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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메레티 왕국 8대 군주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 알렉산드레 3세 | ||
제호 | 한국어 | 알렉산드레 3세 |
조지아어 | 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 |
라틴어 | Alexander III | |
가족 | 기오르기 3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로스톰(동생) 마무카(동생) 스비메온 제나텔리(동생) 흐바람제(누이) 타마르(첫번째 아내) 네스탄 다레얀(두번째 아내) 바그라트 5세(장남) 클리멘티(차남) 티나틴(딸) | |
생몰 년도 | 1609년 ~ 1660년 | |
재위 기간 | 1639년 ~ 16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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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이메레티 왕국 8대 군주.2. 생애
2차 이메레티 왕국 7대 군주 기오르기 3세와 타마르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로스톰, 마무카, 스비메온 제나텔리가 있었고, 누이로 흐바람제가 있었다. 1639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그는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 2세를 적대했다. 레반 2세는 이메레티 왕국 백성들을 납치해서 오스만 제국으로 팔아넘기기 일쑤였고, 기오르기 3세를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고 한 번은 포로로 잡아서 그로부터 막대한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든 레반 2세를 물리치려 애썼지만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1647년 동생 마무카에게 군대를 맡겨 레반 2세를 치게 했으나 오히려 패했고, 마무카는 사로잡힌 뒤 실명형에 처해진 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654년 살해당했다. 한편, 그의 장인인 테이무라즈 1세는 1648년 사파비 왕조의 침략을 피해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했다. 그는 사파비 왕조에 장인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듯 이메레티 왕국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자, 러시아 제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청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1651년 사절단을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 보냈다. 그는 사절 앞에서 자신을 러시아의 신민으로 표명하며 충성 서약을 맺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당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북방전쟁을 치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메레티 왕국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1658년 레반 2세가 사망하자, 그는 레반 2세가 후계자로 지목한 바메크 1세 대신해 리파리트 3세를 공작에 앉히는 데 성공하고 밍그렐리아를 봉신으로 삼았다. 1660년 구리아 공작 카이호스로프가 사망하자, 역시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구리엘리 대신에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으로 삼고 역시 봉신으로 삼았다. 이렇게 이레메티 왕국의 권위를 회복하는 듯했으나, 얼마 후인 1660년 3월 1일 또는 4일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1618년 구리아 공작 마미아 2세의 딸 타마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1620년 아내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고 강제 이혼해 친정으로 보냈다. 1629년 카헤티 군주 테이무아즈 1세의 딸인 네스탄 다레얀과 재혼했다. 그는 첫번째 아내 타마르에게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첫째 아들 바그라트 5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둘째 아들 클리멘티는 1651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딸 티나틴은 이메레티 귀족 라사-기오르기 고샤제와 결혼했다가 밍글렐리아 공작 레반 3세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