다. 이에 바크탕 5세는 구리아 공작 디미트리오스, 압하지야 및 이메레티 상부 지역의 귀족들과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메테리로 진군해 삭헤라 인근에 진을 쳤다. 바메크 3세는 즉각 응전했고, 양군은 삭헤라 인근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바메크 3세는 밍그렐리아 공국의 수도인 오디시로 도주했고, 바크탕 5세는 쿠타이시를 함락시키고 바그라트 5세를 억류한 뒤 오디시 인근으로 진격했다. 바메크 3세는 수도를 지킬 가망이 없자 스바네티로 피신했다. 바크탕은 오디시를 점령한 뒤 그곳에 주둔한 수비대를 학살하고 바메크의 가족과 재물을 모조리 확보했다.

바메크 3세는 스바테니에서 내부의 배신으로 살해당했고, 바크탕 5세는 쿠타이시로 돌아와 14세 아들 아르칠리를 이메네티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바그라트 5세는 카르틀리로 끌려가 한동안 억류되었다. 하지만 1663년, 카르틀리 왕국의 주군인 사파비 제국이 개입하여 아르칠리를 물러나게 했다. 이후 이메네티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바그라트 5세를 풀어줬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두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새 밍그렐리아 공작으로 취임한 레반은 그가 왕으로 복귀한 걸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그러나 이메레티 귀족들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이어진 전투에서 왕실군에게 패배하고 생포했다. 그는 레반에게 아내 타마르와 이혼하라고 강요하고 뒤이어 타마르와 결혼했다. 그 대신 자신의 누이 티나틴을 그와 결혼시킨 뒤 오디시로 돌려보냈다.

1666년, 이메레티의 대신 세크니아 크하이체는 눈이 멀어서 정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와 비밀리에 접촉해 투르크군이 이메레티로 오게 했다. 크하이체는 비밀리에 쿠타이시로 잠입해서 요새를 장악하고 수도에 투르크 수비대를 남겼다. 1667년 또다른 귀족 베잔 도르키파니제가 정변을 일으켜 쿠타이시를 탈환하여 투르크 수비대를 죽이고 요새를 바그라트 5세에게 돌려줬다. 1668년, 당시 투르크에 억류되어 있던 네르탄 다레얀 여왕이 아슬란 파샤에게 자신과 남편 바크탕 츠추나슈빌리를 복위시키면 2만 알틴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해 가을, 아슬란 파샤는 다레얀 여왕과 바크탕을 데리고 이메레티를 침공했다. 그는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카르틀리로 달아났고, 투르크군은 이메레티 전역을 황폐화시켰다. 아슬란 파샤는 다르얀과 바크탕을 옹립한 뒤 풍부한 전리품을 챙기고 아할치헤로 귀환했다.

다레얀과 바크탕은 레흐후미의 수장인 코시야 라슈키슈빌리를 동지로 삼고 이메레티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코시야는 정변을 일으켜 다레얀과 바크탕을 살해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은 구리아 공작 디미트리오스 구리엘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곧 그의 통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다시 정변을 일으켜 디미트리오스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후 추방했다. 1669년, 카르틀리 왕국의 군주 바크탕 5세는 이메레티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바그라트 5세를 돌려보냈고, 귀족들은 그를 세번째로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메레티 귀족 세크니아 치헤이드제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연합하여 대항했다. 이메레티 귀족들이 즉각 이들을 공격해서 취하리 전투에서 격파했다. 세크니아는 전사했고, 레반은 오디시로 달아났다.

1671년, 레반은 대군을 동원하여 이메레티를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그라트 5세를 따르는 군대에게 참패하여 사로잡힌 뒤 바그라트 앞으로 끌려왔다. 그는 레반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한 뒤 풀어줬다. 구리아 공작 기오르기 구리엘리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아슬란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슬란 파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그는 아내 타마르를 크바라 요새로 보내고 군대를 이끌고 이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1672년 쿠타이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바그라트 5세는 아슬란 파샤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을 왕위에 남겨두라고 요청했고, 아슬란 파샤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의 아들 알렉산드레 4세를 인질로 데려갔다.

1672년 겨울, 바그라트 5세는 군대를 모아 구리아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황폐화시켰다. 이후 1674년 쿠타이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요새를 점령하고 투르크 수비대를 몰아냈다. 이에 아슬란 파샤는 사절을 보내 그가 요새를 반환하면 알렉산드레 4세를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귀족들의 조언에 따라 쿠타이시의 요새를 아슬란에게 반환하고 알렉산드레 4세를 돌려받았다. 얼마 후, 카르틀리의 아르칠리 왕자와 기오르기 구리엘리 공작이 아슬란을 찾아가서 바그라트 5세를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여긴 바그라트 5세는 1677년 딸 다레얀과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결혼을 주선해 자기 편으로 삼았다.

1678년, 카르틀리 왕자 아르칠리가 이메레티 왕국에 쳐들어와서 수라미를 점령하고 많은 이메레티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그 후 쿠타이시로 진군해 왕위에 올랐고, 바그라트 5세는 구리아로 도주했다. 아내 타마르는 스칸다 요새에 남아있다가 아르칠리가 요새를 함락시킨 뒤 밍그렐리아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에 맞서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함께 아슬란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슬란 파샤는 에르주룸 파샤 휘하의 투르크군을 파견하여 이메레티로 파견했다. 1679년 8월 투르크군은 아르칠리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했고, 이메레티 귀족들은 바그라트 5세 편을 들었다. 아르칠리는 키르틸리로 도주했고, 에르주룸 파샤는 아르칠리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이메레티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바그라트 5세는 4번째로 이메레티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바그라트 5세는 군대를 모아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과 전쟁을 벌였다. 레반은 패배했고, 바그라트 5세는 아내 타마르를 되찾은 뒤 재혼했다. 레반은 바그라트 5세를 지원하는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화해하고 자신의 아들 마누하르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1680년 레반이 사망하자 기오르기는 마누하르를 살해하고 밍그렐리아를 함락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1681년, 맹인 왕 바그라트 5세는 4차례에 걸쳐 폐위와 복위를 반복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무리하고 숨을 거두었다.

