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알버트 호프만 Albert Hofmann | |
출생 | 1906년 1월 11일 |
바덴 | |
사망 | 2008년 4월 29일 (향년 102세) |
바젤[1] | |
국적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과학자, 작가 |
학력 | 취리히 대학교 (화학 / 박사) |
부모 | 아버지 아돌프 호프만 어머니 엘리자벳 |
배우자 | 아니타 호프만 (? ~ 2007년, 사별) |
자녀 | 4명 |
종교 | 무종교(유신론)[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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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초로 LSD를 합성, 섭취한 인물로 알려진 스위스의 과학자이다.2. 생애
그는 1906년 아버지 아돌프 호프만과 어머니 엘리자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입이 적었기 때문에 대부가 알버트의 학비를 대줬다고 한다. 20살 때 취리히 대학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했으며 주요 관심사는 식물과 동물에서 나오는 물질로 후에 동물물질 키틴(Chitin)의 화학구조에 대한 연구를 했다. 이후 이것을 토대로 1930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졸업 후 바젤에 위치한 산도스 제약회사의 화학 부서에 취직해 조단 제이크 교수와 함께 일을 했다. 이 산도스 제약회사는 호밀에 기생하는 맥각균이라고 불리는 곰팡이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약용식물의 활성성분을 정제하고 합성해 신약을 개발하고자 연구했다. 1930년대에 뉴욕에 위치한 록펠러 연구소 연구원들이 맥각 화합물로부터 리세르그산을 분리했는데 이 연구가 호프만이 하는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리세르그산으로부터 다른 화합물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호프만은 혈압을 강하시키거나 노인의 뇌기능을 개선하는 약을 포함한 몇 가지 의약품을 개발해냈다.
1938년 호프만은 리세르그산 유도체에서 25번째로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또는 LSD-25를 합성했다. 합성의 주요 목적은 리세르그산에 디에틸아마이드를 도입하여 자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호흡 및 혈액촉진제를 얻으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 결과는 원하는 결과를 보이지 못해 연구를 중단했다. 5년을 방치하고 난 후 1943년 4월 16일 호프만은 LSD-25의 잠재력을 충분히 탐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실험하기 위해 LSD-25를 다시 합성한다. 이때 그의 손가락 끝에 아주 미세한 양의 LSD가 묻었는데 우연히 이를 먹게 되었고 기분이 이상해지고 약간의 어지럼증까지 느껴져 일을 중단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집에서 계속해서 술이나 마약에 취한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되었고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듯한 강렬한 환각을 체험하게 된다. 의식이 혼미해지고 갑자기 엄청난 공포를 느껴 아내한테 의사를 부르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호프만의 요청에 의해 온 의사는 호프만의 혈압,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상이고 동공이 팽창된 것 외에 이상증상이 없다고 했다. 이후 공포가 희열로 바뀌고 아름다운 모양과 강렬한 색채가 눈앞에 펼쳐졌다고 한다.
다음날 산도즈 제약회사 동료들에게 LSD를 투여하고 겪은 경험을 말했고 이에 흥미를 느낀 동료들도 똑같이 LSD를 투여해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은 양의 투여로 이렇게 강렬한 효과를 보이는 약은 알려진 적이 없었다고. 이후 동물에게 실험한 후 특허를 내고 Delysid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다. 참고로 이때 정신요법의 용도로 사용하도록 25µg의 용량으로 팔았다.
1960년에 이르러 과학이나 의학 관련 학술지에 LSD의 다양한 용도에 대해 수많은 논문이 출판되어 정신의학계에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4만명의 환자에게 치료 목적으로 처방되기도 했고 여러 병의 치료제로서 각광받았다. 심지어 알코올 중독 치료에도 쓰이고 암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처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다복용으로 심각한 감정변화, 시간과 공간의 왜곡, 충동적인 행동 유발 등 위험한 증상도 많이 보고되기도 했다.
1963년 산도즈의 LSD 특허가 만료되었고 그해 미국의 식약관리청은 LSD를 오직 의학/과학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시험용 신약으로 분류하고 1966년 산도즈는 LSD 제조를 중단했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히피문화가 유행하던 때라 과다복용이나 마약으로서의 이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참고로 호프만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꾸준히 LSD를 복용했고 이에 대해 옹호하기도 했다. 심지어 향년 102세로 장수하기도 했다.
3. 기타
- 100건이 넘는 과학 논문과 수많은 저서를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79년 출판한 자서전 'LSD: My Problem Child'가 있다.
[1] "'LSD의 아버지' 앨버트 호프만 별세", 「영남일보」, 2008.5.1.[2] John Horgan, "Doubts about psychedelics from Albert Hofmann, LSD's discoverer", 「Scientific American」, 2010.9.24.[3] 정확히는 눈만 가린 사진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