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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12-20 16:06:07

에랄도 몬첼리오

에랄도 몬첼리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SSC 나폴리 역대 감독
비토리오 모셀레
(1949)
에랄도 몬첼리오
(1949~1956)
아메데오 아마데이
(1956~1959)

유벤투스 FC 역대 감독
파울루 아마라우
(1963)
에랄도 몬첼리오
(1963~1964)
에르콜레 라비티
(1964)
}}} ||
에랄도 몬첼리오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34 FIFA 월드컵 베스트 XI
FW
라이문도 오르시
FW
올드리히 네예들리
FW
엔리케 구아이타
FW
마티아스 신델라
FW
주세페 메아차
HB
레오나르도 실라우렌
HB
루이스 몬티
HB
아틸리오 페라리스
FB
에랄도 몬첼리오
FB
하신토 킨코세스
GK
리카르도 사모라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파일:Eraldo Monzeglio.jpg
이름 에랄도 몬첼리오
(Eraldo Monzeglio)
생년월일 1906년 6월 5일
사망년월일 1981년 11월 3일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png 이탈리아
출신지 비냘레 몬페라토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72cm / 67kg
등번호 -[1]
소속팀 카살레 (1923~1926)
볼로냐 (1926~1935)
AS 로마 (1935~1939)
국가대표 35경기 / 0골 (1930~1939)
감독 칼초 코모 (1946~1947)
AC 프로 세스토 (1947~1949)
SSC 나폴리 (1949~1956)
SS 몬자 (1956~1957)
UC 삼프도리아 (1958~1962)
유벤투스 (1964)
치아소 (1966~1967)
치아소 (1973)
1. 개요2. 특징3. 선수 경력4. 감독 경력
4.1. 사망
5. 플레이 스타일 & 평가6. 수상
6.1. 클럽6.2. 국가대표6.3. 감독6.4. 개인

1. 개요

이탈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3년에 치아소 감독을 맡았다.

2. 특징

3. 선수 경력[2]

3.1. 클럽

1924년에 카살레 몬페라토에서 데뷔한 몬첼리오는 뛰어난 기량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카살레 구단은 재정적 문제로 인해 몬첼리오를 볼로냐로 팔 수 밖에 없었고, 볼로냐에서 9시즌을 보내며 스쿠데토도 차지하는 등 팀의 레전드로 군림한다.

1935년에는 수비 강화를 통해 우승을 목표로 하던 AS 로마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서 손발을 맞추었던 루이지 알레만디와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정작 몬텔리오가 팀을 떠나자 볼로냐가 또 우승을 차지한 건 함정 로마에서 1938-39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3.2. 국가대표팀

앞으로의 활약상에 비해 대표팀에는 1930년에 데뷔하여 다소 늦은 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30년대 전성기를 이끈 선수 중 하나로 월드컵에서 2회 우승한 이탈리아의 4인 중 1인이다. 풀백 중에서는 유일하다.

특히 193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첫 경기인 미국전을 제외한 4경기에서 활약하였다. 루이지 알레만디, 잔피에로 콤비와 함께 결성한 수비진은 월드컵 5경기에서 단 3실점을 허용하였고, 그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다.

1938년 월드컵에서는 반대로 첫 경기 노르웨이전을 제외하고는 전부 벤치를 지켰다.

4. 감독 경력

1941-42 시즌부터 로마에서 기술 위원으로 코칭 스태프 생활을 시작하였다. 2차 대전 동안에는 다양한 팀들의 감독을 맡았고, 1949년부터 1956년까지 SSC 나폴리의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UC 삼프도리아의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잠시 나폴리의 기술 위원을 지내다 유벤투스 FC의 감독이 되기도 했다.

유벤투스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스위스의 치아소에서 마지막 커리어를 보냈다.

4.1. 사망

몬첼리오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카살레 몬페라토의 공동 묘지에 묻혔는데 근처에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의 무덤이 있다.

5.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0년대 초기의 WM 포지션에 최적화된 우아한 풀백이었다.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감독

6.4.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백과