본래 바그라트 5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5세가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카르틀리 왕국에 인질로 가 있어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 대신 구리아 공작 카이호스로 1세의 장남 기오르기 구리엘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683년, 아할치헤의 파샤는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를 설득하여 알렉산드레 4세를 풀어주게 한 뒤 투르크군을 이끌고 이레메티로 쳐들어갔다. 사전에 아할치헤 파샤와 내통하고 있던 이메레티 귀족들은 대거 귀순했고, 그는 구리아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레 4세는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전처인 다레얀을 아바시제 공작 파아타 아바시제와 결혼시켜 자기 편으로 삼았다.

1684년 기오르기 구리엘리가 라차 공작 쇼시타, 레흐쿠미의 로드키파니제, 밍그렐리아의 가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메레티로 쳐들어가서 블라케르네의 테오도토스 성상을 약탈했다. 그는 파아타 아바시제와 미켈라제 공국의 지원을 받고 반격을 가했고, 양군은 로키티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기오르기 구리엘리가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고, 자식들은 아할치헤로 달아났다. 그는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형제 말라키아를 새 구리아 공작으로 세웠다. 이후 기오르기 11세의 조카인 엘레나와 결혼했다. 그는 뒤이어 파푸네 에리스타비가 다스리는 라차 공국을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많은 마을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이에 파푸네의 친척인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가 파푸네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그는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해 파푸나에게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누이 다레얀과 결혼하고 강권해 성사시켰다.

이후 파아타 아바시제가 죽자, 뒤이어 아바시제의 공작이 된 기오르기 아바시제는 이메레티 왕국 내에서 입지를 강화했다. 여기에 1685년, 기오르기 구리엘리의 아들인 카이호스로 구리엘리가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로부터 투르크군을 받고 구리아로 돌아와 그가 임명했던 공작 말라키아를 추방하고 새 공작에 취임했다. 말라키아는 아할치헤로 도망쳤고, 유수프 파샤는 말라키아와 카이호스로를 화해시켰다. 카이호스로는 말라키아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말라키아가 구리아로 돌아오자 곧바로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다. 이에 분노한 유수프 파샤는 군대를 파견하여 구리아를 정벌했다.

1687년, 아르칠리 왕자가 러시아에서 라차로 이동한 뒤 크림 칸국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을 이메레티 왕으로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이후 파푸나, 기오르기 리파리티아니, 베잔 로르키파니제 등 여러 귀족들과 합세하여 쿠틸리시로 진군했다. 하지만 요르요스 아바시제와 시몬 쿠텔리의 지원을 받은 그가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을 대적했고, 아르칠리는 수적인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디시로 도망쳤다.

1688년,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가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폐위되어 파푸나가 다스리던 라차 공국으로 망명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헤라클리오스 1세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파푸나에게 기오르기 11세를 넘기라고 명령했다. 파푸나가 명령을 거부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라차를 침공했다. 파푸나는 기오르기 11세와 함께 밍그렐리아로 망명했고, 이메레티군은 라차 공국 각지를 파괴했다. 그 후 아르칠리와 기오르기 11세는 크림 반도로 망명하기로 하고 압하지야로 이동했으나 바다를 건널 방법을 찾지 못하고 오디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의 통치자이자 밍그렐리아 공국의 가신인 기오르기 리파리티아니가 알렉산드레 4세와 화해하자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오디시를 떠나 기오르기 미켈라제의 땅인 사칠라오로 피신했다.

아르칠리와 기오르기 11세가 카르틀리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아르칠리가 이메레티 왕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소유물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르칠리는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이메레티를 떠나 카르틀리로 돌아갔다. 한편, 아르칠리의 사절을 접견한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2세는 카푸치를 이메레티에 보내 알렉산드레 4세와 아르칠리 중 누가 적임자인지를 알아보게 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카푸치를 죽이려 했지만, 카푸치는 압하치헤로 도주한 뒤 그곳에서 기오르기 11세를 만났다. 기오르기 11세는 카푸치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카푸치로부터 아르칠리가 적임자라는 보고를 받은 쉴레이만 2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로브와 세이버를 하사했다.

1690년, 에르주룸 파샤는 쉴레이만 2세로부터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에 세우라는 지시를 받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르칠리와 함께 쿠타이시로 진군했다. 알렉산드레 4세는 피신했고, 아르칠리는 쿠타이시에 입성했다. 그러나 아르칠리는 인근 요새에 주둔 중이던 투르크 군을 포위 공격한 일로 투르크인과 갈등을 벌였다. 한편, 알렉산드레 4세는 압하지야 파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1691년 압하지야 파샤가 보낸 투르크군이 이메레티를 침공했고, 많은 귀족은 아르칠리에서 알렉산드레 4세 편으로 넘어갔다. 아르칠리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카르틀리로 도망친 뒤 드발레티를 거쳐 러시아에 망명했다. 그러나 체르케제티에서 체포될 뻔한 뒤 카르틀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후 알렉산드레 4세는 요르요스 아바시제의 딸 타미르와 결혼하여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권한을 억제하는 시도를 잇따라 벌이면서 그들의 미움을 샀다.

이 시기, 기오르기 11세는 파푸나와 함께 라차 공국에 복귀한 뒤 레반 다디아니를 몰아내고 밍그렐리아 공작을 칭한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함께 알렉산드레 4세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많은 이메레티 귀족들이 가담했고, 차기 왕으로 아르칠리 왕자를 세우기로 합의했다. 1695년, 파푸나 에리스타비가 이끄는 이메레티 귀족들은 스칸다에서 사냥 중이던 알렉산드레 4세를 습격해 체포한 후 스베르스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후 기오르기 11세에게 넘겨진 그는 루이시로 끌려가서 목이 졸려 죽었다.

