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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8대 군주 카헤티 왕국 13대 군주 თეიმურაზ | 테이무라즈 2세 | ||
제호 | 한국어 | 테이무라즈 2세 |
조지아어 | თეიმურაზ II | |
라틴어 | Teimuraz II | |
가족 | 헤라클리오스 1세(아버지) 아나(어머니) 다비트 2세(형) 엘레네(친누이) 케테반(친누이) 마리암(친누이) 콘스탄틴 2세(이복 형제) 케테반-베굼(이복 누이) 타마르(첫째 아내) 타마르 2세(둘째 아내) 아나 카눔(셋째 아내) 헤라클리오스 2세(장남) 솔로몬(차남) 케테반(장녀) 엘레네(차녀) 아나(삼녀) 엘리사베드(사녀) | |
생몰 년도 | 1680년 ~ 1762년 1월 8일 | |
재위 기간 | 1732년 ~ 1744년(카헤티 국왕) 1744년 ~ 1762년(카르틀리 국왕)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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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18대 군주, 카헤티 왕국 13대 군주.2. 생애
카헤티 왕국 10대 군주 헤라클리오스 1세와 셰르마잔 촐로카슈빌리 공작의 딸 아나의 차남이다. 형으로 다비트 2세가 있었고, 친누이로 엘레네, 케테반, 마리암이 있었다. 또한 이복형제로 콘스탄틴 2세가 있었고, 이복 누이로 케테반-베굼이 있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고 조지아 정교회를 고수했다. 1709년 카헤티 왕위에 오른 형 다비트 2세가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으로 불려간 뒤, 어머니 안나와 함께 5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나 다케스탄 산악민족의 침략과 농민 반란에 시달렸다.1722년 다비트 2세가 마가로 별궁에서 사망한 뒤 이복 형제 콘스탄틴 2세와 함께 카헤티 왕위를 주장했다. 일부 귀족들은 그를 지지했고, 다른 귀족들은 콘스탄틴 2세를 지지했다. 그는 다케스탄 산악민족들을 상대로 원정을 떠나 승리를 거두는 등 통치 행위를 수행했으나, 사파비 제국의 샤한샤 술탄 호세인은 콘스탄틴 2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세웠다. 그는 샤한샤의 명을 받아들였고, 콘스탄틴 2세가 카르틀리 왕 바크탕 6세와 대립할 때 콘스탄틴 2세의 충실한 조언자로 활동했다. 그는 바크탕 6세와 평화를 논의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협상이 결렬된 후에는 별동대를 이끌고 카르틀리군에 맞섰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이 동부 조지아를 침공하자, 콘스탄틴 2세와 바크탕 6세는 서로 화해하고 힘을 합쳐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기로 했다. 이때 그는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1732년 12월, 콘스탄틴 2세가 오스만 제국 장성 유수프 파샤의 협상 요구를 받아들여 협상장에 갔다가 피살당했다. 그가 뒤이어 카헤티 왕을 칭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의 압력이 가해지자 프샤비로 피신했다. 그는 러시아로 망명하려 했지만 카헤티인들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여 계획을 취소했다. 1733년 트빌리시로 가서 오스만 제국의 아할치헤 총독 이사크 파샤와 만나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는 대가로 카헤티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1734년, 오스만 제국은 협약을 파기하고 카헤티 왕국을 완전 병합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무라브 아벨이 지휘하는 카헤티군은 적을 물리쳤다. 같은 해, 그는 간자에 주둔한 나디르 샤에게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나디르 샤는 대규모 병력을 그에게 보냈고, 그는 이들과 함께 다케스탄 원정에 참여하여 차라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고지대의 요새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이후 예레반에 주둔한 나디르 샤를 찾아와서 충성을 맹세하려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나디르 샤의 명령을 받들어 카헤티와 카르틀리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많은 조지아인이 학살당하거나 페르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는 감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뒤 은신하다가 나디르 샤가 철수한 후 카헤티로 돌아왔다. 얼마 후, 트빌리시의 총독인 세피 칸이 카헤티 왕으로 인정해줄 테니 힘을 합쳐 나디르 샤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세피 칸과 고리에서 협상하는 척했다가 긴급 체포한 뒤 나디르 샤에게 세피 칸을 넘겼다. 나디르 샤는 그를 아프가니스탄 원정에 데려가면서, 장남 헤라클리오스 2세와 딸 케테반을 인질로 넘기는 대가로 카헤티 국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카헤티로 돌아갔고,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인도 원정에 데려갔으며 케테반은 나디르 샤의 조카 알리 쿨리 칸과 결혼했다.
