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칸국 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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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년 10월 15일 ~ 1265년 2월 8일
재위기간 1256년~1265년
1. 개요
몽골 제국의 보르지긴씨 황족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를 제외한 서남아시아를 휩쓴 정복자이자, 일 칸국의 초대 칸이었다.2. 생애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와 그의 아내인 소르각타니 베키[2]의 3남이었으며, 형제로는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 아리크부카가 있었다. 훌라구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나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던 모후 소르각타니 베키와 아내인 도구즈 카툰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제법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고, 기독교에 대한 일 칸국 통치자들의 우호적인 태도는 일 칸국이 이슬람교로 개종할 때까지 이어졌다.이후 제3대 대칸이었던 귀위크 칸 사후 발발한 칸위 계승 분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된 친형 몽케에 의해[3] 서아시아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훌라구는 서아시아로 나아가 1256년에 하사신의 근거지인 알라무트를 쓸어버리고, 마침내 1258년 2월 수니파의 종주국인 아바스 칼리파조의 수도 바그다드로 진격해 들어갔다.
바그다드를 포위한 훌라구는 칼리파 알 무스타심(1213년~1258년)에게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라며 무조건적인 항복을 강요했으나, 알 무스타심은 라고 코웃음치며 단호하게 항복을 거부했다. 결국 바그다드 역시 몽골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4]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알 무스타심 본인도 양탄자에 말린 채 말발굽에 짓밟혀 끔살당하고 말았다(...).[5][6]
당대 세계 인류 지식의 중심점이었던 바그다드 도서관(House of Wisdom) 역시 몽골군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당시 이곳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에서 모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화학, 의학, 철학 등 세계에서 제일 많은 숫자의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회자될 만큼 아랍 문명의 눈부신 황금기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바그다드 함락 이후 티그리스강은 물속에 던져진 책들의 잉크와 학살된 과학자 및 철학자들의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참사 이후로 중동 문명은 몽골 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면서 끝끝내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했고 쇠퇴 일로를 걸었으며, 이후의 유럽에게 인류 문명 발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바그다드 정복에 성공하며 제대로 기세를 탄 훌라구의 몽골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나아갔고, 이에 십자군 국가들과의 연계까지 시도했으나[7] 본국에서 형 몽케 칸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총사령관 훌라구는 차기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부관인 키트부카(?~1260년)[8]에게 선발대의 지휘를 맡긴 뒤, 소수 병력만을 거느린 채 혼자 맘루크를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곧장 떠나버렸다.[9] 그러나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은 맘루크를 너무 얕잡아본 나머지 돌격을 감행하며 맘루크군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는데 맘루크 왕조도 초반에는 거의 전멸당하면서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다. 비록 소수 병력이긴 해도 그 상대는 당대 최강의 군대라 불리던 몽골군이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총동원령을 내려 국가의 모든 병력을 있는대로 전부 끌어모았고, 심지어 최고 통치자인 쿠투즈까지 나서서 온 힘을 다해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저항한 끝에 결국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군의 맘루크 정복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훌라구는 킵차크 칸국이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공격하려 했을 때 쿠빌라이 칸과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서아시아 영토에 거대 제국인 일 칸국을 세웠다. 그 뒤 1265년에 붕어했고, 그의 아들인 아바카 칸이 일 칸국을 이어 받았다.
사후에 훌라구 칸의 유해는 이란의 우르미아 호 근처에 묻혔고 그곳에 영묘가 지어졌다.
재미있게도 시리아에서 로마(비잔티움) 시대가 끝난 지 한참 지난 13세기의 시리아 기독교 측에서 남긴 기록에 훌라구를 '새로운 콘스탄티누스'로 묘사한 문장이 있다고 한다.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는 등 이슬람 세계를 크게 약화시켜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권 한복판에서 박해받던 처지를 끝냈기 때문에[10](훌라구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마치 옛날 로마 제국이 이교(그리스 로마 전통종교) 시절이었을 때 기독교가 박해를 받다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나타나 종교의 자유를 주어 박해를 끝낸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11]
참고자료
3. 창작물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The Old Gods DLC가 있을 경우, 연도 설정& 추천 캐릭터 목록에서 선택하여 플레이할 수 있으며, 주어진 대군[13]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반을 다지면 무난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종교는 텡그리로 설정되어 있다.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에서 암살단의 본거지인 마시아프를 습격해 멸망시키는 역할로, 소설판에서 구체적인 행적이 나온다. 마차 바퀴를 세워 사람들 머리 옆을 지나가게 해서 올라오는 자는 죽이고, 아이와 자기편으로 될 수 있는 사람만 살려두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실제 역사에서도 알라무트를 멸망시켰는데, 본작에선 이 다음에 바그다드, 마시아프 순으로 침공한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에서는 주인공이 실제 역사에서처럼 남북동맹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동맹을 택하면서 아군이 되었다. 주인공이 바이바르스와 대치 중일 때 서한을 받고 쉴레이만을 토벌함은 물론 아인 잘루트 전투의 설욕을 위해 소 아르메니아 왕국까지 끌어들여 바이바르스가 있는 쪽으로 달려온다. 전투 자체로는 사소한 충돌 몇번만 하고 끝났지만 그래도 복수의 기회를 준 주인공에게 감사의 서한을 전달한다.
[1] 훌레구가 비교적 진짜 몽골어 원어 발음에 가까우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훌라구로 표기한다. 일 칸국이 되기 이전의 영토를 훌레구 울루스라고 부르는 지역 명칭도 있다.[2] ?~1252년. 케레이트 부족의 지도자였던 옹 칸 토오릴의 동생 자하감보의 딸이었다.[3] 바투를 몽골 초원으로 소환했던 귀위크 칸이 갑자기 붕어하면서 대칸위에 공백이 발생했는데, 이때 바투의 지원을 받아 몽케가 대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4]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예상과는 달리 도우러 온 이들은 없었고, 결국 인근 요새가 함락되자 그제서야 큰일났다 싶었는지 부랴부랴 항복 교섭을 하려고 했지만 훌라구는 그냥 생깠다.[5] 당시 몽골 제국에서는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을 명예로운 처형 방식으로 여겼다.[6] 이후 아바스 칼리파조의 잔당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여 16세기까지 명목상의 칼리파 지위를 유지했다.[7] 하지만 십자군은 몽골군과 연계하여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8] 나이만족 출신의 네스토리우스교 신자였다.[9] 하지만 훌라구는 몽골이나 중국 땅으로 가지 않고,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다. 이후 툴루이 내전에서 승리한 형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를 이어 받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의 편이 되었다.[10] 참고로 일 칸국이 1290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긴 했다.(...)[1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as a result, Syriac-speaking Christians were interested in Roman history regardless whether they were living under Roman rule.' In a thirteenth-century Syriac gospel lectionary,the pagan Mongol khan Hülägü could be portrayed as a new Constantine.'[12] 툴루이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1에서 아들의 이름을 '투루이'로 짓거나, PK에서 1192년에 맞춰 칭기즈 칸이 보르테에게서 아들을 낳으면 보르테가 알아서 이름을 툴루이로 붙인다. 쿠빌라이 칸의 경우 이름을 쿠빌라이로 지으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13] 보급 한계도 무시하는 120,000명 가량의 대규모 병력을 잘 활용하면 전 유럽을 갈아엎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북방에 똑같은 걸 가진 영혼의 맞수가 있다는 게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