그 후 아르칠리가 귀족들에 의해 네 번째로 이메레티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1696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와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기오르기 5세를 왕위에 옹립했고, 기오르기 5세는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딸 타마르와 결혼했고, 장인 기오르기 아바시제가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1698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와 귀족들이 마음을 바꿔 아르칠리를 왕으로 올리기로 하고 그를 죽였다. 아르칠리는 처음엔 복위를 거부했지만 친척들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복위했다.

오스만 술탄 무스타파 2세는 아르칠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압하지야 파샤에게 그를 몰아내라고 명령했다. 압하지야 파샤는 카르틀리 왕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알렉산드레 4세의 아들이며 그의 궁정에서 자란 시몬 왕자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헤라클리오스 1세가 지시에 따르자, 압하지야 파샤는 시몬 왕자와 함께 이메레티로 쳐들어갔다. 귀족들은 곧바로 압하지야 파샤와 시몬 왕자 편으로 넘어갔고, 그는 1698년 가을에 라차로 망명했다가 다시 러시아로 피신했다. 압하지야 파샤는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시몬을 이메레티 왕으로 옹립했다.

시몬은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딸 아니카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아니카의 누이이자 기오르기 5세의 미망인인 타마르와 권력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많은 귀족들이 타마르를 지지하자, 그는 카르틀리로 피신했고, 기오르기 아바시제가 섭정으로서 이메레티를 통치했다. 구리아 공작 마미아 구리엘리는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두려워해 시몬을 왕좌에 다시 앉히기로 마음먹고, 셀림 파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셀림 파샤는 헤라클리오스 1세에게 시몬을 아할치헤로 보내라고 했고, 시몬이 오자 다시 구리아로 보냈다. 마미아 구리엘리는 그에게 아니카와 이혼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라고 권고했고, 그는 이를 따랐다.

이와 같은 상황에 위협을 느낀 기오르기 아바시제와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사칠라오에서 군대를 모았다. 그러면서 마미아 구리엘리에게 시몬을 죽이고 왕위를 스스로 차지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혹해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고, 1701년 자객을 보내 시몬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기오르기 아바시제가 왕실 영지와 수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그는 구리아 신민을 노예로 팔아서 재원을 충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1702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에 의해 폐위되어 구리아로 달아나야 했고, 기오르기 아바시제는 기오르기 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가 관장하는 밍그렐리아 공국이 압하지야인들의 침략으로 큰 타격을 입자, 기오르기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압하지야를 공격했다. 그는 압하지야 일대를 황페화시키고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후 압하지야 공작 로스톰 셰르바시제와 기오르기 라파르티아니를 화해시키고 압하지야 공작에게서 에그레시 강 유역의 땅을 빼앗고 인질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할치헤의 이사크 파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걸 중단했고, 이사크 파샤는 이에 분노하여 이스탄불에 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술탄 무스타파 2세는 에르주룸의 셀림 파샤에게 이메레티 왕국을 정벌하고 시몬의 동생인 기오르기 7세를 왕위에 올리라고 명령했다.

투르크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 구리아와 밍그렐리아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산길을 틀어막아 적의 진군을 최대한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일전에 그에게 밀려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마미아 구리엘리는 그를 배신하고 기오르기 7세의 편에 섰다. 오스만 제국군은 아르그베티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쿠타이시를 압박했으나,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아흐메트 3세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쇼라피니 요새를 파괴하고 인질과 선물을 에르주룸에 넘겼다. 또한 기오르기 7세를 입양하고 이메레티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1703년 투르크군이 철수하자 태도를 바꿔 병사들에게 적을 추격해 섬멸하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많은 투르크군이 전사하고 아할치헤의 이사크 술탄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그들에게 내줬던 전리품을 모조리 회수했다. 기오르기 7세는 그를 두려워하여 쿠타이시 요새로 피신했고, 기오르기 6세는 이메레티 왕을 계속 자처했다. 그러나 또다른 이메레티 대귀족인 기오르기 미켈라제는 기오르기 7세에게 충성하고 기오르기 7세가 전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1세의 딸인 로담과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이에 기오르기 6세와 기오르기 미켈라제 간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기오르기 6세는 구리아 공작과 밍그렐리아 공작의 지원을 받아 미켈라제를 공격해 크게 이겼고, 미켈라제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한편, 카르틀리의 왕 바크탕 6세는 기오르기 6세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하며 그의 아들 레반을 카르틀리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 동의했지만, 레반이 카르틀리 왕에 의해 사파비 제국으로 보내질 거라는 첩보를 입수하자 거부하기로 했다. 이후 바크탕 6세는 기오르기 7세를 돕기로 했다. 1707년,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의 지원과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의 왕으로 등극했다. 기오르기 7세는 그에게 모든 왕실 영지를 포기하고 영지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그는 총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기오르기 7세와 협상하려 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자 밍그렐리아 공작이자 우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도 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원군을 보내줬고, 그는 바케 마을 인근에서 기오르기 7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09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의 아들들과 기오르기 6세의 조카들은 기오르기 7세의 편으로 넘어갔다. 기오르기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쿠타이시에서 출발하여 기오르기 6세가 있는 마츠키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장남 파아타 아바시제에게 요새 수비를 맡긴 뒤 포위망을 뚫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합세하려 했다. 기오르기 7세는 이들이 합류하는 걸 막기로 하고 야간에 리파르티아니의 진영을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베리 요새로 피신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츠키 요새로 돌아와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파아타 아바시제는 곧 항복했다. 기오르기 7세는 카츠키를 점령한 뒤 모든 주민을 노예로 팔고 뒤이어 스베리 요새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기오르기 6세는 적의 공세를 격퇴한 뒤 바크탕 6세의 초청에 따라 카르틀리 왕국으로 피신했다.