1738년 카헤티로 돌아왔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트빌리시의 이란 총독에게 있었고, 그는 총독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1739년 나디르 샤의 형제이자 아제르바이잔 총독 이브라힘 칸의 다케스탄 원정에 참여했다. 페르시아군 32,000명은 자니카 시 인근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의 습격으로 패배했고, 이브라힘 칸과 우굴루 칸이 전사했다. 다만 그의 병력은 별다른 손실 없이 카헤티로 복귀했다. 1738년 인도 원정을 마친 나디르 샤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카헤티로 돌려보냈다. 1741년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나디르 샤의 소환을 받고 달려간 그는 아르다발에서 나디르 샤에게 절한 뒤 이란군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다케스탄 원정을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차라 일대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다케스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만족한 나디르 샤는 그를 카헤티로 돌려보냈다.
한편, 나디르 샤는 카르틀리 고위 관료였던 기비 아밀라흐바리를 석방시키고 카르틀리의 최고 관료로 임명했다. 조지아로 돌아온 기비는 그에게 나디르 샤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에 기비는 트빌리시 총독에게 테이무라즈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트빌리시 총독이 다케스탄 원정에 다시 참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그는 자기가 카르틀리에서 참여하는 건 곤란하지만 총독이 카헤티로 와준다면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이에 트빌리시 총독은 그가 배신했다고 단정짓고 카헤티로 쳐들어가 사가레오 일대를 황폐화하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또한 나디르 샤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반역을 꾸몄다고 규탄했다. 당시 데르벤트에 있던 나디르 샤는 그에게 다르벤트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즉시 나디르 샤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나디르 샤는 받아주기로 했다. 대신 그의 아내 타마르를 인질로 넘기게 했다.
카헤티로 무사히 돌아온 그는 자신을 모함한 기비를 공격하여 크사니 일대를 탈취했고, 1743년 아라그비 주민들이 그곳의 총독 베잔을 죽이고 귀순하는 걸 받아들였다. 1744년 아할치헤의 유수프 파샤가 15,000명의 오스만군을 이끌고 동부 조지아를 침공하자, 트빌리시 총독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고리에서 트빌리시 총독과 합세한 뒤 오스만군에 대항했으나 패배했다. 유수프 파샤는 고리에 틀어박힌 적을 포위하고 군대 일부를 다케스탄의 고지대로 보냈다. 적군이 분산된 걸 알게 된 그는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그들을 요격하라고 지시했고, 헤라클리오스 2세는 아라그비 강둑에서 다케스탄으로 이동 중이던 오스만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물자를 탈취했다. 뒤늦게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유수프 파샤는 고리 포위를 해제하고 아할치헤로 퇴각했다.
1744년, 나디르 샤는 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세우고 헤라클리오스 2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선임했다. 1745년, 테이무라즈는 수라미 요새에 숨어있는 기비를 이란군과 함께 포위 공격했다. 기비는 곧 체포된 뒤 나디르 샤 궁정으로 보내진 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1747년, 나디르 샤는 카르틀리와 카헤티에 막대한 공물을 부과했다. 그는 이란으로 가서 나디르 샤에게 엎드려 절한 뒤 공물이 너무 많으니 줄여달라고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가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이란 전역에서 후임 샤한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내전에 뛰어든 인물 중 한 명인 알리 쿨리 칸은 테이무라즈의 딸인 케타반과 결혼했다. 쿨리 칸은 장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막대한 공물을 폐지하기로 했다.
그 후 2년간 이란에 머물던 그는 거듭된 내란으로 혼란에 빠진 이란의 상황을 지켜보다가 1749년 가을 조지아로 돌아왔다. 이후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이란으로부터 독립하기로 했다. 아스트라바드, 마잔다란, 길란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이란 사령관 무하마드 하산 칸 카자르가 이란으로부터 독립하려 드는 예레반 칸국을 포위 공격하자, 그는 예레반 주민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어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예레반으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오스 2세가 선봉에 서서 무하마드 하산 칸을 격파했고, 무하마드는 코르투라프 요새로 도주했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요새를 곧 함락시킨 뒤 무하마드를 아버지에게 바쳤다. 그는 무하마드를 정중하게 대접하고 풀어준 뒤, 예레반 칸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삼고 공물을 부과했다.
