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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9:15:42

애마부인 시리즈

愛麻夫人 시리즈

1. 개요2. 작품 목록3. 특징4. 역대 애마부인5. 여담

1. 개요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의 시발점이 된 영화. 1982년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인기를 끈 작품이다.

2. 작품 목록

애마부인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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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 시리즈 1편부터 12편까지는 연방영화사 제작으로 제작자나 스태프, 등장인물과 설정 등이 공통된다. 13편은 극장용이 아닌 비디오용이고 제작사도 다르나 김성수 감독은 9편을 연출한 감독이었고 편집자 조기형은 6편 ~ 10편의 편집을 맡았었다. 그리고 표지의 글씨체도 기존 시리즈의 글씨체를 그대로 썼다. 따라서 13편까지가 시리즈이고, 이외에 애마 또는 애마부인이 제목에 들어간 다른 작품들은 제목만 차용했을 뿐 이 시리즈와는 연관성이 없다.

기타 '애마'가 제목에 들어간 작품들

3. 특징

이 영화와 라이벌 관계였던 산딸기 시리즈도 있었는데 김수형 감독 작품으로 1편은 1982년 애마부인 1편과 주연 배우가 같은 임동진, 안소영(본명 안기자)이었다. 2편과 3편은 선우일란, 마흥식 주연으로 바뀌었으며 1994년 6편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내리막을 걸으며 끈질기게 1996년 13편까지 제작되었던 애마부인 시리즈와 달리 산딸기 시리즈는 그래도 시리즈를 거듭해도 대체적으로 퀄이 극악까진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당시의 극장용 에로 영화는 일본의 핑크무비 혹은 로망 포르노와 비슷한 것으로 90년대 나온 국산 비디오용 에로 영화와는 달리 일정하고 개연적인 스토리가 있었으나, 다양한 소재를 실험하여 명 감독의 산실로 불렸던 로망 포르노와는 달리,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 성적 불만에 가득 찬 유부녀, 성불구이거나 혹은 일중독인 남편, 그리고 정력 절륜한 불륜남. 또는 불감증에 걸린 현모양처, 강간과 같은 특수한 경험, 요부로 변신.

원래는 실비아 크리스털이 주연하고 당시에 수입 불가 판정을 받았던[1] 포르노 수준의 '엠마뉴엘 부인'을 모티브 삼아 노골적으로 여성의 성욕을 표현하려는 ''로 하려고 했는데, 당시 심의에 걸려서 한자를 ''로 바꿨다고 한다. 2편부터는 굳이 한자 표기를 하지 않았는데 예외적으로 6편에서는 이라고 표기했다. 시리즈 전체에 걸쳐 애마가 말을 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배우 안소영은 안장도 없이 이 장면을 찍다 하혈을 했다고 한다. '엠마뉴엘 부인'에도 말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용은 뻔하다. 성욕에 가득찬 유부녀가 감옥에 간 남편을 대신해 성욕을 채워줄 남자를 찾아 성적인 일탈을 한다는 내용. 그러나 1편은 생각보다 노출이 적고 베드신도 매우 적다.[2] 그러나 당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고 심야 상영이 시작되자 연인들이 밤에 이런 18금 영화를 보러 오기 시작했고, 1982년 기준으로 엄청난 대박인 서울 관객 31만 5천명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1편이 대성공을 거두자 속편이 계속 제작되었고, 90년대 들어서 비디오 보급의 확대로 극장용 에로 영화가 자취를 감추자, 비디오용 영화로 시리즈가 계속 제작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이 워낙 대박이라 그런지 84년 나온 2편은 서울 15만 관객으로 전작 반토막을 기록, 3편은 서울관객 8만으로 계속 흥행이 내려갔다.

여러 시리즈가 만들어졌는데, 나중에는 정인엽 감독과 영화 제작사 연방영화사[3] 간의 타이틀 분쟁이 일어나 정인엽 감독은 3편까지 만들다가(김욱이라는 감독이 마저 마무리함.) 떠나 따로 두손필름이라는 영화사에서 애마 시리즈를 다른 제목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1988년 현석, 유혜리가 주연한 파리 애마, 그리고 1990년에는 이화란이 주연한 짚시 애마. 예산이 늘었는지 파리 애마는 프랑스 현지 촬영, 집시애마는 스페인 현지 촬영으로 제작되었다. 둘 다 서울 10만이 넘는 관객을 기록해 되려 정인엽이 나간 뒤로 흥행이 주춤해진 애마부인 시리즈보단 흥행에 성공했다. 참고로 두손필름이 바로 영화 레비아탄 수입사인데 이게 해당 영화사 이름으로 개봉작에서 가장 흥행 대박작이다.