기오르기 7세는 형 시몬을 죽인 마미아 구리엘리에게 원한을 품고,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와 화해한 뒤 그와 연합하여 마미아의 영지인 구리아를 공격했다. 그 결과 구리아 일대가 황폐화되었지만, 마미아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던 1711년,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기오르기 7세를 배신하고 쇼호타 에리스타비, 베잔 리파르티아니 및 주라브 아바시제 공작과 함께 마미아 구리엘리를 이메레티 왕으로 복위시켰다. 기오르기 7세는 이에 맞서려 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귀족들이 대거 이탈하자 카르틀리로 도피하여 고리에서 바크탕 6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때 기오르기 6세도 여기에 있었다. 기오르기 7세는 바크탕 6세에게 기오르기 6세를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곧 바크탕 6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기오르기 6세와 화해했다. 기오르기 6세는 이메레티로 넘어간 뒤 영지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기오르기 7세는 삼츠헤로 이동한 뒤 이삭 파샤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기로 했다. 1712년, 기오르기 7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진군했다. 마미아 구리엘리는 이에 맞서 출진했지만, 취하리 전투에서 패배한 뒤 라차로 도피했다. 1713년, 마미아 구리엘리는 밍그렐리아 공국, 라차, 아다시드제와 함께 기오르기 7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연합군은 오크리베 전투에서 왕실군을 물리쳤고, 기오르기 7세는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이리하여 이메레티 왕위에 세번째로 올랐지만 1714년 1월에 사망했고, 아할치헤의 파샤로부터 원조를 받은 기오르기 7세가 재차 이메레티로 진군해 왕위에 올랐다.

기오르기 7세는 귀족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베산 리파르티아니와 주라브 아바시제는 그를 인정하는 걸 거부하고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사치레 요새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게구티로 후퇴했다. 베잔이 아버지를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를 밍그렐리아 공국에서 추방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이를 수락했고 주라브 아바시제와도 화해했다. 그러나 베잔 리파르티아니와 주라브 아바시제가 왕명을 사사건건 거역하자, 그는 이들에게 반감을 품고 밍그렐리아의 일부 영토에서 근근히 버티고 있던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를 게구티로 초대해 베잔을 타도하는 걸 돕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베잔은 아버지를 함정으로 유인해 체포한 뒤 아버지의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이에 기오르기 7세는 기오르기 리파르티아니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포기하면서도 주라브 아비시제를 직접 공격해 영지를 파괴했다.

1716년, 베잔 다디아니와 주라브 아비시제는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에게 기오르기 7세를 타도하고 마미아 구리엘리의 아들인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왕위에 앉히고 싶다고 요청했다. 아슬란 파샤는 이에 동의하고 투르크군을 파견했다. 그는 이에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자 라차로 도주했다. 투르크군은 기오르기 7세를 한달 간 추격했지만 끝내 잡지 못하자 쿠타이시로 돌아간 뒤 기오르기 구리엘리를 기오르기 8세로 즉위시켰다. 기오르기 7세는 스비모네티로 이동해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지만, 아슬란 파샤에게 따라잡혀 크게 패해 많은 벼열겨을 잃고 카르틀리 왕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기오르기 8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곧 구리아로 망명했다. 이후 다디아니 가문, 아바시제 가문, 에리스타비 가문이 왕국 전체를 자기들 마음대로 나눠 가졌다. 그는 1717년 봄에 이메레티로 돌아왔지만, 귀족들이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자 아할치헤로 도피했다. 이후 귀족들은 1719년까지 이메레티 왕을 선출하지 않았다.

기오르기 7세는 아할치헤에 도착한 뒤 마침 구리아에서 어머니 엘레나와 분쟁을 벌이다가 다른 귀족들의 침공을 받고 아할치헤로 도주한 기오르기 구리엘리와 만나 화해했고, 구리엘리의 누이인 타마르와 결혼했다. 아할치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기오르기 구리엘리는 에르주룸으로 가서 그곳의 파샤로부터 군대를 지원 받고 구리아로 돌아가 공국을 되찾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추방했다. 한편, 기오르기 7세는 이스탄불로 이동한 뒤 술탄 아흐메트 3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간청했다. 1719년, 아흐메트 3세는 마침내 그를 돕기로 하고 아할치헤의 이사크 파샤에게 이메레티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해 8월, 그는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레티로 진입하여 수도 쿠타이시를 점령했다.

기오르기 7세는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투르크군은 귀족들의 영지를 공격해 많은 전사를 죽이고 마을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는 투르크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다디아니 가문의 소유인 밍그렐리아를 초토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귀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로 했고, 투르크군은 귀환했다. 그러나 그가 투르크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자신들을 짓밟은 것에 원한을 품은 귀족들은 그를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1722년 2월 22일, 기오르기 7세는 시몬 아바시제의 초대를 받고 연회에 참석했다가 살해되었다. 그를 따라갔던 추종자들은 사로잡힌 뒤 노예로 팔렸다. 기오르기 구리엘리는 쿠타이시로 이동해 새 왕으로 즉위했으나 1720년 6월 귀족들에게 쫓겨났고, 기오르기 7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5세가 왕위에 올랐다.

2.3.8. 알렉산드레 5세

장장 60여년 간 12명의 군주가 즉위와 폐위를 끊임없이 반복했던 초유의 혼란기는 알렉산드레 5세의 즉위 후 잦아들었다. 알렉산드레 5세는 밍그렐리아 공국의 공작 베잔 다디아니의 딸 마리암과 결혼했다. 이 결혼식 비용은 베잔이 전적으로 부담했는데, 이는 당시 이메레티 왕국의 국고가 바닥나서 결혼식을 치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잔은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면서도 내심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 투르크 세력을 은밀히 지원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선임된 그를 암살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마리암이 막아줬고 다른 귀족들이 방해한 덕분에 실패했다. 기오르기 7세의 미망인인 타마르 굴리엘리와 치콘디디의 주교 가브레일은 에르주룸의 쾨프뤼 압둘라 파샤에게 "베잔이 12살의 노예를 왕위에 세우는 대가로 자기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파샤에게 편지를 보내 타마르와 가브리엘을 체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카르틀리 왕국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카르틀리 국왕 바크탕 6세는 조지아를 통일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1722년 8월에서 11월 사이, 바크탕 6세와 바카르 왕자는 표트르 1세의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일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자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1723년 1월 카헤티 왕국콘스탄틴 2세가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를 침공하자, 그는 바크탕 6세를 돕기 위해 시몬 아바키제 장군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트빌리시는 1723년 5월 8일에 함락되었고, 시몬 아바키제를 포함한 이메레티 군대는 학살당했다. 바크탕 6세는 유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아내 루수단을 이메레티 왕국으로 피신시켰다. 1724년 이스탄불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트란스캅카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고, 바크탕 6세는 러시아로 망명했다.