얼마 후, 카라바흐 칸 파나흐 알리칸 자반시르가 간자를 포위했다. 간자 주민들이 원군을 요청하자, 이번에도 응했다. 조지아군이 접근해오자, 카라바흐 칸은 포위를 해제하고 후퇴했다. 그는 이들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간자 역시 속국으로 삼았다. 뒤이어 셰키 칸 하지 첼레비와 동맹을 맺고 조지아 일대를 수없이 습격한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을 향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셰키 칸은 도중에 다케스탄인과 연합하여 조지아군을 격파했다. 1751년,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군 사령관 아자트 샤가 예레반을 포위 공격했다. 이번에도 예레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그는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에게 소규모 병력을 맡겼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키르불라키 인근에서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던 아자트 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쫓아냈다.
1752년, 간자 칸 샤하베르드는 더 이상 그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했다. 이에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함께 간자로 진군했다. 샤하베르드는 셰키 칸, 다케스탄 산악 부족들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그와 헤라클리오스 2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패퇴하여 조지아로 돌아갔다. 셰키 칸은 조지아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계획하고, 아들 아가 키시 벡에게 다케스탄인, 쉬르반인, 다르벤트인, 간자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맡겨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고자 헤라클리오스 2세와 연합하여 트빌리시 외곽에서 맞붙었다. 이번에는 조지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아가 키시 벡은 50마일 동안 추격한 적군을 가까스로 회피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1754년, 아바르 칸 무함마드 누살 4세가 조지아를 침공해 므차디바리 요새를 포위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출진해 적군을 무찔렀다. 이듬해(1755년) 헤라클리오스 2세가 크바렐리 전투에서 다케스탄 산악민족을 제압하면서, 다케스탄인들은 마침내 조지아 침략을 단념했다. 한편, 조지아 영토를 배회하던 투르코만인들이 아르메니아로 이주했다. 그는 헤라클리오스 2세를 예레반 칸국으로 파견했고, 헤라클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에 이주한 투르코만인들이 이전 목초지로 돌아가도록 강요하고 투르코만인들에게 이주를 허용한 예레반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얼마 후, 셰키 칸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 걸 두려워한 간자, 카라바흐, 예레반, 카라다그, 나히체반 칸들이 헤라클리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셰키 칸을 도모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간자 근처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지아군이 습격하여 5명의 칸을 체포했다. 셰키 칸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무슬림 칸들을 무단으로 잡은 이교도를 응징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헤라클리오스를 추격해 악스타파차이 강 인근에서 격파하고 5명의 칸을 구출했다. 뒤이어 조지아를 침공해 카라바흐와 보르찰라 지역을 점령하고 아가 키시 벡을 그곳에 남겨뒀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일단 후퇴했다가 병사들을 끌어모아 반격에 나섰고, 카라바흐인 2,000명이 가세한 것에 힘입어 아가 키시 벡을 셰키로 몰아냈다.
1758년, 테이무라즈 2세, 헤라클리오스 2세, 이메레티 왕국의 솔로몬 1세는 공동 방위 동맹을 맺었다. 1759년 아할치헤의 오스만군과 다케스탄 산악민족 연합군이 조지아를 동시에 침공했다. 오스만군이 아토시와 아브네티 요새를 포위하자, 테이무라즈 2세와 솔로몬 1세가 군대를 통합한 뒤 아토시 요새를 포위한 투르크군을 격파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아브네티 요새를 포위하던 오스만군은 아군의 패전 소식에 아할치헤로 후퇴했다. 1760년 테이무라즈 2세는 이란 북부와 아제르바이잔을 장악한 아자트 샤에 맞서 러시아 제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러시아로 친히 찾아갔다. 그는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당시 러시아군은 7년 전쟁을 한창 치르던 중이어서 조지아를 돕기 위한 군사 행동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계속 머물다가 1762년 1월 8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아스트라한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 있는 장인 바크탕 6세의 옆에 안장되었다. 그 후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가 카르틀리-카헤티 연합 왕국의 초대 군주로 등극했다. 조지아인들은 그의 유해를 조국으로 이장하길 희망해 러시아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현재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세 번 결혼했다. 아라그비 공작 바두르의 딸 타마르와 결혼했지만 1711년 이혼했고, 1712년 2월 2일 카르틀리 왕 바크탕 6세의 딸 타마르 2세와 재혼했다. 타마르 2세는 남편이 나디르 샤의 소환 명령을 받고 나라를 떠나 있는 동안 대신 나라를 현명하게 통치해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두 사람은 아들 헤라클리오스 2세와 세 딸 케테반, 엘레네, 아나를 두었다. 1746년 4월 12일 타마르 2세가 사망한 후, 그는 같은 해 8월 19일 베얀 팔라반호슈빌리-바라타슈빌리 공작의 딸이자 카이호스로 치치시빌리의 전 부인인 아나 카눔과 결혼하여 아들 솔로몬과 딸 엘리자베드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