4. 역대 애마부인

역대 애마부인은 다음과 같다.

5. 여담

마지막 13편은 극장 개봉이 아닌 비디오용 영화로 나오는데, 시리즈들이 이어질수록 전작보다 훨씬 퀄리티가 떨어진다. 결국 1996년 13편을 끝으로 시리즈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4편에서는 이동준이 남자 주연이다. 이분이 그당시 극장용 에로 영화에 여러편(인신매매를 다룬 매매꾼도 있다) 출연한 것은 흑역사. 김지호의 남편인 김호진도 이 시리즈에 최호진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4편, 5편) 출연한 적이 있다.

강우석, 강제규 감독이 이 시리즈의 조 감독으로 일했다.

씨네21에서 2002년 당시 애마부인 제작 20주년을 맞아 특집 기사를 낸 적이 있다.

1편2007년 3월 3일 KBS 2TV 80주년 기념 '기록을 깬 한국 영화 시리즈'로 방영되었다. 물론 새벽 시간에 방영되었고 지상파에서 방영된 만큼 삭제할 건 다 삭제했으나, 직접 노출이 되지 않는 몇몇 검열삭제 씬은 그대로 나왔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인 엠마가 초창기 한국에서 출판 되었을 때 에마 부인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기도 했다.

2016년 5월 무려 22년만에 신작 애마부인 2016이 개봉했으나 금세 막내렸고 전국 누적 관객 301명으로 잊혀졌다.

참고로 이 영화 1~3편 감독인 정인엽은 1997년에 난데없이 가수 김건모를 주연으로 한 영화 김건모의 스피드를 감독해서 처절하게 망하면서 은퇴작이 되어버렸다. 이후 영화계에서 아주 온갖 횡령에 비리같은 짓으로 악명을 떨치고 보수정당계 관련 정권에서 좌파척결을 외치며 완장차고 설쳐대는 한편으로 영화인 협회 회장, 영화감독 협회 회장으로 수많은 비리들을 저질러 불구속 기소 및 집행유예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보수 성향 원로 영화인들간의 추악한 이권 다툼의 중심에 있다. 아래 링크들을 참고하자.

'좌파 척결' 외치던 보수 영화인들, '돈 때문에' 내분
영화 감독 협회, 이사장 선거 놓고 삼각다툼
보수 온상 영화감독 협회, 세대 교체 이뤄지나
대종상 운영 놓고 서로 으르렁, 영화인 협회 내분 심화 될 듯
원로 영화인들 싸움에 '대종상' 등 터진다
대종상 의혹에 격화되는 원로 영화인들 갈등
이규태 방산 비리, 대종상에 불똥...영화계 옥신각신
시끌시끌한 영화인 협회, 반세기 넘은 대종상의 현 주소 ‘씁쓸’
'출석상 논란' 대종상 코앞... 과연 누가 출석할까

4편부터 8편까지 감독한 석도원은 그 전에 이건주이용식 주연인 은하에서 온 별똥왕자라는 표절 짝퉁 실사합성 아동영화 3부작을 감독한 바 있다.


[1] 5공이 끝난 1994년에야 수입됨[2] 안소영은 슴가로 유명했지만, 애마부인 1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3] 60년대부터 90년대 중순까지 있던 영화사로 애마부인은 11편까지 만들었다.[4] 후에 김부선은 이 영화 한 편을 찍었을 뿐인데 자신이 에로배우로 낙인찍혔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5] 다희아라는 예명으로는 애마부인6 단 한편에 나왔고 정선우라는 이름으로 1980~90년대 영화들에 많이 출연했던 배우이다.[6] KBS에서 방영한 교양 프로그램 '사랑방 중계'에 고정 출연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으나 1993년 초 교통사고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7] 90년대 중후반 일본 포르노에 출연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