1725년, 구엘라티의 주교 구에데반이 드바리스티셰 성채를 점령하고 중앙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와 베잔은 함께 요새를 포위 공격했고, 성벽 밑을 파내는 공사를 벌인 끝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했다. 1726년, 기오르기 아바시제의 아들 레반 아바시제가 초라파니 요새를 공략했지만 곧 베잔에게 반격당하여 탈취되었고, 베잔은 왕실에 충실한 가문의 후예인 주라브 아바시제에게 요새를 맡겼다. 1724년 7월 스칸다로 순행하던 그는 라차 공작 초치타 3세에게 공격받았다. 초치타 3세는 마을을 파괴했지만 그가 숨은 요새는 남겨뒀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술루키조 요새, 세바 등 라차 공국 남부 요새를 파괴한 뒤 풍부한 전리품을 가지고 쿠타이시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서부 조지아가 단 한 명의 공작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베잔의 권력 강화에 경계심을 품었다. 차일다르 파샤의 아들인 유수프 빈 이차크 다켈리는 1728년 8월 압하지야 공작 로스톰 체르바키제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그는 이를 논의하는 차원에서 요츠빌리 궁전에서 알렉사느데 5세를 만났고, 뒤이어 베잔과 아들 오티아 다디아니를 소환했다. 베잔은 궁전에 들어왔다가 오스만 군인에게 참수되었고, 그가 이끌고 온 밍그렐리아 근위대는 학살되었다. 여기에 초치타 3세 역시 소환되어 알렉산드레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리하여 권신 베잔 다디아니는 몰락했지만, 여전히 권위가 약했던 그는 구리아 공작 마미아 4세 구리엘리와 동맹을 맺고 마미아 4세의 딸 로담과 결혼했다. 그리고 체레텔리 가문과 아구아슈빌리 가문의 권력을 증진시키고, 라차 공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초치타 3세의 형제에게 제공했던 바리 공국을 그의 왕실 영지로부터 단절시켰다. 이에 반감을 품은 초치타 3세는 1730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맞서 초라파니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함락시켰지만, 주라브 아바시제가 오스만 지원군과 함께 초라파니에 상륙해 도시를 정복하고 수비대를 주둔시키는 걸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731년, 초치타 3세는 이아치빌리 가문의 영지였던 사드멜리를 포위 공격했고, 왕군을 지휘했던 레반 아바시제를 인질로 잡았다. 오티아 다디아니는 반란에 가담해 이메르 장군을 그의 영지에 가두었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라오니 강을 건너 사드멜리에 주둔한 적을 야습해 수많은 라츠인을 살해하고 레반 아바시제를 체포했다. 이후 많은 사바치조 죄수들과 레반을 맞바꾸기로 했고, 죄수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초치타 3세가 1731년 사망한 후에도 아들 그리골 치헤티제는 밍그렐리아 공국과 동맹을 굳게 맺어 왕실에 대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사바키조 동맹과 손을 잡기로 하고 사바키조 공작 레반의 딸 타마르 아바키제와 결혼했다. 양자의 갈등이 점점 깊어진 끝에, 1732년 12월 23일 반란군은 그의 형제인 마무카 바그라티온 왕자를 왕위에 세웠다. 마무카가 오티아 다디아니, 그리골 치헤티제 등과 함께 이메레티를 침략하고 쿠타이시를 향한 맹공을 퍼부었지만, 그는 술루키제의 군 사령관 레반 아바시제와 바리 공작 게데반과 연합하여 쿠타이시를 지켰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침공 위협을 가하자, 반란군은 쿠타이시에서 철수했다.

1733년, 오스만 제국은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사이의 삼각지대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포티에 오스만 총독을 임명해 서부 조지아 해안을 합병하려는 계획을 진전시켰다. 1735 ~ 1739년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압하지야와 러시아 국경의 아조프 시 사이에 살고 있는 유목 민족들을 예속시키는 작전을 벌여 흑해에 대한 영유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 와중에 그와 오티아 다디아니에게 증원을 요청했는데, 오티아 다디아니는 거부했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이 강력한 귀족들을 억누르는 것을 도와주길 희망하며 받아들였다. 오티아 다디아니는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을 병합하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오스만군은 오티아의 참가 거부를 응징하기 위해 밍그렐리아를 파괴하고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을 불태웠다. 이후 압하지야로 진격했고, 압하지야인들은 오스만군의 약탈을 피해 코카서스 산맥으로 피난했다. 압하지야 공작은 저항을 포기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하미드 베이가 되었으며 사로잡힌 수천 명의 민간인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러한 오스만군의 원정에 동행한 그는 코도리 호를 건너 자케티아 국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더 이상 갔다가는 불순종을 일삼는 귀족들이 자기가 없는 틈을 반란을 꾀할 수 있었기에, 아조프까지 가는 건 거절했다.

오스만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조프로 데려가려 하자, 그는 야간에 전리품을 남겨두고 조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나 엥구리에 이르렀을 때 오스만-압하지야 연합군의 습격을 받았고, 수많은 병사가 투르크군에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고 그는 군사 고문들과 함께 코도리 강에 몸을 던져 한참 동안 헤엄친 끝에 겨우 빠져나갔다. 밍그렐리아에 가까스로 도착한 그는 오티아 다디아니의 보복 공격에 직면했고, 캇소 다디아니 성채로 피신한 뒤 오티아에게 인질을 제공한 뒤 수도로 겨우 귀환했다. 한편 오스만군은 그가 떠나자마자 아조프에 대한 원정을 중단했다.

