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000>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Цесаревич 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 |
이름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 |
출생 | 1690년 2월 28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프레오브라젠스코예 |
사망 | 1718년 7월 7일 (향년 28세) 루스 차르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배우자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 (1711년 결혼 / 1715년 사망) |
자녀 | 나탈리야, 표트르 2세 |
아버지 | 표트르 1세 |
어머니 |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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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트르 1세의 아들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다. 역모 사건에 휘말려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여러모로 사도세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2. 생애
2.1. 초기
알렉세이는 1690년, 표트르와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를 박대하는 걸 보았고[1], 거기다 1698년에는 예브도키야를 수녀원에 집어넣는 걸 보았다. 당연히 알렉세이는 자신의 아버지 표트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트르는 자신의 황태자를 자신을 닮게 키우고 싶었다. 그는 아들이 자신의 서구화 개혁을 이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러시아인 가정교사를 해임하고, 독일인 가정교사를 임명해 알렉세이에게 지리, 역사 등을 가르치게 했다.표트르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13살이 되던 1703년 표트르는 아들에게 포병으로 대북방전쟁에 종군하게 했다. 나르바 요새가 함락될 때 알렉세이는 그 현장에 있었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전쟁과는 영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신학과 교회학에 빠져들었다. 교회에 냉소적이던 차르로서는 열불이 뻗칠 일이었다. 당연히 부자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거기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구 세력들의 중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알렉세이의 중심에는 어머니처럼 표트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표트르가 빨리 죽어주고 알렉세이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표트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일단 아들에게 아직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변화시켜보려고 했다. 1708년에 표트르는 알렉세이에게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군대와 군량을 모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709년 표트르는 자신의 아들을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했다.
2.2. 결혼 문제
아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샤를로테 크리스티네 |
서구식 교육을 받은 알렉세이가 돌아오자 표트르는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는 외국 여성을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했고 결국 알렉세이의 아내는 유서 깊은 벨프 가문 출신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의 딸 샤를로테 크리스티네로 결정됐다. 알렉세이는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결국 작센 선제후국인 토르가우에서 1711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조건은 샤를로테 크리스티네의 루터교 신앙은 그대로 유지하되 자식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믿도록 키운다는 정도였다. 샤를로테 크리스티네는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이후 최초로 러시아 황가에 시집 온 외국 여인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부부관계는 원만했다. 하지만 이 원만한 관계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1714년, 알렉세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핀란드에서 붙잡혀 온 14살 소녀 예프로시니야란 소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알렉세이의 정부가 되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715년 샤를로테는 표트르라 불릴 아들을 낳고 9일 후 산욕열로 죽었다. 표트르는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슬퍼했다고 한다. 정작 알렉세이는 그 때 보헤미아 왕국의 카를스바트[2]에서 정부인 예프로시니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샤를로테와 알렉세이는 1남 1녀를 두었다. 샤를로테의 죽음 이후 부자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표트르는
2.3. 최후
그러던 중 1716년 표트르는 대북방전쟁과 관련해 서유럽의 협조를 얻어보려고 다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 국가 등을 방문했다. 그러던 와중인 1716년 8월 26일 알렉세이 황태자는 멘시코프 등에게서 돈을 좀 빌린 후 예프로시니아 및 소수 인원들만 데리고 러시아를 탈출, 폴란드 귀족 코한스키를 칭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으로 도망쳤다.그러다 곧 그는 빈에서 나폴리의 성 엘모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거기서 샤를로테의 언니[3]와 결혼한 자신의 동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의 보호를 받았다. 카를 6세는 표트르가 알렉세이를 암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고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 국왕 조지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자 표트르는 자신의 측근인 표트르 톨스토이 백작[4]을 보내 알렉세이를 고국으로 돌아오게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톨스토이 백작은 알렉세이를 설득했고, 결국 알렉세이를 처벌하지 않고 예프로시니아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전제하에서 귀국했다. 다만 예프로시니아는 당시 임신한 데다가 같이 온 남자 형제가 앓아누워 빈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1718년 1월 알렉세이가 돌아오고 나서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알렉세이는 구금되었고, 반역혐의로 체포되었다. 알렉세이의 도주를 도운 사람들이나 표트르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 예브도키야의 정부까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고문은 평등하게 적용되어 알렉세이도 예외없이 고문당했다.
거기다 4월경 예프로시니아가 귀국하자 그녀 역시 구금되었다. 당시 그녀는 알렉세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와 함께 왔는데 그 아이는 강제로 어머니 품에서 떨어지게 된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 예프로시니아는 그 뒤 반강제로 고문도구들을 보게 됐는데 그것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알렉세이가 아버지가 한 모든 것들을 원상복귀시키려 했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자백했다.
한편 알렉세이는 이 말을 듣고 자포자기 한 건지, 아니면 계속된 고문을 버티지 못한 건지 결국 자신이 반란 음모 등을 꾸몄다고 자백했다. 원로원은 그 말을 듣고 알렉세이에게 6월 경 사형을 선고했고 표트르의 최종 서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안 그래도 고문으로 약해져 있던 알렉세이는 19일에 25대의 채찍질을 당했고, 5일 후 15대를 더 맞았다. 이런 계속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쇠약해진 것인지, 혹은 고문 와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몰라도 알렉세이 황태자는 6월 26일 사망했다. 유해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일설에 의하면 알렉세이가 죽는 순간 표트르는 아들과 화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표트르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이 설에 의하면 이후 표트르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 갔다고 한다.
- 알렉세이의 사후 로마노프 왕조는 훗날 니콜라이 2세가 외아들의 이름으로 짓기 전까지 절대로 황태자의 이름을 알렉세이라고 짓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니콜라이의 아들 역시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 알렉세이의 동서로서 그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던 카를 6세는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이후로는 다른 나라의 왕족이 생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여러모로 힘썼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왕세자 시절 외가인 영국으로 도망치려다가 발각되어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에서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들며 사형을 막아 프리드리히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도 카를 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