이후 왕국 내부의 긴장감은 더욱 악화되었다. 1734년, 마무카는 오티아 다디아니, 그리골 라차, 주라브 아바키제의 지원을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밀려오자, 그는 구리아 공작 마미아 4세, 레반 아바키제, 캇소 다디아니, 바리의 귀데반, 메라브 툴루키제, 그리고 몇몇 소수 이메르 귀족들과 함께 반란군에 맞섰다. 양군은 1734년 겨울 치코리에서 맞붙었다. 한창 격전이 벌어진 끝에 오티아 다디아니가 중상을 입고 왕실 근위대에 붙잡혔고, 캇소 다디아니는 전사했다. 그는 승리를 거둔 뒤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백명의 라차, 밍그렐리아, 레차 귀족들을 붙잡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았으며, 1,700명의 반란군 포로들을 쿠타이시로 끌고 갔다.

반란 진압 후, 그는 반란군이 재집결하는 걸 막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이차크 다켈리에게 선물을 주며 도움을 호소했고, 투르크 장군 마흐메트 벡을 사크헤레 지휘관으로 삼아 왕실의 권위를 강화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게 "이번 반란은 반 오스만 세력이 일으킨 준동"이라고 설명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받아들여 카르틀리 왕국에 주둔하고 있던 산자크베이 기비 아밀라크바 휘하의 군대를 이메레티로 북상시켰다. 그는 투르크군의 도움에 힘입어 사칠라오 백국을 공략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내 정책을 바꾸어 조지아 서부의 분할 정책을 추진했다. 마무카는 사칠라오와 사미켈라오 지방을 제안받았고, 오티아 다디아니는 석방된 뒤 잃어버렸던 영토를 되찾았다. 또한 오스만군은 더 이상 알렉산드레 5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이에 고무된 귀족들은 알렉산드레 5세를 상대로 반란을 꾀했다. 1734년 말, 마무카는 세베카 성채를 공략하고 사치드자바초 일대를 공략했다. 또한 1735년 알렉산드레 5세와 주라브 아바사제 사이의 평화 협약에 화가 난 파푸나 체레텔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레 5세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사세레텔로 전역을 파괴했지만, 파푸나의 거주지인 모담나케 요새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렇듯 왕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갓 태어난 아들 솔로몬 1세를 메스헤티아의 마마츠민다 마을에 거주하는 하층 귀족 가문에 보내 양육하도록 했다. 여기에 동방의 위협도 거세졌다. 1735년, 나디르 샤가 사절을 그에게 사절을 보내 쿠타이시를 자신에게 넘기고 항복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이를 무시하고 오스만 제국에 더욱 의존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오스만 제국에 의존하기만 했다가는 조만간 왕국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게 뻔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에도 끈을 댈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1736년 6월 16일 러시아군이 아조프를 점령하고 흑해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자, 그는 이에 희망을 걸고 1737년 9월 티모테 가바슈빌리 주교를 대표로 삼은 35명의 사절단을 러시아 제국에 파견했다. 가바슈빌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에게 국왕의 편지를 전하고 이메레티 왕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이 서부 캅카스 일대를 장악하는 걸 돕겠다고 덧붙였다. 왕은 서신에서 2만 명의 러시아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흑해에 대한 협동 작전을 추진하고 투르크 점령 하에 있는 해안 요새를 러시아로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안나 이바노브나는 사절을 정중하게 대접했지만, 전선이 너무 커지는 걸 걱정하여 알렉산드레 5세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다만 향후 동맹의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가바슈빌리에게는 가까운 시일에 회답을 넣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돌려보냈다. 1739년 10월 3일,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니사 협약을 체결하면서 평화 협약을 맺었고, 러시아가 자신들을 당분간 돕지 않을 게 분명해진 걸 확인한 가바슈빌리는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떠났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알렉산드레 5세는 왕권 강화에 더욱 치중했다. 1738년 이아슈빌리 경에게 라차 공작 그리골로부터 크바라 성채를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크바라는 함락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골이 반격을 가해 크바라를 점령한 왕실군을 격파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은 하라가울리 요새 총독을 붙잡아 그의 발과 손을 자르고 눈을 멀게 했다.

1739년, 라차 공작 그리골은 주라브 아바시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 그리골과 주라브는 오티아 다디아니와 연합하여 쿠타이시로 쳐들어갔다. 알렉산데르 5세는 카르텔 공작 샹체 드 크사니의 지원을 쵸청하여 500명의 용병과 소규모 크사니아 군대를 받았다. 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에 맞서 많은 적의 요새를 점령하고 파괴했으며, 많은 전리품을 모았다. 이후 밍그렐리아로 진군햇지만, 레반 아바시제의 조언에 따라 조지아인들의 두려움을 사고 있는 외국 용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조치로 인해 그의 군사력은 격감되어 원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740년 9월, 그는 바르치케 왕궁에서 주라브 아바시제와 파푸나 체레텔리를 초대했다. 파푸나는 궁전에서 암살당했지만 주라브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후 모담나케 요새로 쳐들어갔지만 파푸나의 미망인과 아들이 이끄는 수비대에 패배했다.

이후 동생 기오르기 바그라티온과 레반 아바시제를 카르틀리로 보내 주라브 아바시제의 동생 바호트 아바시제를 포로로 삼았다. 테드제리에 있는 바호트 저택은 파괴되었고, 바호트는 나바라제티아에 감금되었다. 그는 아바키제 가문에 몸값으로 500개의 금고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740년 11월 27일, 이스탄불에서 돌아온 조지아 총대주교 도메티오스 4세는 그를 찾아가 바호트의 석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아할치헤의 유수프 3세 다켈리를 찾아가 바호트의 아내인 아누카 바그라티온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청했지만, 유수프가 거절하면서 무위로 끝났다. 1740년, 오티아 다디아니는 주라브 아바시제, 그리골 라차, 압하지야인들을 끌어모아 이메레티 왕국을 침공했다. 그는 이 침공에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왕실의 모든 영토를 파괴했다. 급기야 왕궁이 불타는 상황이 벌어지자 결국 탈출했다. 알렉산드레 5세가 축출된 뒤 왕위에 오른 기오르기 9세는 오티아 다디아니의 딸 므제카툰과 결혼했다

1741년 봄, 오스만 제국은 피리아기슈빌리 장군의 지휘하의 군대를 투입해 자바케티아 만을 통해 이메레티로 침공하게 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여 샹체 드 크사니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샹체 드 크사니는 밍그렐리아로 진군하는 투르크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기세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1741년 가족들과 함께 카르틀리 왕국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하라가울리로 피신했다. 이후 그곳에서 100명의 병사와 함께 수라미로 이동한 뒤 카르틀리 총독 기비 아밀라크바리에게 망명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타마르 왕비와 자녀들이 카르틀리로 들어간 반면, 그는 하라가울리의 숲에 있는 처헤리에서 동생 마무카, 레반 아비카제, 게데반 데 바리, 바호트 아바키제를 인질로 삼고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얼마 후, 카르틀리 왕국의 종주국인 아프샤르 왕조의 군주 나디르 샤가 그를 본국으로 이송했다.

알렉산드레 5세는 트빌리시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군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그의 동지인 크사니 공작 상체 크사니가 아체라 계곡에 자리를 잡고 반 페르시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는 나디르 샤를 접견하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마무카, 레반 아바시제, 그 외에 다른 이메레티 귀족들은 이메레티로 돌아갔다. 그는 나중에 반란에 관련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1741년 말, 나디르 샤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트란스 캅카스로 이동했다. 그는 유수프 3세 파샤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레 5세의 이메레티 왕위 복위를 요구했다. 이에 유수프 3세는 이스탄불에 어찌할 지 물었고, 나디르 샤와 전쟁을 벌이기 싫었던 오스만 제국 측은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유수프 3세는 곧바로 일부 병력을 보내 알렉산드레 5세를 호위하여 아흘치헤로 데려간 뒤, 1742년 가을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기오르기 9세를 몰아내고 알렉산드레 5세를 복위시켰다.

1743년 알렉산드레 5세의 계모이자 기오르기 9세의 어머니인 타마르 구리엘리가 구리아의 공주이자 이메레티의 여왕, 유수프 파샤의 후원자로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으자, 사치노 바라타치빌리가 위협을 느껴 타마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에 복수하기로 마음먹은 알렉산드레 5세는 타마르를 죽인 귀족들의 영지를 침략해 각지를 파괴했고, 사치노의 추종자들 중 몇 명을 노예로 팔았고, 오티아 다디아니와 그리고르 드 라차는 군대를 모아 이에 대적했다. 그는 반란군을 대적하기 위해 아할치헤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아할치헤 파샤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리골 드 라차는 추격 도중 피살되었고, 뒤이어 라차 공작이 된 바크탕은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또한 그는 밍그렐리아 공작 다디아니에게 항복과 복종을 강요받았다.

1744년, 레반 아바시제는 말차바리아니 공작에게 스베리 성치를 빼앗겼다. 알렉산드레 5세는 이를 중재해 더 이상의 유혈충돌을 금지했다. 그해 말, 레반은 사촌 자알 아바시제를 크로차에서 포위 공격핬고, 자알은 이메레티를 떠나 카르틀리로 떠났다. 1745년 그는 레반 아바시제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낀 끝에 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그가 나디르 샤와 손을 잡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동생 마무카를 새 왕으로 세우려 했다. 1746년, 마무카는 자신을 이메레티 왕으로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밍그렐리아로 피신해 이전의 적이었던 오티아 다디아니의 보호를 받았고, 카르틀리 왕 테이무아즈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이무아즈 2세는 나디르 샤로부터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승인을 받은 뒤 1748년 이메레티로 진군했으나 오스만 제국군이 보급을 끊자 많은 병사가 굶어죽고 여러 지휘관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지원 대상을 마무카에서 그에게 돌렸고, 이 덕분에 그는 마무카를 물리치고 왕위에 복귀했다.

이후 수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750년 압하지야의 대주교 베사리온의 중재하에 카이호스로 체레텔리 공작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752년 초 카쿨리의 성모 이콘을 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후 중병에 걸렸고, 1752년 3월 사순절 기간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이를 신의 저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3.9. 솔로몬 1세

알렉산드레 5세 사후 왕위에 오른 솔로몬 1세는 즉위 직후 라차 공국의 로스톰 1세가 마무카를 앞세워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고, 아할치헤에 1년간 피신했다가 오스만 제국의 지원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밍그렐리아 공국의 오티아 다디아니 공작과 결혼동맹을 맺고 대귀족들에 대항하여 하층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 또한 수백년간 수많은 이메레티인들을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악습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에 노예 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그에게 반감을 품고 1757년 레반 아바시제를 앞세워 이메레티로 진격했다. 레반 아바시제는 라차의 로스톰 1세와 동맹을 맺고 쿠타이시로 진격했다.

그는 이에 맞서 포티, 구리아, 아할치헤에서 오는 모든 산길을 차단해 투르크군이 증원을 받을 수 없게 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 작전에 착수한 그는 1757년 12월 14일 크레실리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아할치헤의 파샤는 자기 손으로 처단했다. 레반 아바시제도 전사했으며, 레반의 아들 기드온은 생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1758년 카르틀리 왕국테이무라즈 2세, 카헤티 왕국헤라클리오스 2세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1759년 12월 동생 요시프를 압하지야의 대주교로 세우고 서부 조지아 정교회의 개혁을 후원했다.

1760년에서 1763년 사이에 오스만군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조리 격퇴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1766년 아할치헤의 파샤 하지 메흐메트에게 대군을 맡겨 이메레티를 침략하게 했다. 라차의 로스톰 1세와 동맹을 맺은 투르크군은 밍그렐리아와 구리아 공작들의 지원을 받은 그를 격파하고 사촌 테이무라즈를 왕위에 세우고 노예 무역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는 산악지대로 피신한 뒤 이메레티 인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병력을 재건한 후 유격전을 벌였다. 투르크군은 적의 습격에 시달리다가 1767년 그와 평화협정을 맺고 이메레티에서 물러났다. 이후 테이무라즈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 그는 1768년 츠흐랏스카로 전투에서 승리하고 테이무라즈를 투옥한 뒤 왕위를 되찾았다. 또한 그동안 자신을 적대했던 라차 공국의 로스톰 1세를 붙잡아 실명형에 처한 뒤 라차 공국을 이메레티 왕국에 병합시켰다.

1768년, 막심 쿠텔리를 러시아 제국에 사절로 보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는 고틀롭 쿠르트 하인리히 토틀레벤이 이끄는 소규모 분견대를 조지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1769년 가을, 토틀레벤은 이메레티로 이동한 뒤 이메레티군과 연합하여 쇼라판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토틀레벤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오스만군이 이메레티의 수도 쿠타이시를 공략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러시아 정부는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수코틴 소장을 새 지휘관으로 세웠다. 이후 이메레티-러시아 연합군은 1770년 8월 초라파니, 바그다디, 쿠타이시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수코틴이 여세를 몰아 포티를 공략하려 하자, 그는 늪지대가 펼쳐진 그곳을 무리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무시당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열병에 걸렸고, 1772년경 이메레티를 떠나야 했다.

러시아군이 떠났지만, 그는 이후에도 2만 병력을 동원하여 오스만 제국에 항전했다.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은 고리 공작을 격파했으며, 1774년 1월 아할치헤의 투르크군 4,000명을 치헤리멜라 강 협곡으로 유인해 섬멸시키기도 했다. 그 후 1774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큐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오스만 제국은 이메레티 왕국으로부터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고, 러시아는 이메레티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진 그는 왕권을 드높이고 각지의 통제권을 확장하며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1778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레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친선 관계를 맺고 세력도 강해지는 이메레티 왕국을 경계했다. 1779년 오스만 제국이 후원한 압하지야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 이에 1780년 오스만군이 이메레티 왕국을 공격했으나 루키 전투에서 패배했다. 1781년 구리아를 놓고 양측이 맞붙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그러던 1784년 3월 숨을 거두었고 겔라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이메레티를 오랫동안 지배하며 갖은 수탈과 노예 무역을 일삼았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연이어 승리한 공으로 조지아인들에게 대왕(დიდი) 칭호를 받았으며, 2016년 12월 22일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축일을 4월 23일로 정했다.

2.3.10. 망국

솔로몬 1세는 본래 아들 알렉산드레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1778년 알렉산드레가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면서 후계자가 없게 되자 1783년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의 군주 헤라클리오스 2세의 외손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다비트를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헤라클리오스 2세의 궁정에 있던 다비트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던 다비트 게오르기예비치[2]가 1784년 5월 4일 밍그렐리아 공작 카지아 2세 다디아니 등 일부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다비트 2세로서 이메레티 왕위에 올랐다. 다비트 2세는 즉위 후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대귀족의 특권을 제한하려 했다. 이에 많은 이메레티 귀족들이 반감을 품었다.

1789년, 헤라클리오스 2세는 손자 다비트를 왕좌에 앉히기 위해 이메레티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1789년 6월 10일 맛호지 전투에서 이메레티 귀족들의 배신으로 패배한 다비트 2세는 왕위를 잃고 아할치헤로 도피했다. 다비트 아르칠로비치는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입성한 뒤 솔로몬 1세의 후계자라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솔로몬 2세를 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1790년, 다비트 2세는 솔로몬 2세를 무찌르기 위해 투르크군과 함께 이메리티로 진군했다. 한때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하고 이메레티 왕위에 복귀했으나, 1791년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솔로몬 2세에게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이후 헤라클리오스 2세의 중재를 통해 솔로몬 2세와 화해하고 이메레티로 귀환하여 많은 영지를 받았다. 하지만 왕위에 복귀할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던 다비트 2세는 1792년 다케스탄에서 용병을 고용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패배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뒤 1795년 아할치헤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경쟁자를 꺾고 이메레티의 유일한 군주가 된 솔로몬 2세는 헤라클리오스 2세의 지원에 의존하여 나라를 통치했으며, 솔로몬 1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지역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했다. 1795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카자르 왕조와 전쟁을 벌일 때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참전해 크르차니시 전투에서 보조군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798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사망하고 1801년 카헤티-카르틀리 연합 왕국이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면서, 그의 입지는 대단히 위태로워졌다. 밍그렐리아 공국은 대세를 읽고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지만, 그는 러시아에 맞서기로 하고 오스만 제국과 카자르 왕조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그를 위해 러시아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1804년 5월 2일, 러시아군 사령관 파벨 치치아노프가 군대를 이끌고 이메레티로 진군해 이메레티 왕국이 러시아 보호령으로 귀속되는 걸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엘라스나우르 조약에 서명하여 러시아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렸다. 1809년 친척들이 조지아 동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지원했다가 구금되어 트빌리시에 수감되었다. 1810년 3월 4일, 러시아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이메레티 왕국을 러시아의 영토로 병합했다. 그는 아할치헤를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 달아났다.

1810년 9월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는 조지아인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가담했고 오스만 제국, 카자르 왕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에 원조를 호소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구원은 오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봉기를 진압하자 트라페준타로 도주했다가 1815년 2월 19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이메레티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3.1. 서부 조지아 왕국(1259~1330년)

3.2. 1차 이메레티 왕국(1387~1401년)

3.3. 2차 이메레티 왕국(1484~1810년)



[1] 프랑스 귀족으로, 오스만 제국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공격해주는 대가로 코카서스 일대에 대한 오스만군의 공격을 도우라는 프랑수아 1세의 지시를 받았다.[2] 기오르기 9세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